# 126
126화
하우서의 1기갑군은 간신히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수백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기차에 타고 달려온 이들은 하나하나 도착하는 대로 즉각 전장에 투입되었다.
증원군은 9군이 소련군의 포위망 안에 갇히기 전에 가까스로 소련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9군 병사들은 증원을 환영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총통은 9군이 스몰렌스크를 결사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라!”
레닌그라드, 아니 ‘아돌푸스부르크’를 청소한 이후 다음 목표는 모스크바. 모스크바로 진군하기 위해선 중부집단군은 단 한 걸음도 후퇴해서는 안 되었다. 스몰렌스크를 공략하느라 죽어 간 전우들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우리가 얼마나 피를 흘려 그 도시를 차지했는지 잊었나? 지금 내주면 뭐가 되는 건가! 겁쟁이들은 이 군대에 필요 없어!”
이쯤 되면 겁에 질리는 것은 북부집단군의 만슈타인 원수였다. 레닌그라드에는 최소한 수만 명의 소련군이 버티고 있었다. 폐허가 되어 버린 시가지에서 이들을 쓸어내려면 그 몇 배에 이르는 병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통의 질책이 두려워 그와 장교들은 총통에게 거짓말을 했다.
[레닌그라드는 곧 우리 손에 떨어질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광기에 미쳐 날뛰는 총통이 자기네들마저 죽여 버릴까 두려워 감히 거짓을 고한 이들은 이제 거짓말의 결과가 눈덩이처럼 굴러 돌아오자 벌벌 떨었다.
그나마 파울 하우서는 만슈타인의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협조해 주었다. 국방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무장친위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유능한 고위 지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국방군 장성 출신이었던 그는 프로이센 융커 귀족들의 군대에 대해서 다른 친위대원들만큼 증오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총통의 분노가 다시 폭발해 만슈타인 원수마저 날려 버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이미 지난번의 국방군 숙청에서 정부는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참사였고.
총통 옆의 무능력한 아첨꾼들이 벼락출세해서 군을 주물럭거리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최소한 하우서는 그렇게 인식했다.
“저희 1기갑군이 어떻게든 막아 보겠습니다.”
“그럴 수 있겠나?”
구데리안 원수는 하우서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구원의 손길이나 되는 것처럼.
구데리안은 분명 독일 최고의 명장 중 하나였다. 그는 전쟁에서 기갑부대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을 통해 독일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손댈 수 없는 문제들은 독일군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이끌었다.
부족한 보급, 열악한 도로 사정, 그리고 소련군의 막강한 공업능력까지!
2기갑군과 3기갑군은 누적되는 손실 끝에 점점 약해져 갔다.
“차량 중 절반이 전투불능 상태야!”
구데리안 원수는 절규했다. 소련군에게 전술적으로는 몇 배나 되는 손실을 입히는 데 성공했지만 그 피해는 금방 복구되었다.
중부집단군은 지난달 고작 220대의 기갑차량만을 신규 배치받았다. 하지만 소련군은 다섯 배는 되는 증원을 받고 있었다.
포로로 잡은 소련군 장교를 심문한 결과는 중부집단군 사령부를 공황 상태에 빠트렸다.
“서부전선군 예하에는 네 개 기갑군 및 기계화군, 그리고 네 개 제병협동군이 있습니다. 각 군의 편제는….”
심문하던 장교는 처음에는 이 소련놈이 거짓말을 해서 독일군을 겁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교차검증 결과, 그의 말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중부집단군이 상대하는 소련군은 서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각 전선군이 2천 대가 넘는 전차를 굴리고 있었다.
‘우리가 한 달에 몇 대 정도 생산하더라…?’
구데리안은 손가락으로 꼽아 보다가 비교하기를 포기했다.
“저쪽의 그 신형 부됸늬 중전차만 해도 우리 4호 전차보다 많은 것 아닌가?”
“하하하하….”
하지만 절망만 할 수는 없었다. 절망 끝에 기다리는 것은 더 큰 절망뿐이었으니.
프랑스군이 지키던 스몰렌스크 북쪽을 돌파해 달려오던 5근위전차군을 향해 독일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드네프르강을 건너 가해지는 산발적 공세를 막기 위해 차출된 3기갑군을 제외하고, 1기갑군과 2기갑군이 투입되었다. 5근위전차군이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부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독일군이 아예 허수아비는 아니다.
“T-34 6대, 1시 방향! 준비된 전차로부터 발사!”
살아남은 독일군은 강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병기의 질적 수준은 소련군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는 못했으되, 수는 월등히 적었다.
그 상황을 헤치고 생존해 에이스가 된 이들을 강력한 중전차에 태우자 이들은 전장을 제집처럼 활보하며 소련군 전차들을 깨부수고 다녔다. 소련군의 중전차들 역시 강력했지만 슈퍼 에이스들은 압도적인 교환비를 올렸다.
“으하하하하, 부됸늬도 두 번 죽는구만?”
예컨대, 여덟 대의 부됸늬 전차를 단 2대의 판터로 격파한 503대대의 기갑상사 쿠르트 크니스펠. 그는 사진사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푸하하 웃으며 농담을 던진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독일군의 중전차대대에는 이런 에이스들이 열몇 명씩은 들어 있었다.
“최고의 병기에는 최고의 조종수가 어울린다! 위대한 독일의 에이스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하도록!”
총통의 명령은 지엄했다.
그토록 맹렬하게 진격하던 5근위전차군은 독일군의 맹공 앞에 주춤했다. 5근위전차군 하나에서만 며칠간에 적어도 200대가 넘는 전차가 격파당했다.
아마도 비슷한 숫자의 전차가 가동불능 상태 아닐까? 독일군의 참모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전선의 소련군은 끔찍하게 많았고, 사기마저 높았다. 장비마저 충실히 갖추자 소련군은 괴물 같은 군대로 돌변했다.
적군의 사령관은 일선에서 전차를 타고 돌격하며 총질을 하는 미친놈으로 유명했다.
“돌격! 돌겨어어어억!”
“우라아아아!”
그래서 그런지, 1기갑군과 2기갑군이 상대하는 소련군은 정석적인 수로 일관했다.
‘미친놈’이 지휘하는 5근위전차군은 끔찍하게 전투의지가 높았다. 다들 자기네 사령관처럼 미쳐 있는지, 엔진룸에서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도 어차피 죽는다면 파쇼 놈들의 대갈통을 하나라도 더 따고 죽겠다고 돌진했다.
“소련 만세! 혁명 만세! 부됸늬 원수의 복수다!”
“으아아아악! 저 미친 새끼!”
뭐, 사람이 기관총에 걸레짝이 되는 것보다는 무정물인 전차가 폭발하는 것이 독일군 입장에서는 정신적으로 덜 부담이 되었으니 낫다고 해야 할까?
[적의 공세는 서서히 멈춰 가고 있습니다! 다른 방면에 증원이 더 필요하다면 그쪽으로 보내 주십시오!]
“알겠네, 잘했소!”
구데리안과 하우서는 일선 사단장이 보내오는 통신을 듣고, 마주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독일군은 반격을 통해 9군으로 가는 철도 수송선을 복구하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멋모르는 병사들은 환호했다.
“소방수가 왔다! 기갑군이 왔다!”
무너져 가는 전선을 복구하고 아군을 구원하는 소방수. 병사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기갑군의 역할을 상찬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의견과 달리 참모장교들, 특히 기갑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참모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기갑병과는 본질적으로 공세의 수단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무너지는 전선을 막는 용도로 전락했다는 것은….”
좆됐단 거지. 입이 거친 누군가가 작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들 들어버렸다.
좆됐다. 이 말은 독일군의 상황을 요약했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기갑부대는 공세의 최선봉으로 소련군의 진형을 허물어트리고 극초반의 대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제는 뚫린 전선을 복구하기 위해 밀어 넣는 소방수로 전락해 버렸다.
단 1년 만에! 단 1년 만에 공자와 방자가 뒤바뀐 것이다. 소련군은 점점 기갑부대를 능숙하고 세련되게 운용하기 시작했다. 한때 자기네 무기를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서 어버버하다가 박살이 나던 소련군은 이제 없었다.
장교들은 알고 있었다. 소련군이 이 정도 속도로 성장한다면… 내년, 혹은 내후년에는?
총통은 전선을 뒤집어 놓을 ‘슈퍼 무기’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 전에 베를린이 함락당하지나 않을까, 몇몇은 그렇게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아직도 모스크바까지는 400km가 남아 있었다. 소련군과 그놈의 전차로 꽉꽉 들어차 있을 400km가.
소방수들은 불을 끄기에도 부족했다. 이들에게 앞으로 가서 적을 때려 부수라 한다면… 가능할까? 장군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아군 공세가 돈좌당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어느 정도는 예측한 상황이다. 전선에서 호출당한 로코솝스키는 평소라면 휠체어에 앉았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러지도 못했다. 말 그대로 이를 딱딱 부딪치며 그는 떨었다.
굴라그가 그렇게 무서운가? 뭐, 공세가 완전히 실패한 것도 아니고 막힌 것 가지고 소련 최고의 명장 중 하나를 굴라그에 처박을 생각은 없었다.
“패배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오?”
“적의 전차부대가 대거 등장해 역습을 가했습니다. 아군은 공세종말점에 이른 상태가 아니기에 재편하여 맞서 싸웠으나 파쇼 9군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로코솝스키 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서기장 동지. 파울 하우서가 지휘하는 1SS기갑군이 북부집단군 구역에서 중부집단군 구역으로 남하했습니다. 아마 로코솝스키 장군이 마주친 거대한 적 기갑부대가 이들이 아닐는지요?”
웬일로 베리야가 남 편들어 주는 소리를 했다. 레닌그라드에 진입한 이상 시가전을 위해선 전차가 딱히 엄청나게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장 야전군 하나가 포위당하게 생긴 중부를 위해 구원군을 보냈을 테지.
“저들은 기갑부대를 전장의 소방수로 운용합니다.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강력한 예비대로 1개 야전군에 달하는 병력을 획득한 이상….”
완전한 포위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로코솝스키는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굴라그가 무서울 뿐이지.
흐음, 이렇게 된 김에….
“자네들, 전차부대의 가장 큰 약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예?”
뜬금없이 선문답을 하자, 장군들이 당혹해했다.
전차의 약점? 그야 많지만, 서기장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물며 로코솝스키가 이렇게 막힌 상황에서 묻는다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까?
“…아무래도 지형을 가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스푸티차가 오거나 프리퍄티 같은 늪지에서는 전차를 운용할 수 없습니다.”
호오, 초장부터 내가 생각한 정답과 비슷한 답이 나왔다. 톨부힌은 덩치에 맞지 않게 잽싸게 손을 들고 대답했다. 아마 작년의 남부전구 작전을 겪어 봤으니 그렇겠지?
“맞소. 내가 생각한 정답은 아니지만. 물론 로코솝스키 대장에게는 대단히 도움이 되는 대답일 것이오.”
로코솝스키는 고맙다는 듯 톨부힌에게 눈짓을 했다. 장군들은 다시 답을 생각하는 눈치였다.
“보급 역시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지상군을 상대로는 강력하지만 공군을 상대론 무력한 것이 아닐는지요?”
이것저것 전차의 약점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 튀어나왔다. 여전히 정답은 없지만… 쓸만한 답은 될 것이다.
“그렇소. 다들 맞는 말이오. 자, 종합하자면….”
적이 전차를 활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차가 기동하기 어려운 험지로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보급을 괴롭히고, 공군을 활용해 전차를 소모시킨다. 이게 바로 작전 규모에서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중부집단군의 상황에 대입하자면? 프리퍄티 습지를 끼고 적의 배후를 교란할 기동부대를 운용할 수 있소. 한때 우리의 부됸늬 원수가 했던 것처럼.”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기병 지휘관으로서 그는 본능적으로 기동전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상대의 주력이 빠진 자리를 찌른다. 적이 오면 추격하기 힘든 곳으로 도망친다. 적백내전 시절 깨달은 방식이었을까?
“그리고 파르티잔들을 활용할 수 있소. 저들의 보급소요가 크다면 그 보급을 담당하는 철도에 공습을 가해 파괴하면 되는 것 아니오?”
“역시, 서기장 동지는 가히 군신과도 같으십니다!”
“고대의 영웅이 살아 돌아온 것 같습니다!”
온갖 아첨이 쏟아졌다.
어휴, 민망해라. 숙청 마렵게 왜들 그래? 방금 낯 뜨거운 소리를 한 놈들은 기억해 둬야겠다.
내 시선을 받은 아첨꾼들은 얼굴을 붉혔다.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점은 이거요. 기갑부대는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지.”
“???”
서기장이 말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그렇다고 외쳐야 하는 소련군인지라 직접적으로 반론하지는 못했으나 장군들의 표정은 기묘하게 변해 있었다.
특히 나한테 아첨하던 두 놈. 이걸 지금 칭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다.
방금까지 기갑부대가 빠르게 전장에 투입될 수 있어 좋은 예비대라고 하던 놈이 이러면 웃기겠지만….
“자네들이 생각하는 기동성은 전술적 기동성이지. 전략적으로 보면 한참 떨어지지 않겠나? 그 무겁고 덩치가 큰 전차들을 어떻게 이 광대한 땅에서 옮겨 다니겠나?”
그 말을 바로 이해한 로코솝스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역시 명장은 다르구만? 눈치 없는 보로실로프나 아첨꾼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나는 설명을 하기로 했다.
“파시스트 군대는 보급에도 철도 수송용량이 부족한데, 뭘 가지고 어떻게 저 많은 전차들을 북부에서 중부, 남부로 옮겨 다니겠는가? 간단하지 않나?”
“아!”
“흐음, 저 파쇼 놈들이 중부에서 우리 공세를 막아냈으면 우리는 다른 곳을 찌르면 그만이네. 묵직한 기갑부대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만드는 것이지. 그러다 보면… 한 곳은 뚫리지 않겠나?”
으하하하하, 통쾌한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지금 여기서 막으면 어쩔 건데?
독일군은 아랫돌 빼다 윗돌 괴는 식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국지적으로 기갑부대를 활용해 막아낼 수는 있겠지. 그런데 다른 곳이 뻥뻥 뚫릴 뿐.
“자, 다음 공세는 어디서 취하는 게 좋겠는가? 레닌그라드? 드네프르강? 우크라이나? 아니면 발칸에서?”
물론 내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중부에서 군을 짤라 먹는 게 어려워졌다면? 그럼 레닌그라드에서 짤라 먹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