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125화
호르티 미클로시는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군 제독으로 승승장구했다. 황제의 전속부관을 지냈고, 해군 반란을 진압해 제독의 위에 올랐으며 패전 직전에도 공을 세워 중장이 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는 해군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연합국의 외교관들은 간악한 세 치 혀를 놀려 제국을 갈가리 찢어 가졌다. 연합왕국은 해체되었고, 헝가리는 바다로 나갈 길을 상실했다.
바다 없는 나라의 제독이라니. 그는 지금도 종종 그렇게 되뇌이며 쓰게 웃었다.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는 전성기의 ⅓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일으켰는데, 피해는 헝가리가 봤다. 헝가리인들은 끓어올랐고, 심지어는 공산 폭동에도 참여했다. 호르티 제독은 몸서리쳤다.
‘더러운 국가 반역자들.’
물론 그 자신도 깨끗하다 하기엔 어렵다. 호르티는 잘 알고 있었다.
트란실바니아를 뺏겨 놓고도 루마니아와 협력하여 공산 폭동을 진압했다. 그리고 군주의 자리를 ‘찬탈’했다.
“왕이 없는 나라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나라의 제독….”
세상 사람들은 그를 칭할 때 웃곤 했다. 왕을 쫓아내 놓고 섭정을 자칭하며, 바다를 잃어 놓고 제독을 칭한다.
그리고 이제는 기묘한 칭호가 하나 더 붙을 것도 같았다. 흐음, 무엇이 되려나.
인장으로 봉인된 서류를 뜯어 뒤적거리는 그의 주름진 손이 떨렸다. 시대는 그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헝가리군은 독일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했다가 함께 처참하게 패배했다. 소련은 루마니아 내부에서 쿠데타를 사주했고, 인접한 루마니아는 폭도들에 의해 옹립된 어린 왕이 통치하게 되었다.
한때 제국의 일부였던 유고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아예 왕이 쫓겨나고 소련이 조종하는 폭도들이 설칠 뿐이지.
헝가리는 이제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형세였다. 언제든 저 붉은 군대와 붉은 물이 든 군대가 영토로 진군해 들어올 수 있었다.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겠답시고 사단들을 닥닥 긁어 북으로 보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헝가리를 위한 짐을 지시오 -이오시프 스탈린>
이제 소련은 헝가리도 굴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피를 더 뿌리고서야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라가 폭도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방조할 것인가?
물론 헝가리 정부의 ‘요청’에 따라 독일군은 부다페스트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군부의 친독 인사들이나 화살십자당 파시스트 패거리들은 공공연히 독일군의 영구 진주를 이야기했다.
호르티는 그런 상황을 막을 힘이 없었다.
“섭정 각하? 섭정 각하?”
똑똑똑, 그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가문을 섬겨온 늙은 집사였다. 섭정이 되어 공관에 거주하게 된 이후로도 갖은 핑계를 대 늙은 집사를 데려왔다.
수십 년 동안 그를 보았기에 호르티는 누구보다도 그가 편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집사는 말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뭐가 그리 급하다고? 진짜 급한 일이라면 아마 전화가 왔을 것이다.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호르티는 방문을 열었다.
“섭정 각하… 죄송합니다….”
“…!”
늙은 집사는 웬 솥뚜껑만 한 손에 붙잡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손의 소유주는 손의 크기 때문에 장난감같이 보이는 권총을 집사의 머리에 겨누다가 이제는 호르티에게 겨누었다.
충격과 공포 때문에 호르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집사를 붙든 거인은 실로 흉측하게 생겼다.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체구뿐만 아니라 왼뺨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흉터 때문에 그는 무슨 신화 속의 전사처럼 보였다.
“아, 섭정 각하. 혹시… 조용히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거인은 권총을 딸깍하고 장전하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호르티는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한때 군인이었다지만 지금은 정치인이었다. 현재 신문의 최고 화제인 무장친위대 프리덴탈 특공대를 모를 리 없었다. 그 대장의 용모가 그리도 특징적이었으니 더더욱. 바로 오늘 받아본 독일 신문만 해도 슈코르체니와의 단독 인터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거들먹거리고 있어야 할 자가 왜 부다페스트의 섭정 공관에 와 있는가?
“슈코르체니… 당신이 왜?”
“예, 그렇습니다. 상급돌격대지도자, 오토 슈코르체니입니다 각하.”
그는 늙은 집사를 휴지 조각처럼 다루었다. 아무리 늙고 말랐다지만, 성인 남성을 한 손으로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이를 호르티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방금까지는.
집사의 입과 손발을 묶어 침대에 내던진 후 슈코르체니는 거대한 손을 내밀어 얼어붙어 있던 호르티를 붙잡았다.
“다만…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드렸을 텐데요.”
“읍! 읍!”
슈코르체니는 뒤에 지고 있던 등짐에서 거대한 자루를 하나 꺼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제압당한 섭정 각하를 능숙한 손놀림으로 자루에 넣고는 그는 씨익 웃었다.
“집사 어르신, 조용히 하고 계시오.”
“읍! 읍! 읍!”
집사는 몸부림쳤지만 굵은 군용 밧줄이 손목 발목을 파고들 뿐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오랫동안 섬겨 온 주인이 짐짝처럼 들려 잡혀가는 것을 봐야만 하는 늙은 집사는 너무도 무력했다.
마치 헝가리처럼.
* * *
“어이, 너희들은 성공했나?”
“예엡, 대장. 뭐, 쉽던데요?”
의식을 잃은 근위병들을 뒤로하고 프리덴탈 특공대원들은 시시덕거렸다.
총통은 부다페스트에서 두 명을 납치해올 것을 명령했다.
한 명은 현재 섭정인 호르티 미클로시. 또 한 명은 섭정의 둘째 아들인 호르티 니콜라스. 큰아들 이슈트반은 헝가리 공군부대 소속이었으니 아마 헌병들이 끌고 갔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납치한다고 될까요? 오히려 빨갱이들이 설치지 않을까요?”
“으음… 그건 나는 모르겠네.”
군인은 까라면 까고, 시키면 하는 존재지. 왜 하는지, 이게 맞는지, 이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슈코르체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깨에 짊어진 호르티가 움찔거렸다.
총통이 직접 두 사람을 납치해 오라고 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분들의 심모원려를 내가 어찌 알까?
이제 어려운 부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베를린에 있어야 하는 놈이 여기 나타난 고로 사람들은 그를 거의 귀신 혹은 괴물처럼 생각했다.
“자! 가자! 집으로!”
“예이~!”
* * *
두 번째 참수작전에서도 슈코르체니 부대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포르투갈에서 살라자르를 납치하는 데 성공한 것에 이어 헝가리의 지도자 호르티 미클로시와 그 아들들을 납치한 것이다.
현지에 주둔한 병력들과 포르투갈, 헝가리 내부 친독파의 협조를 얻어 가능했던 것이긴 하지만 총통은 기쁨에 겨워 날뛰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대승리다! 승리! 으하하하하하!”
“감축드립니다!”
전과와 승리에 목말라 있던 총통에게 슈코르체니의 쾌거는 가뭄에 단비 같았다. 간만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듯한 총통은 척척 명령을 내렸다.
“화살십자당 놈들에게 징병 명령을 내리라고 해. 발칸의 방어 정도는 자력으로 해야지. 뭐, 그 동네에서 징집한 SS 부대들은 그쪽에 둬도 좋다.”
호르티의 빈자리에 독일은 괴뢰 극우 정권인 화살십자당을 채워 넣었다. 독일에 망명 중이었던 샬러시 페렌츠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이들은 독일에게 잘 보이려고 별짓을 다 하고 있었다.
“한 20만, 30만 명만 징병하면 유고 빨갱이 놈들이 준동하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나? 크로아티아에서도 그만큼 뽑아내고.”
물론 총통의 명령에 불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간 큰 이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아무리 부당한 명령을 내려도 최소한 총통의 앞에서는 모두가 옳다고만 했다. 그나마 그게 가능한 이들은 다 중책을 맡아 전선에 나가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총인구가 400만이 채 안 되는데 어떻게 20만을 징병할 것이며, 무슨 무기로 무장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헝가리군이 과연 독일이 개입한 쿠데타를 승인하고 복종할지, 자기네 군인을 무단으로 납치한 것을 용인할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추가적인 5~60만 병력을 발칸에 배치하면 파죽지세로 베오그라드로 진군하는 파르티잔들을 막을 수 있겠다,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아돌푸스부르크’의 잔당들은 아직 처리를 못 했나? 만슈타인 원수가 뭐라고 하던가?”
“예, 도시가 워낙 커서 아직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이….”
그래? 흠. 알아서 잘하겠지. 총통은 그렇게 주억거리면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무리 절대 권력을 휘두를지언정, 총통은 최소한 그가 총애하는 장군들의 작전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좌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총통은 지금까지는 큰 방향 면에서는 마치 예언하는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정확히 예측했다. 그러고는 휘하 장군들에게 일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약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총통 각하께서 알아서 다 이끌어 주시지 않을까? 민족의 지도자에게 절대 복종하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대중의 의무인 법. 그들은 총통을 신뢰하고 싶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져야 할 짐이 너무나도 거대했기에.
* * *
“저, 저, 저, 미친 새끼들 아니야?”
“…송구합니다, 서기장 동지.”
베리야는 얼굴이 확 굳어 내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난 베리야를 아직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미친놈의 생각을 예측하지 못했다 해서 정상인이 처벌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베리야도 엄청 멀쩡한 애는 아니지만… 미치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아니, 우리는 그나마 현지 협력자를 갖다 세웠지만 저기는 아예 자기네 나라에 있던 놈을 가져다 꽂았더만? 제정신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전부터….”
아 하긴. 이전부터 별 기괴한 짓들을 했지.
상실한 영토를 수복하면서 독일군이 저지른 만행들이 낱낱이 드러난바 저들이 실제 역사나 그 이상으로 미쳐 있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했다.
변한 것은 히틀러니, 그놈이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고 봐도 되겠지. 하지만… 문제는 헝가리 수준이 아니었다.
적국의 지도자를 테러하고 납치하는 것은 전쟁 중이라면 상식의 범위 안에 들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방식이 무슨 NBC나,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하는 게 아니라면야.
호르티의 납치는 그저 사후에 어떻게 헝가리를 관리할지가 문제 되는 일이었다.
진짜 문제는, ‘SS 방역대’에 있었다.
독일군 물자 관리에서 그 이름을 본 순간 등골에 쭉 소름이 돋았다.
씨발, 저 미친 새끼들.
“그나저나 서기장 동지, 이 부대들은 어떤 사유로 조사하라 명령하신 것인지…?”
베리야는 두 개의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둘의 공통점은 방역 업무를 하는 부대라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사람들도 갸우뚱했다.
대체 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두 부대를 함께 엮는가? 하나는 독일 무장친위대의 방역대였고, 하나는 일본 관동군의 검역급수부. 둘이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서류철을 들여다보는 내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미래를 알고, 오가는 물자의 내역을 보았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미친놈들….”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베리야는 부하들을 시켜 복사본을 나누어 주었고, 대체 무슨 일인지 이들은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음, 방역대에 대체 왜 몇천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필요한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 치클론은 마구용 살충제 아닙니까? 파쇼 친위대엔 기병부대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냈다.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다.
“보로실로프!”
“옛! 서기장 동지!”
하지만 우리 눈새, 보로실로프는 그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눈치채지 못했어도 괜찮다.
“이… 하얼빈과 리가에 침투해 시설들을 박살 낼 수 있겠는가?”
“예에?”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얼빈? 만주?
“하지만 일본 제국과 우리는 지금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 습니다….”
내 노려보는 눈빛을 받은 장군 하나가 급격히 움츠러들었다.
보로실로프는 일단 가능한가, 아닌가부터 따져 보는 것 같았다. 스페츠나츠라고 해서 순간이동을 해서 뿅 하고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하얼빈이라면 중국 쪽으로 돌아 침투한다든가, 연해주를 통해 갈 수도 있겠지만… 리가? 발트 지역의 대도시인 리가로 가려면 독일군의 방어선을 그대로 돌파해야 했다. 지금 밀어붙이고는 있다지만 무장한 수십, 수백 명을 침투시켜 ‘시설’을 박살 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명령하신다면 가능할 것입니다만….”
“그럼 하게. 최대한 빨리!”
“예!”
그동안 이렇게 화내는 나를 보지 못했던 이들은 칼같이 각을 잡고 경례를 붙였다. 씩씩거리며 회의실을 나오는 내게 베리야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서기장 동지, 혹시 이곳들이….”
내 눈빛을 받은 베리야는 이해한 듯했다. 그리고 역겨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도 충분히 역겨워, 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 표정을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들에 대한 역겨움으로 해석한 베리야는 가능한 한 최선의 지원을 하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빌어먹을 새끼들. 내가 아는 것보다 규모가 훨씬 큰 것으로 보아서 뭔가 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에 일본에다 선전포고를 때리고 갈아 버리고 싶지만… 현실 정치가로서 스탈린의 기억은 날 만류했다.
루즈벨트에게 알려야지. 마치 형한테 이를 거라고 하는 꼬맹이 같지만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루즈벨트라면, 혹은 월리스라면 트루먼처럼 자료를 받고 범죄자들을 사면하는 뒷거래를 해 줄까? 모를 일이다.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