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화
“위대한 우리 군대는 레닌그라드를 정복하였습니다! 독일 민족 만세!!!”
괴벨스는 라디오를 통해 그렇게 쩌렁쩌렁 외쳐 댔다.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병사들이 행진하고 한때 차르의 궁전이었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가 휘날렸다.
이 모든 장면들은 촬영되어 베를린으로 옮겨졌다. 수많은 신문들이 마치 소련이 내일이라도 굴복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심장을 뜯긴 묵시록의 붉은 용]
한 신문은 이런 표제어를 걸고, 창에 찔려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스탈린의 머리를 한 용을 만평으로 그렸다.
선풍적인 호응을 얻은 만평은 곧 나치당의 기관지와 괴벨스의 연설에도 등장했고, 종내 곳곳에는 만평을 담은 벽보가 나붙었다.
대학가에, 사거리에, 소련을 당장 내일이라도 정복할 것처럼 환호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한때 혁명의 심장이었던 레닌그라드가 뜯긴 이상, 제아무리 거대한 거인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쓰러져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신문들은 기사를 쏟아 냈다. 방송과 신문과 모든 매체는 독일민족의 위대한 승리와 세계정복에 관하여 지극히 꿈결 같은 이야기들만을 반복했다.
물론 현실은 조금 더 냉혹했지만.
* * *
“빌어먹을, 왜 또 거기서 병력이 튀어나와?”
“각하, 이곳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당장에라도….”
탕, 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타. 사단 지휘부를 전진 배치한 116사단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소련군들에 의해 예상외의 시가전을 치르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는 거대한 도시였다. 공군이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던 프스코프나 스몰렌스크보다 훨씬 더 거대한.
단순히 레닌그라드 본 도시뿐만 아니라 연결된 여러 위성도시를 합치면 스무 배, 서른 배는 더 넓었고 건물 역시 훨씬 빽빽했다.
소련군은 도시 외곽의 코뮤날카 아파트들에 숨어 있다가 포격이 그치자 순식간에 도시 속으로 다시 숨어들었다. 그리고 복잡한 지형에 익숙지 않은 독일군보다 훨씬 더 폐허 속에 잘 적응했다.
“포격 지원은 불가능한가?”
말해 놓고도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사단장은 탓해야 했다. 적아가 난잡하게 뒤얽혀 있었고, 온갖 건물의 잔해들이 중장비의 기동로를 가로막았다.
불과 화약의 폭풍이 한번 휩쓸고 간 자리에는 부서진 도시의 잔해만 남았다. 하지만 그 잔해들은 병사들에게는 거대한 미궁이 되었다. 곳곳에 치명적인 적군을 한가득 품고 있는 미로.
“이곳에서 대체 어떻게 싸우라는 건가! 대체!”
참모들이 그걸 알 리가 없다마는 사단장은 분통을 터트렸다. 포격이나 공중 지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오직 사람과 사람이 맞붙는 끝없는 미로 같은 전장.
막 도시에 진입해 놓고 독일군은 총통의 명령에 따라 ‘잔당’ 진압이 아니라 성대한 개선식을 치렀다. 독일군이 에르미타주 같은 주요 명소들만 서둘러 행사를 위해 장악하는 동안 소련군은 순식간에 요소요소로 파고들었다.
탕! 이번 총소리는 너무 가까웠다.
야전에 설치한 임시 천막은 총기에 대한 방호력을 전혀 제공해 주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듯 쏘아 대는 아군의 기관총 소리가 들렸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각하, 저격으로 인한 장교단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퇴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시가전에 훨씬 더 적합한 무장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시가전에서 탱크는 필요가 없다. 건물 사이에 매복해 있다 적군이 던지는 화염병에 유폭을 일으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야포나 항공기 같은 무기들도 야전보다 훨씬 쓸모가 적었다.
평평한 지면을 파고 숨어 있는 참호전보다도, 건물의 수직성을 이용해 은신한 적병을 잡아내는 것은 몇 배로 어려웠다.
소련 보병들은 여기에 더해 시가전에 유용한 무기들도 대량으로 갖추고 있었다.
“아군 병사들은 유탄발사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기관총 진지를 제거할 로켓포와….”
“그것 외에도 박격포나 수류탄 같은 무기들도 추가적인 요구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놈의 로켓포, 로켓포!”
사단장은 버럭 짜증을 냈다. 건물의 폐허 속에 숨어 있다가 로켓포 한 방을 발사하고 도망치는 소련군들은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잡으려고 총질을 하여도 로켓포의 사거리가 훨씬 길었다.
기관총이라면 차라리 소중한 중장비들은 못 건드리겠지만 로켓포는 그런 중장비를 처리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파편을 한바탕 끼얹어 주는 유탄발사기나 수류탄, 고각발사로 시가전에서 그나마 사용 가능한 곡사화기인 박격포 같은 물건들을 소련군은 독일보다 훨씬 많이, 잘 활용했다.
또,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저놈들, 여길 버렸는데 그건 대체 무슨 생각이지…?”
레닌그라드에 원래 거주하던 수만 명의 민간인들은 이미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 사라진 것 같았다. 공장 설비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미술품들도, 이 도시에 남아있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병사들은 본국에 보내기 위해 귀중품들과 유적의 미술품을 ‘접수’하려 했으나 그 어떤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숨어 있던 소련군들에게 반격당하고 화들짝 놀라 쫓겨났다.
쥐새끼들 같으니라고… 저들은 잃을 것이 없었다.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저들은 레닌그라드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시민들, 공장들, 예술품들을 지키려고, 그것을 빼돌릴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반면 독일군의 입장은 달랐다. 총통은 소련의 산업 능력을 꺾기 위해, 그리고 저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아군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 명령했다. 총통의 명령 때문에, 또 대국민 선전 때문에 독일군은 어찌 되었건 이 도시를 접수해야만 했다.
‘아무 의미도 없건만.’
빠드득, 이가 갈렸다. 수십만 장병들의 핏값을 치르고 온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였다. 소련군은 필사적 -으로 보이는― 방어를 통해 여기가 마치 대단한 가치가 있는 곳인 것처럼 독일군을 감쪽같이 속였다.
이 깡통 속에서, 소중한 대독일의 아들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 * *
“저, 저 *만한 건물 하나 못 밀어 버리고 이 짓을 하고 있는….”
탕! 병사들에게 생난리를 피우던 독일군 대위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소련군이 장악한 건물에서는 저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지독하게도 실력 좋은 저격수가 숨어 있는지, 한 번 총성이 울리면 반드시 한 명이 쓰러졌다.
중대장, 소대장, 군의관과 의무병, 명령을 전달하러 온 연대 참모장교까지. 부대의 장교들이 하나하나 죽어 나가는 것을 본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찍었다.
고작 4층짜리 벽돌 아파트인데 포격과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반절만 허물어져 있었다. 그렇게 군데군데 생긴 틈으로 소련군들은 온갖 무기를 독일군에게 뿌려 댔다.
병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는 박격포 사격이 날아왔다. 접근하는 병사들에게는 기관총이 쏟아졌다. 망연자실한 병사들은 그저 엄폐한 채 시간이나 죽이며 가끔 한두 발씩 소총을 발사할 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저 4층 건물이 네바강을 건너 레닌그라드 북서쪽의 시가지로 진입하는 지역을 막고 있는 핵심 거점이라는 것이었다. 몇 명인지 모를 소련군이지만 최소 일개 연대급의 공세가 이곳에서 꽉 틀어막혀 있었다.
“*발, 그럼 그냥 전차로 밀어 버리면 되는 거 아냐?”
라고 말한 한 장교는 장갑차와 전차를 끌고 건물을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안에서 버티고 있던 소련군은 로켓포를 가지고 있었는지, 전차 세 대와 장갑차 한 대가 가까이 접근하자마자 대뜸 로켓포부터 발사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접근하는 병사들에게는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이미 몇 번 반격을 겪어 본 병사들은 최소한의 피해만을 내고 다시 엄폐호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차들의 운명은 더 비참했다.
“악!”
로켓포에 의해 격파된 전차에서 탈출하던 전차병은 한 음절도 못 되는 단말마를 내뱉고 절명했다. 건물을 등진 채 앞으로 쓰러지는 그의 뒤통수에는 검붉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더럽게 잘 쏘는 저격수는 도망치는 전차병들을 하나하나 사살했다.
새로 부임해 아직 저 건물이 어떻게 방어되는지를 모르는 신참 중대장은 이 광경을 보고 분개해 돌격을 명령했다.
“돌격! 돌격! 일단 건물에 돌입하면 된다!”
“…와아아아아!!! 총통 만세! 승리 만세!”
자살명령에 가까웠으나 어쨌든 병사들은 명령에 복종했다. 400미터에 가까운 평지를 층층이 쌓인 건물에서 날아오는 기관총 포화를 뒤집어쓰며 돌격하라, 라고 명령하면 아마도 불복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건물이 돌입하면 될 것이라는 명령은 어쩐지 조금 더 설득력이 있었다. 독일민족을 위하여, 총통을 위하여!
그렇게 외치고 병사들은 돌격했다. 그들의 돌격을 본 옆 중대 역시 돌격명령을 내렸다. 이미 몇 개 건물을 청소하는 데 활용되었던 묵직한 화염방사기를 든 병사들은 돌격의 후미에서 안전하게 그들을 따랐다.
사실, 이것이 명예로운 죽음과 개죽음 사이의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
기관총에 반신이 너덜너덜하게 뜯겨 나간 병사는 하늘을 보고 쓰러진 채 어머니를 찾았다. 방금까지 외치던 독일 민족의 영광과 위대한 총통 각하의 은혜에 대해서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집에서 기다릴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날 뿐.
다행히도, 돌격로는 잘 포장된 평지였다. 그 말인즉슨 최소한 돌격하는 보병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뢰는 파묻혀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불행인 점은 돌격로가 잘 포장된 평지였다는 것이다. 보병이 두 번째로 두려워하는 기관총이 몇 정이나 기다리고 있는 건물을 향해 돌격해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수백 명이 돌격하는 동안 건물로 향하는 길에 백 구는 족히 되는 시체들이 더해졌다. 며칠 전부터 건물을 향해 공세를 가하다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썩는 위에 신선한 피가 뿌려지고 새 시체들이 층이 되었다.
포탑이 사출된 채 건물 옆에 방치된 독일군 전차를 지나, 수십 명의 병사들이 아파트의 문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텅, 텅, 텅, 텅, 그리고 안에서는 지난 며칠간 독일군이 학을 떼게 된 발사음이 이들을 환영했다. 유탄발사기다! 눈치가 빠른 병사 하나가 그렇게 외쳤지만 그의 반응은 눈치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파편의 샤워가 지나간 이후 입구 근처에 병사들이 쓰러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적었고, 전투의지가 있는 이들은 더 적었다. 용맹한 몇몇은 수류탄을 위층의 창문으로 던져 넣으려 시도했다.
“어, 씹….”
하지만 수류탄 한 발이 창문 턱에 맞고 튕겨 나오자 수류탄을 던진 병사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던 마지막 말이었다.
순식간에 2개 중대의 인원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리고 그중의 다시 절반은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이 없거나 한 치도 앞으로 걸어갈 수 없었다.
아직 뛸 수 있는 백여 명은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피 웅덩이를 철벅거리며 건물 안으로 용감하게 돌진했다.
“저 위의 계단으로! 빨리!”
1층에는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총알이 쏟아지는 곳도 항상 2층 이상이었으니 그곳에 있겠지.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중사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달렸다.
“저… 저건 뭐지?”
눈썰미 좋은 병사 하나가 구석에 잠자코 놓인 네모난 통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소련 군복 같은 카키색에, 어두운 구석에 있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비슷하게 생긴 통들이 구석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통들에는 전선이 하나씩 붙어 위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불길함을 느낀 병사들은 잠시 멈칫거렸다.
“Do svidaniya, gryaznyye fashisty.”(잘 가라, 더러운 파시스트 놈들)
위층에서 소련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탄이 터지기 전까지, 독일군들은 저게 무슨 말인지 고민해야 했다. 별 의미는 없었지만.
펑! 펑!
구석구석의 폭탄이 터지며 파편의 폭풍이 독일군을 향해 휘몰아쳤다. 여섯 발의 폭탄, 소련군이 부르는 이름으로는 <클레이모어>가 구석구석에서 터져 독일군을 향해 강철 베어링과 쇠구슬 4200개를 날려 보냈다.
불과 수십 분 만에 폭음과 총성 사이로 2개 중대가 사라지자 독일 병사들은 겁에 질렸다.
그들은 분명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도시는 불바다가 되었고, 이미 개선행렬까지 하며 본국을 위해 사진까지 찍어 보냈지만… 레닌그라드는 독일의 것이 아니었다.
소련군은 시뻘건 아가리를 쩍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유태―볼셰비키의 수괴 레닌의 이름이 붙은 도시는 독일군의 피를 즐거이 들이켰다.
여기는 지옥일 거야. 한 병사가 중얼거렸다. 그는 한때 읽었던 문학 작품의 구절을 떠올렸다.
‘지옥에 들어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