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20화 (120/300)

# 120

120화

“…잘 가시게, 동지….”

붉은 소련 국기에 덮인 관을 보로실로프가 어루만졌다.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뚝, 깃발을 적셨다.

가장 사랑받았던 장군. 그 누구보다도 전장에서는 앞서 돌격했으며, 병사들을 이해하고 사랑했던 장군. 부됸늬는 이제 없었다.

수많은 인민들이 그를 추모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기 위해서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때 그의 휘하 병사였던 이들, 그가 해방시킨 지역에 살았던 이들. 또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으나 그를 흠모했던 이들.

붉은 광장에서 치러지는 장례식은 검은 옷을 입은 인파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흰 꽃 한 송이를 손에 든 채, 부됸늬의 관 앞에 묵념을 바쳤다. 관 앞에 쓰러져 펑펑 우는 사람들,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분루를 삼키는 사람들. 그런 무리가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소련군은 그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벨라루스의 넓은 평야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부됸늬는 돌아오지 못했다. 노원수는 아마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말과 함께 끝을 맞이했으리라. 추도사를 읽는 보로실로프는 울먹거렸다.

“엄마… 하라부지 어딨어? 하라부지 왜 안 와…?”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혀짧은 목소리로 어린아이가 물었다. 어미는 그저 고개를 흔들며 아이를 더 꼭 끌어안을 뿐. 부됸늬의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가 없는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 하라부지다! 하라부지!”

그의 관 앞에 있는 거대한 영정사진을 보고 아이가 손을 뻗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훔쳤다. 아이는 혼자 명랑하게 조잘댔다. 하라부지가 돌아오면 나랑 말 타러 가기로 해써! 열 밤 자면 오신대써!

“할아버지는… 백 밤 자면 오실 거야….”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붉은 군대의 장군들에게 그렇게 자랑하는 아이를 달래느라 아비는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말을 타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들은 아이는 시무룩해졌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기병이자 소비에트 연방을 위해 헌신한 군인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장례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인파 앞에서 나는 연설을 해야만 했다. 전시 지도자는 누군가를 위해 아파하고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눈물이 나올까 봐 길게 말할 수가 없었다.

후다닥,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짧은 추도사가 끝났다. 다시 움직이는 거대한 검은 인파를 보다가 내 집무실로 다시 들어왔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 버리다니. 역사서를 통해 접했던 부됸늬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옆에서 살아 보고, 정이 들었던 것 같다. 그에겐 열정이 있었고, 생명력이 넘쳤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뜬금없이 보로실로프하고 내 집무실로 쳐들어와서 습지에서 적을 막아 보겠다고 하던 그때부터… 부됸늬는 늘 전군의 선두에서 병력을 지휘했고, 병사들에게는 솔선수범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되어 버렸다.

장군들이 종종 하던 말이 떠올랐다. 용맹한 이들은…

“서기장 동지! 서기장 동지!”

뜬금없이 보로실로프가 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어쩐지 잔뜩 화난 표정을 하고.

그의 뒤에는 아까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장군들이 우르르 따라오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베리야까지? 모두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만하고 다혈질인 주코프는 울그락불그락하며 당장이라도 다 뒤집어 버리겠다고 날뛸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들인가? 베리야 국장?”

“…일단 이것을 보시지요.”

맨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베리야가 내게 웬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휙 잡아채어 보니 큼지막한 알파벳이 박혀 있었다.

독어는 하지 못했지만… 신문에 있는 사진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개새끼들!”

* * *

“자… 하나, 둘, 셋!”

“으하하하하하!”

프리덴탈 특공대원들은 다 같이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작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슈코르체니는 머리 위에 소비에트 원수의 왕별 계급장이 빛나는 군모를 쓰고 사진사를 보며 껄껄 웃었다. 부됸늬를 사살한 증거였다.

물론 현장에서 그를 처형하기 전 찍은 사진들이 있었지만, 가장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은 역시 ‘전리품’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자! 특공대원분들! 이쪽을 봐 주세요!”

수많은 기자들이 그에게 와글와글 몰려들었다. 인민영웅의 훈장을 몇 개나 달고 있던 슈코르체니는 사진을 찍고 나서 훈장을 주섬주섬 정리하며 쏟아지는 질문들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아, 그것은 국방부 공보실에서 배포한 자료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하핫, 이거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지브롤터를 함락시키고 영국을 몰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 국민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일 뿐. 슈코르체니는 유명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하지만 부됸늬 사살작전, 작전명 ‘말 사냥’을 통해 슈코르체니와 프리덴탈 특공대는 일약 제3제국의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193cm, 105kg, 신화에서 막 뛰쳐나온 버서커 같은 거인 전사의 무용담은 온갖 신문과 찌라시들을 통해 퍼져나갔다.

<북구 신화의 버서커인가? 제3제국 최고의 용사! 무장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 오토 슈코르체니!>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다! 나의 비밀 작전들―슈코르체니와 함께>

총통이 직접 그에게 중령 계급장을 수여하는 기념식의 사진은 서유럽 모든 일간지의 1면을 장식했다. 노획한 부됸늬의 금박 AK―41 소총을 들고 포효를 터트리는 그의 포즈를 수백 명의 사진사들이 촬영했다.

“자 중령님! 이렇게, 이렇게 포즈를 취하시지요! 네, 아주 좋습니다!”

“하하… 이걸 얼마나 반복해야 하나?”

물론 스타란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비슷하게 생긴 대역이라도 세우겠지만 그의 특징적인 흉터와 체구는 도무지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SS 최고지도자 힘러, 그리고 무려 총통 각하의 직접 명령 때문에 사진을 몇십 장씩 찍고는 있지만… 강철 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그도 땡볕에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으며 이 짓을 하는 것은 지치는 일이었다.

“예엡,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높으신 분들이 명령하시니 그렇게 해야지요. 자, 이번엔 이렇게!”

“하하하….”

물론,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빌어먹을… 전황이 진짜 안 좋게 돌아가는 것 같기는 한데….’

지금처럼 방송과 신문을 통해 그의 ‘영웅담’을 설파하는 것은 패전으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너무도 뻔한 수작, 너무도 뻔한 이야기들.

부됸늬 하나를 잡아 죽인다 해서 전황이 변할 리 없다. 부됸늬가 일선에서 싸워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그는 결국 딱 그만큼일 뿐이다. 대계를 지휘하는 전략가가 아니라 전선의 돌격대장.

그리고 이런 얕은 수라니.

“슈코르체니 중령님! 이제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오! 알겠네!”

국방군 소속 병사 하나가 달려와 그에게 외쳤다. 슈코르체니는 통나무같이 두툼한 목을 조르던 칼라를 풀어제낀 후 두둑, 두둑, 목을 꺾었다.

“사진사 양반! 나머지는 알아서 잘하쇼!”

“예에? 아… 알겠습니다!”

“자! 가자! 남국에는 그렇게 미녀들이 많다지?”

비슷한 사진작업들을 끝낸 프리덴탈 특공대원들은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이들의 얼굴로 보아서 미녀들을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들 들떠 있었다.

부됸늬 사살을 위해 투입되었던 조는 프리덴탈 특공대 내에서 최약체나 다름없었다.

진짜 정예들은 바로 이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가 이끄는 지대였다. 이들은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원수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한 거물을 목표로 지정받았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박사님! 이분이 우리 목표였지?”

“그다음엔 헝가리까지 가셔야 합니다. 대장.”

“하하하하… 빌어먹게 많구만.”

슈코르체니가 참여하지도 않은 작전에 참여한 것처럼 사진을 찍은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마치 본토에서 온갖 행사에 다녀간 것처럼 위장을 한 후, ‘참수 작전’에 들어가기 위해.

추축국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들 중 ‘약한 고리’는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애초에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영국의 동맹국이었을뿐더러, 이번 전쟁에도 그다지 참여하고 싶지 않아 했다. 바로 옆, 포르투갈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페인의 프랑코가 추축국 가입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중립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코는 결국 독일의 놀라운 승리를 보고 추축국에 가입했다. 파시즘을 탐탁잖아 했던 살라자르는 어쩔 수 없이 추축국으로 끌려 들어가 아조레스 제도 등 포르투갈의 해양영토를 독일군에게 내주어야 했다.

“정보국에 따르면 살라자르는 아조레스가 함락된 이후 자국의 항구인 포르투, 리스본 등을 미국에 개방해 유럽 본토에 미군이 상륙할 경로를 열어 주려 했다고 합니다.”

“하! 빌어먹을 배신자 같으니라고.”

그냥 가만히 잘 있던 포르투갈을 억지로 동맹에 끌어들인 독일이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튼 이들은 명령을 받았다.

“살라자르를 붙잡아 스페인 내 아군 군사기지에 유폐한 후, 즉시 헝가리로 날아가 미클로시를 납치하라는 것이 총통 각하의 명령입니다.”

“미클로시도?”

“예. 그자 역시 소련과 내통하여 국체를 보존하는 대신 휴전, 소련군으로 참전하려고 협상 중이었다고….”

이곳이나 저곳이나 배신자들뿐이군. 슈코르체니는 툴툴댔다.

한때 소련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독일의 날개 아래 있었다. 그 영광스러운 순간들을 슈코르체니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루마니아는 아예 총을 거꾸로 쥐었고, 발칸에서는 파르티잔들이 난동을 피웠다. 핀란드는 다시 간을 보기 시작했고, 헝가리와 포르투갈은 적과 내통하기 시작했다.

“총통 각하께서 왜 그렇게 난리를 피우신 지 알겠군. 전선에서 아무리 싸워도 아군들이 이렇게 제 몫을 못 해서야….”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하하!”

“그래! 맞다! 고난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빛나겠나?”

슈코르체니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마음 한편은 결코 편해지지 않았다. 오직 기책뿐. 총통은 순리대로 일을 풀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윽박지를 뿐이었다.

동맹국의 지도자를 납치한다. 물론 그것을 수행하는 군인으로서는 대단한 과업이었다. 하지만 국가수반이 납치당해 괴뢰정부가 세워진 국가에서는 과연 독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슈코르체니, 스스로가 간단히만 생각해 보아도 결코 좋게 생각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책 중의 하책인데….’

일개 중령인 그가 생각해도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최소한 무슨 개짓거리를 해도 이것보단 낫지 않을까?

물론 그의 고민은 길 수 없었다. 군인은 명령이 내려지면 실행하는 존재. 그는 군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너무나도 충실했다.

“가자! 포르투갈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