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18화 (118/300)

# 118

118화

늙은 원수는 애마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로지나, 네 녀석도 이젠 늙었구나.”

흰 털이 갈기 중에 섞여 보였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지, 로지나는 푸르릉대며 발을 굴렀다. 부됸늬는 끌끌 웃었다.

나도 늙었고, 너도 늙었지. 아직도 세상은 이리 넓은데.

“자, 가자!”

“우라! 우라! 붉은 군대 만세!”

말에 박차를 가하며 함성을 지르자, 그의 부하들이 따라 외쳤다.

만세! 만세! 가슴이 터지도록 불러나 보자꾸나. 붉은 군대 만세!

엔진의 굉음과 말들의 히히힝 우는 소리들이 평야에 가득했다. 용맹한 기병대의 용사들을 축복하듯 공군의 전투기들이 하늘을 날며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이들을 이끄는 부됸늬 원수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그 자신은 훈장을 받고 높은 계급도 수여받아 ‘잘나간다’고 하지만 벌써 적지 않은 부하들이 석연찮은 이유로 계급을 강등당하거나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다.

‘베리야, 그 개잡종 같으니라고….’

전사의 본능으로, 그는 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기병대의 목줄을 죄고자 하는 것이 누구인지.

베리야는 유능한 첩보관이었지만 유능한 첩보관은 항상 무력을 손에 쥔 장군들을 견제하는 법. 그는 서기장의 귓속에 끊임없이 모함과 우려를 속삭였다.

이미 붉은 군대의 기병대, 그중에서도 정예인 제1근위기병군은 NKVD의 공작에 의해 한번 숙청 직전까지 몰린 적이 있었다. 군기문란, 보급품 횡령 등을 이유로 고위장교부터 하급자들까지 한번 싹 뒤집어졌었다.

부됸늬, 그 자신도 NKVD 요원들에게 납치당할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노동자·농민의 붉은 군대를 사유화하려 했다.’

나중에 알아본 바, 그런 죄목이 그에게 붙어 있었다.

빠득, 부됸늬는 이를 갈았다. 기병대를 사유화했다고? NKVD는 그럼 누구 씨의 사유물이 아닌가?

전쟁이 시작된 이후 부됸늬는 다시 일선으로 도망쳐 왔다.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면 저들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도 일부 품고 있었다.

전장의 공기를 마시고 전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타고난 기병인 그의 체질에 맞았다. 최소한 크레믈린의 정치투쟁과 암투보다는. 말은 충성스럽고 배신하지 않는 생물이었다. 인간에 차마 비교하기 미안해질 정도로.

“히히이잉!”

“오라, 네 녀석도 평야가 그리웠구나! 으하하하하하”

달리는 중 로지나가 길게 하늘을 향해 앞발을 들었다. 부됸늬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초연이 섞인 전장의 공기가 쫙 펴진 가슴 속으로 들어와 폐를 진탕시켰다.

이제 NKVD와 정치국은 그를, 그리고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방식을 채택했다. 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을.

* * *

“자! 춤을 춰 보시지요!!”

“…히! 호! 히! 호!”

NKVD 주도하에 ‘선전 영상’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그는 우스꽝스러운 유목민 복장을 입고 펄쩍펄쩍 뛰는 춤을 추어야 했다. 독일 병사들이 기병을 두려워하니 그가 그렇게 하는 게 좋다 했던가?

마치 카자크의 전통춤을 추는 것처럼, 펄쩍펄쩍 뛰고 빙글빙글 돌면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몇 대의 카메라가 모조리 찍었다.

‘베리야, 개만도 못한 새끼….’

“징! 징! 징기스 칸! 달려라 기마대! 달려라 기마대!”

서기장의 다챠에서 여흥 삼아 출 때와는 전혀 달랐다. 웃음과 여흥 대신 NKVD 요원들의 눈엔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베리야는 그때의 춤을 보고 서기장께서 친히 지시한 작전이라고 했다. 부됸늬의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를 온 세계에 뿌리는 게 무슨 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리야는 아무튼 ‘명령’임을 강조했다.

‘숙청의 전조인가?’

주코프라는 젊고 유능한 신예를 견제하기 위해 부됸늬, 그를 추켜세우는가 했더니 이번엔 다시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결과적으로 군부에는 단일한 거물이 없게 되었다.

여기에 NKVD는 기병대 내부에서 부됸늬의 심복 부하들을 하나하나 쳐내고 있었다.

각종 석연찮은 누명으로, 온갖 오명을 씌워 그의 옛 부하들은 하나씩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장 청렴하고 강직했던 그의 참모장이 군수물자의 횡령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도, 누구보다도 소비에트 연방에 충성한 그의 부사령관이 스파이 혐의로 끌려갔을 때도.

부됸늬는 베리야의 음험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래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선전은 표면적으로는 독일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군을 저들이 두려워하는 몽골과 연결시켜 겁먹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거리에 겁먹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서기장의 ‘특별한 배려’가 아닐까. 부됸늬는 의심했다. 요사이 서기장은 철저히 장군들을 신뢰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한 듯했지만, 그의 칼인 베리야가 설치는 것을 보면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자신이 죄를 뒤집어쓰고 숙청당해 굴라그로 간다면… 그의 가족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와 같이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로 가겠지.

요새는 연좌제가 거의 폐지되었고, 죄수의 대우도 나아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반면 전장에서 전사하면 명예 정도는 남겨 줄 것이다. 가족들의 대우도 그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전사자는 말이 없다. 아무리 예우를 해 주어도 그걸 바탕으로 정권을 위협할 일이 없으니 사망자에 대한 대우만큼은 철저했다.

특히, 원수씩이나 되는 이가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했으니… 가족들만큼은 내버려 둘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손주들. 고 녀석들만큼은….

‘시베리아는 안돼!’

* * *

“그래서… 원수 동지가 이렇게 막 돌아다닌단 말입니까?”

“그렇네! 우리도 처음에 이 정보를 입수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꽤 많은 증언들이 있었네. 할 수 있겠나?”

앉은 소파가 꽉 차 보일 정도로 큰 덩치의 사나이는 서류뭉치들을 보며 뺨을 긁었다. 그의 왼뺨에는 흉측한 상처가 있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 지브롤터의 악령, 총통의 비밀병기. 모두 그를 수식하는 말이었다. 친위대 소령 오토 슈코르체니, 그는 소련군 원수를 암살하는 비밀작전 계획서를 보면서도 심드렁했다.

“음… 아쉽습니다만, 저도 새로 총통 각하께 명령을 받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저희 부하들 중 자원자를 차출해 보겠습니다.”

“그, 그래 주겠는가? 고맙네! 아주 고마워!”

육군의 장군은 자기가 먼저 일어나 슈코르체니의 솥뚜껑만 한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일개 소령 주제에 장군에게 이렇게 막 대할 수는 없었지만 슈코르체니, 그는 특별했다.

지브롤터에 침투해 기지를 폭파하고 영국 함대를 일망타진하는 데 최고의 기여를 했다. 총통에 대한 반란 모의가 적발되었을 때에도 신출귀몰하게 돌아다니며 반란군의 수뇌부를 수십 명씩이나 붙잡았다.

그가 세운 공적만 해도 비길 사람이 없는데, 총통의 신임까지 두터웠다. 그런 이에게 ‘일개’ 장군 따위가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총통의 비밀 명령까지 받아 가며 작전을 수행하는 이에게?

총통의 권위는 지금 한창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장군은 그런 베를린의 풍파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저자세를 취하길 선택했다.

“저희 부대원들이 요청하는 내용은 가급적 다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정상적인 놈들은 아니라서 말이지요.”

“아무렴! 내 권한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네.”

슈코르체니는 다시 뺨을 벅벅 긁으며 씨익 웃었다. 보는 사람의 간담이 서늘한 웃음이었다.

슈코르체니 본인은 좋은 뜻에서 고맙다고 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용모 때문에 순수한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지는 못했다.

“흐흐, 감사합니다.”

* * *

“작전이다! 빌어먹을 개새끼들아! 그것도 두 개나 있어!”

막사 문을 뻥 차고 들어온 슈코르체니는 부하들에게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몇은 환호하고 몇은 심드렁했다. 어느 쪽이든 정상적으로 부대장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물론 슈코르체니나 그의 부하들이나 그런 것에 아랑곳하는 자들은 없었다.

다른 특임대로 전출되던가, 아니면 작전 중에 죽던가. 프리덴탈 특공대에는 제3제국에서 제일 미친놈들만 남아 있었다.

“대장! 그래서 누구 목을 따는 거요?”

“맞아! 그거만 말해 주면 돼!”

노획한 보드카 병으로 병나발을 불던 부하 하나가 그렇게 외쳤다. 다른 부하들도 그에게 동조했다. 슈코르체니는 흐흐 웃으며 명령서를 슬슬 흔들었다.

“그래, 네놈들도 궁금하겠지. 일단 한 놈은 무려….”

“무려?”

“원수 나리다! 빨갱이 기병대장 부됸늬!”

휘이이이익! 특공대원들은 휘파람을 불고 탄성을 터트렸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지! 시시한 표적들에게 이들은 관심이 없었다.

“미친 새끼들, 너희들 뒈질 자리도 분간 못 하냐? 으하하하핫!”

“뒈져? 누가 뒈져?”

남들이 뭐라고 하건 눈이 벌게져 포커를 치던 부하가 죽는다는 소리에 휙 하고 돌아보았다. 저, 저, 말귀는 빌어먹게 안 들어 처먹는 놈 같으니라고.

프리덴탈 특공대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는 방금처럼 위험한 작전이 주는 아슬아슬한 쾌락에 미친 놈들. 제 죽을 묫자리에 기어들어 가기 전까지 신나게 총질하고 싸우다 가겠다는 정신 나간 것들이 특공대에는 수두룩했다.

“이게 그렇게 위험해? 꼴랑 요 정도로?”

“에라이, 진짜 뒈질 것 같으면 우리 대장도 안 해.”

그런 자들은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아드레날린이 끓어오르는지, 제일 위험한 작전과 사망률이 높을 곳으로 제 발로 달려 들어갔다. 지금도 특공작전을 설명하는 명령서를 보면서 이들은 얼마나 위험할지를 삼삼오오 토론했다.

“미친 새끼들….”

그리고 이렇게 상대적으로 정상으로 보이는 놈도 있었다.

“뭐? 네가 제일 미쳤지. 솔직히.”

“낄낄낄, 미친놈들끼리 싸운다 진짜.”

물론 프리덴탈 특공대에 진짜로 정상인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위험이 주는 쾌락에 미친 놈들이거나, 아니면 구제불능의 범죄자거나. 강간, 살인, 방화. 특공대원들의 이력서에 셋 중 하나가 없는 이들은 드물었다. 차라리 셋 모두가 있다면 모를까.

“아무튼 내일 출격인데, 자원할 놈들은 준비나 해 놔. 술은 그만 처먹고.”

슈코르체니는 보드카를 병나발 부는 부하의 등짝을 퍽 차 버리고 보드카 병을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디서 빼앗아 온 것인지, 병에 핏자국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그런 것 따위에 개의치는 않았다. 목에서 화한 느낌이 올라왔다.

“죽일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몸간수들 잘 하고.”

“예에~!”

* * *

부됸늬가 맡은 공세는 북부에 집중된 병력으로부터 독일군의 눈을 돌리기 위한 기만작전이었다. 뭐, 스몰렌스크의 독일 9군을 싸 먹는다는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1근위기병군은 사실 상징성이 더 큰 부대였다. 붉은 군대의 최정예로 오랜 역사를 가진 위풍당당한 기병대. 실제 전투력으로 보면 전차와 자주포로 무장한 기갑부대들이 훨씬 나았지만, 눈길을 끄는 데는 기병이 더 좋았다.

매일 전쟁 선전방송에서는 기병대가 여기서 이겼고, 저기서 적군을 패주시켰다고 떠벌였다. 진짜 소련의 주력인 기갑부대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는 숨겼다.

독일이 접하는 언론 정보들은 철저히 소련의 목적을 위해서 가공된 정보들이었다.

“스몰렌스크의 남부에서는 부됸늬 원수가 이끄는 기병군이 공세를 펼칠 것입니다. 북부의 우익이 주공임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의 언론 노출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이탈리아군 소속의 사보이아 기병연대가 독일 9군의 남쪽에 배치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오, 기병 대 기병의 대전인가?”

사실 소련 기병부대들은 말보다는 장갑차와 보병전투차에 더 의존하는 기계화부대에 더 가까웠다. 말은 그저 병력의 보조적 이동수단일 뿐이었다.

반면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기병연대는… 현대의 전장에 남은 마지막 ‘진짜 기병’이었다.

말을 타고, 사브르를 휘두르는 진짜 기병. 물론 주 무장은 총기기는 했지만, 그들은 20세기의 전장에서도 활약한 마지막 기병대라고 할 수 있었다.

역사의 물결 앞에 덧없이 스러지겠지만… 마지막 전장이 될 곳에서 화려하게 불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좋네. 종군 사진사들을 최대한 많이 배치해 보게. 이거, 영화거리 하나는 나오겠어? 으하하하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