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16화 (116/300)

# 116

116화

“…진행시키게.”

“예! 서기장 동지!”

모스크바 근교의 작은 다챠(별장)에는 소련 정계와 군부의 최고위급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내가 명령을 내리자, 수행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척, 경례를 붙이고는 각자의 위치로 헤쳐 모였다.

임석한 사람들은 제각기 숨죽여 웃거나 환호했다. 그들 역시도 오매불망 기다려 온 것이다.

“후… 솔직히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렇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끄덕끄덕. 다들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물론 나도 속으로는 죄책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기다려 보세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하고 향긋하며 짭짜름한 냄새가 가득 방 안을 메웠다. 수행원들은 문을 열고 절도있는 걸음으로 척 척 척 들어와 묵직한 쟁반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음… 오… 아… 예….”

이 늙은 몸이 하루라도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식단 조절과 체중감량, 운동과 건강관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가끔 즐거움이 필요했다.

치킨이라는 즐거움이.

갓 튀겨낸 따끈따끈한 닭다리를 집어 들고 베어 물자 기름지고 짭조름한 맛과 함께 육즙이 입 안으로 탁! 터져 들어왔다.

“으으으음…!”

정치인들도 각자 허겁지겁 치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이도 먹을 만치 먹은 사람들이 특정 부위를 놓고 신경전을 벌인다던가, 손을 육즙으로 더럽혀가며 와구와구 먹는다던가. 각종 추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치느님은 용서해주실 거야. 암.

“‘그것’의 개발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예? 어느 것 말씀… 아!”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베리야는 잠시 당황하다가 알았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는 잠시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서기장 동지,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하시려면 사람이 적은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크흠… 아무래도 기밀이니….”

닭다리 하나를 게눈감추듯 뜯어먹고는 닭다리 하나를 더 집어 칼리닌의 원망 섞인 눈초리를 받으며, 베리야는 내게 소곤거렸다.

“아니, 그 그것 말고! ‘그것’ 있잖나? 조리장?”

“앗… 아앗… 양념 소스 말씀이시라면 곧 준비될 것입니다.”

“아주 좋네. 이 튀긴 치킨도 좋지만 여기다 양념 소스를 버무린다면 맛있을 것 같지 않은가?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더 이상 진심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입 안에 가득 들어찬 치킨 덕분에 대답은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칼리닌, 자네는 이 신식 요리의 보급에 앞장서도록 하게. 이 사업은 우리가 소련과 세계의 인민들에게 소련 문화의 우수함을 알리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일세. 제아무리 반공주의자라도 한번 맛을 보면….”

“우물우물…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기장 동지.”

칼리닌을 책임자로 둔 이 사업의 이름은 Kalinin Fried Chicken. 이 브랜드 네임 하에 미국에서부터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다.

열심히 닭, 그것도 KFC의 핫 크리스피 치킨의 레시피대로 만든 치킨을 뜯던 칼리닌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랜드 샌더스 대령님께서는 아직 켄터키 시골에서 작은 가게 하나를 하고 계실 것이다. 최초의 KFC 프랜차이즈는 50년대에나 생겼고, 아직은 인지도는커녕 존재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 우리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인 1990년. 소련 최초의 맥도날드가 모스크바에 문을 열었다.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자본주의의 맛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식생활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지. 소비에트의 이 위대한 문물을 혀로 받아들이며 저들은 우리를 인정하게 될 것일세!”

사실 개소리다. 하지만 뭐 어떤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가 될 수 있는 기업 하나를 우리가 선점해서 달러를 벌어올 수 있으면 그만이다.

“아, 그리고 오늘은 누가 여흥 거리를 준비했다고 했지?”

“부됸늬 원수입니다, 서기장 동지!”

“아주 좋네! 부됸늬 원수? ‘그걸’ 해보겠나?”

풍성한 콧수염을 기름과 육즙과 튀김 부스러기로 더럽혀가며 치킨을 먹던 부됸늬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콧수염을 퍼뜩 떨었다.

“‘그것’… 말입니까? 서기장 동지? 허허허….”

“후! 하! 후! 하!”

“질풍노도와 같이 질주하는 수천 명의 기마대! 모두들 맹목적으로 따르는 지도자, 징기스칸!”

러시아의 아름다운 ‘미풍양속’ 으로는 다 같이 미친 듯이 퍼마시고 춤추고 개판으로 노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술을 퍼마시면 내일 일을 하지 못하기에 나는 일을 시켜야 하는 사람들은 퍼마시지 못하도록 절주령을 내렸다.

물론 스트레스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풀어야 하니, 개판으로 노는 것은 허용했다.

문제는 술을 마시고서야 개판을 칠 수 있지만, 맨정신으로 개판을 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뭐, 저기 저렇게 펄쩍펄쩍 뛰며 춤을 추는 부됸늬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징, 징, 징기스칸! 달려라 기병대! 달려라 기병대! 징, 징, 징기스칸!”

몽골식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털 망토를 두른 부됸늬는 빙글빙글, 펄쩍펄쩍 뛰며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선곡은 그 유명한 가수 그룹 <징기스 칸>의 노래 <징기스 칸>. 7080 디스코 음악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노래였다.

부됸늬가 직접 데리고 온 부하 장성들 역시 같이 춤을 추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추는군. 으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으허허헛, 하하하하!”

장내는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보드카 한잔을 쭉 들이키고 춤을 추던 기병 중장 하나는 아예 간주가 나올 때 히이이힝 하는 말 울음소리를 따라 했다.

“와하하하하! 아주 잘했네! 아주 잘했어!”

“브라보! 브라보!”

아무튼, 광란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내일이면 다시 가서 일을 해야겠지만….

스탈린의 원래 버릇 중 하나는 부하들에게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게 만들고 곤란한 질문을 던지거나 춤을 추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었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처럼, 가혹한 짓에도 익숙해지면 알아서 잘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마시지 않는 동안, 알아서 보드카 몇 잔씩을 빨아 재낀 이들은 하나둘씩 ‘디스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허어, 몰로토프는 제법 춤을 잘 추는데?”

개중 몰로토프는 상당히 잘 추는 편이었다. 박자에 맞추어 엉덩이를 흔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막춤을 추는데 말마따나 아내를 춤 실력으로 유혹했다는 주장이 아예 허언은 아닌 듯했다.

반면 흐루쇼프는 정말 몸치 같았다.

“이봐! 저 대머리는 무슨 춤을 저렇게 춰!”

“으헤헤헤, 서기장 동지!”

보드카를 상당히 들이켰는지, 머리끝까지 시뻘게져서 마치 삶은 문어처럼 돌변한 흐루쇼프는 음정 박자 다 틀린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막춤을 춰 댔다.

그러나 얼근히 술에 취한 사람들은 다 함께 낄낄댈 뿐이었다.

나도 한두 잔씩 홀짝댄 취기가 올라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기름진 치킨을 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하잖아? 라는 변명을 하며 들이킨 것이 제법 되었나 보다.

“…아빠, 저 이제 들어갈게요.”

“으엉? 아… 스베틀라나.”

시끌벅적하게 놀아 재끼는 가운데, 나는 갑자기 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내’ 딸. 스베틀라나는 지친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다챠에 와서 저녁을 먹을 때엔 경호의 편의를 위해서도 데려오는 편이어서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열다섯 살 먹은 어린 소녀에게는 이런 자리가 재미없었을 것이다. 높으신 늙은이들끼리 술 먹고 떠들며 노는 자리가 한창때 감수성 풍부한 소녀에게 뭐가 즐거울 것인가?

수수한 원피스를 입은 채, 양손으로 감싸 쥔 노트를 꼼지락거리며 그녀는 쭈뼛거렸다. 차라리 오빠들이라도 있었으면, 어머니라도 있었으면.

하지만 다들 떠나갔다. 어린 소녀와 무뚝뚝한 ‘강철 인간’ 아비만 남기고.

자녀는커녕 여자친구도 없었던 20대 대학생이든,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를 손에 넣은 60대의 노회한 정치가든. 이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지는 못했다.

“그… 그러거라.”

꾸벅. 고개를 꾸벅 숙인 스베틀라나는 말없이 타박타박 걸어 나갔다. 가슴팍에 자기 노트를 꼭 끌어안고서.

저 노트는 무엇이려나? 나는 궁금해졌지만 차마 불러서 그 노트 좀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쓸쓸한 어린애의 뒤통수만을 빤히 바라볼 뿐.

벽에 기대어 흥미로운듯한 눈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던 베리야는 육중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총총 걸어와 내게 속삭였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서기장 동지? 스베틀라나 양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듯합니다만….”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베리야는 신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적들이 자신에 대해 유포한 ‘소문’ 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좋아한다는 그 소문은 NKVD를 총동원해서 발본색원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딸 가진 아빠로서 그를 경계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을까?

“음… 아무래도 또래 친구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크렘린은 소녀들을 위해서 좋은 곳은 아니지요.”

“….”

“필요하다면 또래 친구가 될 만한 아이들을 섭외해보겠습니다. 한두 명 정도가 곁에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신중하고 사려 깊은 목소리로 그는 나와 스베틀라나를 걱정하듯 말했다.

베리야가 실제 역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었다. 소련 공산당 조지아 지부의 책임자였던 그는 스탈린의 늙은 어머니 케케(예카테린 겔라디제, 애칭 케케) 를 돌보는 일을 했다.

스탈린의 ‘약한 지점’ 이었던 어머니를 돌보는 일에서 열과 성을 다하여 모스크바의 눈에 든 그는 결국 대숙청을 기회로 삼아 소련 정보부의 일인자가 되었다.

“…후보가 될 만한 이가 있는가?”

“그것은 물색하여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씨익 웃더니 사려 깊은 태도에서 유쾌하고 말 잘 듣는 부하로 다시 되돌아 왔다.

“그나저나 서기장 동지. 동지께서 말씀하신 저 춤곡은 인기가 대단합니다! 부됸늬 원수의 춤도 정말 흥미롭지 않으셨습니까?”

“하하하, 그래. 웃기기는 했지.”

“예, 예. 특히 부됸늬 원수의 평소 이미지를 활용해 몽골의 칸처럼 분장하게 한 것은 굉장히 재치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혓바닥만큼은 기름을 바른 듯 싹싹 돌아갔다. 간사한 간신배와 사냥개처럼 충성하는 부하 사이에서, 베리야는 절묘한 줄타기를 했다.

“하여, 저런 것을 선전에 사용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선전? 프로파간다 말인가?”

“예. 독일 놈들이 우리 기병에 대해 지극히 두려워하는 만큼 기병대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그 후로도 베리야는 뭐라 뭐라 말을 하기는 했지만, 취기가 점점 올라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능한 만큼, 알아서 잘하겠지.

사람은 몰라도 유능함 만큼은 비할 바가 없었으니까.

“자네가 알아서 잘해보게. 나도 슬슬 들어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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