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화
적기 훈장을 수여받은 우수한 병사로 향후에도 소비에트 연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복무하리라 여겨지는 니콜라이 페트로프는 지금 일생일대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뻔질나게 의무대를 드나들었다.
“아… 그, 이빨 뽑은 자리가 욱신거립니다….”
“으윽… 배가 아픕니다….”
“파쇼 놈들의 포탄이 가까이에 떨어졌는데 그 이후로 귀가 얼얼합니다.”
의무대의 접수를 맡은 카티아 파블로브나는 그때마다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꺄르륵 웃으며 니콜라이의 증상을 받아 적었다.
“하하하하! 알겠어요. 군의관님!”
하얗고 가느다란 손끝이 투박한 만년필을 꼭 쥔 채 누르스름한 갱지 위를 슥슥 스쳐 내려갔다. 동글동글하고 정갈한 필기체를 보며, 아니, 그녀의 손을 보며 니콜라이는 침을 꿀꺽 삼키곤 했었다.
이번에도 의무대를 찾아온 니콜라이에게, 카티아는 어딜 그렇게 다쳤느냐고 물으며 명랑하게 웃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오늘도 어디가 아프세요?”
“음… 그… 저….”
파쇼 놈들의 탱크를 마주했을 때보다도 지금이 더 떨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만년필이 지뢰의 기폭장치보다도 더 무서워 보였다.
니콜라이가 땀만 삐질삐질 흘리며 뒷목을 긁자 카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열이 나세요? 아니면 뒷목이 아프신가요? 그런데… 어쩌죠? 오늘 군의관님은 잠시 다른 곳으로 출타하셨는데….”
“아뇨! 아뇨! 아픈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깜짝 놀라며 큰 목소리로 답하는 니콜라이를 보고 카티아는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그럼 뭐에요? 혹시 꾀병이에요?”
“아니, 아니, 음… 이….”
카티아의 초롱초롱한 눈이 초생달처럼 생긋 굽어졌다. 그 모습을 본 니콜라이는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명랑하게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즐거운 그 나이대의 소녀들처럼 깔깔거렸다.
‘아니, 대체 이게 왜 웃긴 것이지?’
그리고 무신경한 러시아 남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니콜라이는 전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예쁘긴 했지만.
초생달처럼 굽어진 눈, 뒤로 질끈 묶어 위아래로 흔들리는 짧은 머리칼. 갸름한 턱선과 하얀 목덜미, 그리고 입을 가린 자그마한 손까지.
적기 훈장까지 수훈한 영웅적인 병사였을지언정, 니콜라이는 단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을 뿐이다. 훅하고 풍겨 오는 달콤한 여인의 향기는 시골 청년의 뇌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저에게! 글을! 가르쳐! 주십시오!”
“어머?”
정지 상태가 되어 버린 그의 뇌와 달리 몸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준비해 온 말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꽥 소리를 친 그는 스스로 낸 목소리에 얼떨떨해진 채 입을 꼭 다물었다.
깔깔 웃던 카티아도 뜬금없는 이야기에 당황했는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음을 멈췄다.
“아… 그… 그게 저….”
“좋아요! 하하하하, 저도 그렇게 자신은 없는데… 그런 거였으면 진작 말하시죠.”
!!!
이게 이렇게 간단한 거였나? 카티아는 단박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뒤로 다 묶지 못한 귀밑머리가 나풀댔다.
“그럼 오늘 저녁에 봐요!”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화사해진 목소리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마침 뒤에서 다른 병사가 슥 하고 들어와 니콜라이는 혹여나 그녀가 마음을 바꿀세라,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넵!!! 이… 이따 뵙겠습니다!”
호다닥, 니콜라이는 의무대에서 뛰쳐나왔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화창했다. 마치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것처럼. 훈장을 받았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 가슴에서 벅차올랐다.
“이야아앗호!!!”
지나가던 사람들이 뜬금없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 그를 보고 어디가 이상해진 것 아니냐며 기묘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지만, 그런 시선에 신경 쓸 만큼의 두뇌용량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글을 배워 장교가 되고 전쟁영웅이 되는 것보다는 여자와 말 한마디, 손 한번 잡는 것이 더 좋은 피 끓는 청춘은 마냥 기분 좋을 뿐이었다.
* * *
“아, 베, 베, 게, 데….”
30와트 전구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카티아는 약속대로 니콜라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사실 어쩌다 보니 다니다 말게 된 초급학교에서 대강은 배웠지만, 아직도 글자를 읽고 쓰는 게 서투른 니콜라이는 천천히 눈으로 글자를 따라 어물거렸다.
카티아는 희고 가는 손으로 잘도 글씨를 써 내려갔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주며 그녀는 키릴 문자 33자를 끝까지 써 주었다.
“엘, 엠, 엔, 오… 페?”
“맞아요. 페. 필기체는 이렇게….”
꿀꺽,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자 머리칼이 사락 쓸려 내려오며 귀를 덮었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뒷목을 보며 니콜라이는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보고 있어요? 킥킥.”
“아, 아, 보… 보고 있어요.”
전력 문제로 다른 불이 꺼진 의무대 건물 안은 고요했다. 남녀가 단둘이 있기에는 적절치 않았지만, 카티아는 개의치 않는 듯 배시시 웃었다.
“장교가 되고 싶다고 했죠? 무슨 병과가 하고 싶어요?”
“글쎄요… 하하하….”
니콜라이도 그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장교, 장교가 되는 것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좋은 장교가 될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내가 해도 저것보다는 잘하겠다는 장교들은 꽤 많았으니까.
전투만 되면 잔뜩 겁을 집어먹는 겁쟁이들. 그러면서 부하 병사들에겐 마치 사자처럼 용맹하고 포악한 악랄한 자들.
물론 그 스스로가 똑같은 인간이 되지 않으리라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지난 부대의 정치위원, 세묜은 이야기했었다.
‘아마 이 학살을 저지른 저들도 집에 가면 니콜라이 자네처럼 감수성 많고, 남을 동정할 줄 아는 청년일지도 모르네.’
니콜라이를 차분하게 위로하며 했던 그 말을 뒤집는다면?
누구나 학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니콜라이는 살아오며 그렇게 잔인한 자들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달랐을까? 독일인들이라고 모두 괴물이었을까? 악랄한 장교와 부사관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인간과 세상에 무한한 악의를 가진 인간말종들이었을까?
니콜라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티아는 풋, 하고 웃었다.
“벌써부터 포기하는 거예요? 자, 이제 다 외울 수 있죠?”
“예? 아, 그… 그게 아니라.”
“자! 이건 뭐죠?”
카티아는 하나하나 글자를 짚어 내려갔다. 아, 베, 베, 체…
* * *
“서기장 동지, 여기 보고서가 있습니다.”
“음, 그래. 내 한번 보도록 하지.”
실제 역사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300만이 넘는 완전 손실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련의 인구가 이 시점에 2억가량이니 현대 대한민국의 4배. 같은 비율을 적용해서 75만이라고 치면…,
‘현역병에 장교까지 모조리 날아간 셈이지….’
보고서는 그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물론 현역부대들부터 순차적으로 증발한 것이 아니라, 전쟁 발발 이후 급히 모집한 예비부대들에서 발생한 손실도 있었기에 장교단의 질이 엄청나게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한 명의 사자 같은 지휘관이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적지만, 또 생각보다 많았으니까.
“소위 열 명 중 일고여덟 명은 죽고, 두세 명쯤은 살아남아 진급해 장교가 된다… 하하, 명료한 요약이로구만 그래?”
하지만 초급장교들의 손실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보고서를 찬찬히 넘겨 보다 보면 대략의 사유가 적혀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초급 장교 혹은 하급 정치지도원들은 앞장을 선다. 따라서 사상률은 신병보다 초급장교에서 더 높이 나타난다. 흐음… 이래도 소부대 지휘에 문제는 없나?”
“예, 일단 아직은 눈에 띄게 문제가 불거지는 상황은 아닙니다. 고참 부사관들이나 경험을 쌓은 병사들이 분대 단위로 적절하게 대처하는 경우가 많아서 소대장급 초급장교들의 손실이 즉각적인 붕괴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군….”
물론 문제가 그렇게 넘겨 버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장교가 너무 많이 죽는 것은 국가적으로 거대한 손실이었다. 애국심과 의협심에 불타는 젊은 대학생들, 인텔리겐치아로서 스스로의 역할에 고심하다 자원입대한 이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다.
절대적으로 학력 수준이 낮은 1940년대에, 이런 고급 인력들이 전장에서 총알받이처럼 죽어 나가면 향후 국가 경쟁력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칠 거란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지난 대전 당시 영국 놈들은 쓸데없는 귀족들이나 나가서 죽었지, 우리는 천금같이 귀중한 대학생들을 이렇게 죽게 해서야 되겠나?”
“당연히 아닙니다 서기장 동지. 다만 신규 임관하는 장교들의 자질이 달려 있습니다.”
“그도 그렇군. 흐음… 하지만 자네 말대로 고참 부사관들, 베테랑 병사들이 분대급 지휘도 잘할 수 있다면 그 이상도 할 수 있지 않겠나?”
대부분의 국가에서 장교가 대재, 대졸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긴 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체해야지. 소련군은 이제 500만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냥 단순하게 산술적으로 보병 소대 40명에 소위 한 명씩이 있다고 치면 소대장 노릇을 할 장교들만 10만 명이 넘게 필요했다.
당연히 그 위의 상급 장교들이 더 있으니 수십만의 대졸자들을 전장으로 보내야 했는데….
“우리가 산업의 각 분야에서 10만 명 이상의 핵심 기술자들을 빼내서 산업을 유지시킬 수 있겠나?”
“아… 아닙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래. 그리고 그들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는 셈이지.”
“그렇다면….”
군 인사와 인력동원을 담당하는 부서장은 내 의향을 조심스레 물었다.
뭐, 의향이라고 할 게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부사관, 병사에서 장교로 승진하는 비율을 늘려야지.
목숨의 가치가 대학생과 아닌 사람이 다르지는 않겠지만, 국가와 인민을 위해 누가 더 많이 일할 수 있냐를 생각해야 했다.
어쨌든 나는 지금 전시 지도자이니.
“현지 임관 제도를 확대하게. 기본적인 능력만큼 중요한 것은 경험 아니겠나? 다만 부대의 인력 배치에서 권장 학력 수준에 못 미치는 장교들과 그 이상인 장교들을 적절히 섞어서 배치하면 어느 정도 부작용은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기면 너희들이 알아서 막으라는 소리다.
“옙!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장교가 될 기회가 확대되었다고 공표하게. 짧은 유예기간을 두고, 장교 선발시험을 위한 학습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옳으신 말씀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어떻게 하다 보면 잘되지 않을까?
역사에서 검증된 것은 거침없이 질러 볼 수 있었지만, 해 본 적이 없는 내용은 좀 망설여졌다. 하지만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또 모른다. 능력을 증명해 놀랍도록 출세할 이가 있을지.
“그럼 그대로 시행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