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111화
“결국 레닌그라드라고?”
“예, 그렇습니다.”
모든 정보는 독일군의 공세 방향을 한 곳으로 가리켰다.
혁명의 수도, 북부 러시아의 심장, 그리고 명실상부한 소련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
국방군 내부에 침투한 스파이망도, 이번에 탈영해 독일군의 작전계획을 넘긴 이탈리아인 탈영병도, 파르티잔들이 파악한 물자 이동도 이렇게 보면 다 들어맞았다.
물론 지금까지 중부냐 남부냐를 두고 우리가 골머리를 앓았던 것에 비하면 싱거운 결론이었지만.
“남부집단군 소속이었던 제1기갑집단은 1SS 기갑군으로 개편되어 레닌그라드 방향으로 전진 배치되었습니다. 5월, 땅이 굳는 5월 중순을 기하여 공세를 시작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사령관은 그대로 만슈타인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쉽게도 그는 독일 내부의 정치파동에서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전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자리를 보전하는 데 성공한 듯합니다.”
어쩐지 좀 아쉬웠다. 실제 역사에서도 만슈타인은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나치와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했다. 사실 그 정도에서 끝난 게 아니라 아예 설설 기었다.
그러니 첩보공작 한 방으로 거꾸러트리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상대였겠지만…. 아무튼 수많은 독일군의 명장들 중에서도 능력만큼은 철저히 검증된 이가 사령관이라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왜 레닌그라드지?”
레닌그라드는 소련의 공업력이 가장 집중된 지역 중 하나였다.
저들이 노릴 만한 목표물이라는 것에도 다들 공감했다. 독일 세 집단군 중 하나인 북부집단군은 계속 레닌그라드를 향해 발버둥 쳤다.
“저희 측의 공업적 역량을 박살 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서기장 동지? 여기에 혁명의 수도, 구 수도를 함락시켰다는 상징성 역시….”
“그래. 그렇게 했다 치자. 그럼 그 다음은 뭐지?”
“….”
레닌그라드가 중요하긴 한데, 점령하면 뭐 할 건가?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레닌그라드를 노리는 대신 다른 노릴 중요한 곳들 역시 많았다.
예컨대 모스크바. 모스크바는 수도이기도 하지만 유럽 러시아의 철도망이 지나가는 요지 중의 요지였다.
또한, 배후에 고르키, 야로슬라블, 이바노보 같은 대도시들이 있었다. 모스크바를 중부집단군이 점령하면 각지에 고립된 소련군을 섬멸하거나 수도권 도시들로 밀고 들어가는 선택지들이 존재했다.
남부의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 이미 너무 밀려나고 계속된 전투 끝에 막대한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독일 남부집단군 앞에는 수많은 먹음직스러운 목표물들이 있었다.
작년 점령하려 의도했던 키예프부터 시작하자. 키예프를 점령하면 하르코프. 하르코프 다음에는 돈강의 공업지대인 스탈리노. 그다음에는 볼가 강가를 지배할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 최종적으로는 세계 2대 석유 산지인 바쿠라는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
“제 놈들이 동맹국인 핀란드라도 구원하러 갈 것인가? 하!”
실제 역사와는 달리 독일 수상함대가 너무 설치고 다닌 바람에 북극해에 인접한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렌드리스는 아예 없었다.
그래서 그냥 쿨하게 핀란드군과의 교전을 포기하고, 겨울전쟁에서 뺏어 먹었던 땅으로 핀란드군이 진군해 오는 것은 내버려 두었다.
반대급부로, 핀란드군은 그 이상 내려오고 있지는 않았다. 레닌그라드 북쪽에서 단단하게 요새선을 구축한 소련군과 가끔 서로 총알을 주고받는 정도.
“일단 레닌그라드의 중요 시설들을 소개하도록 하지. 이것이 저들의 노림수일지도 모르겠지만….”
“예! 서기장 동지.”
“가용한 철도차량은 더 없겠는가? 이거 너무 일찍 병력을 배치했군.”
“조사하여 보고하겠습니다!”
이미 백만 단위의 병력과 장비들이 중부와 남부에 배치되었다. 이 넓은 땅을 걸어서 가로질러 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 열차에 실어 내려다 놓았고, 말 그대로 수만 대의 열차가 이들을 데려다 놓느라 각지에 묶여 있었다.
다시 이 병력들을 실어서 북부로 보내야 하지만 그 작업은 끔찍하게도 많은 명령서들과 시간표와 문서작업을 요하는 일이었다.
으…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명령만 내려놓고 일을 하급자들에게 짬처리 시키기에는… 너무 의심병이 심했다. 내 눈으로 뭐가 돌아가는 것을 보아야 안심이 되는 법.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시대는 여흥거리랄 것이 너무도 빈약했다. 역시 그러니까 출산율이 높았지(???). 스마트폰과 유튜브와 웹소설의 시대에 살던 나로서는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걱정과 불안에 떨면서 재미없는 체스 같은 것이나 두느니 차라리 일을 하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기며 보고서를 넘겼다. 추산되는 병력 배치들이 쭉 적혀 있었다.
“저 좁은 북부에 100만 명이라…. 히틀러 놈이 작정을 했군?”
“그… 그렇습니다. 신규 편성된 사단들이나, 무장친위대의 정예 부대들을 북부로 옮겨 둔 듯합니다. 첩보에 따르면….”
바르바로사 작전 시작 당시의 북부집단군이 3개 야전군 56만 명에 기갑사단은 3개. 이것이 양적으로는 두 배 가까이 팽창해 있었다. 반드시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지… 아니면 그냥 미쳐 날뛰는 것인지.
“우리도 북부전구에 대대적으로 증원을 해야겠군. 예정대로 두 개 전선군을 증원하도록 하지. 코네프 원수!”
“예! 서기장 동지!”
“자네가 입안했던 계획을 설명해 보게.”
“알겠습니다. 자 여기를 보면….”
첩보망이 알려 준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하고 북부집단군에 대대적인 증원을 하여 밀고 올라갈 계획이다. 정예 부대를 북부집단군에 집중시킨 만큼, 상대적으로 중부와 남부에는 공백이 생겼다.
이 공백들을 새로 배치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출신의 부대로 메웠고, 이들의 전투력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렇게 높지는 않다.
아마 밀덕이라면 여기서 뭔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파쇼들의 북부집단군은 프스코프-레닌그라드 축선을 주 공세방향으로 선정하고 진군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주공 축선의 우익은 길게 신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관문’이라지만 프스코프에서 레닌그라드까지는 대략 300km 거리이다. 이 거리를 공세를 위해 진군하다 보면 당연히 옆구리가 길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 한계를 저들도 알고 있었기에, 100만 가까이 병력을 증강해 측면을 사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전장에 병력을 충분히 때려 박을 수는 없는 법. 독일은 중부집단군에서 2개 야전군을 차출하고 그 자리에 프랑스군과 이탈리아군을 배치하는 선택을 했다. 코네프는 지도에 하늘색과 노란색으로 두 국가의 군대를 표시했다.
“현재까지 교전으로 파악된바, 이탈리아군은 지극히 약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방어하는 구역으로 공세를 취해 스몰렌스크를 지키는 독일군의 배후로 돌아가 포위 섬멸하는 것이 저희가 입안한 작전입니다.”
바로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를 이끌어낸 천왕성 작전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바쿠를 점령하기 위해 무리한 진격을 했던 독일 A집단군은 현재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뻗어 오는 북부집단군과 꼭 닮아 있었다.
이들이 카프카스에 갇혀 말라 죽지 않도록 독일 6군을 위시한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라는 관문을 붙들고 소련군과 혈전을 벌였다.
물론 6군의 분투는 약체인 루마니아군이 돌파당하고, 야전군 전체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당하며 끝장이 났다. 지금 우리가 노리는 것도 같았다. 허접한 이탈리아군을 돌파하여 스몰렌스크를 저들의 ‘스탈린그라드’로 만들어 버리는 것.
“중부 방면에서 공세를 취하는 이점은 하나 더 있습니다. 지형상의 효과로, 서부전선군이 진군한다면 이렇게!”
탁! 지휘봉이 두 지점을 가리켰다.
코네프가 가리킨 곳은 리가와 쾨니히스베르크였다.
이 두 곳은 일종의 병목이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 때, 쾨니히스베르크를 지나면 북으로 툭 튀어나온 쿠를란트 지역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리가를 지나면 다시 북으로 툭 튀어나온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지역이 있었다.
우리가 노리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스몰렌스크에서 독일 9군을 포위섬멸하고, 그렇게 생긴 빈 틈으로 찌르고 들어가 비대해진 북부집단군을 발트에 가둬 버리는 것.
독일군은 진격해 들어올 때는 넓어진 관문 덕에 수월하게 진격했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게 될 것이다.
“이 두 병목에서 독일군을 끊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레닌그라드는 모루가 되고, 서부전선군이 망치가 되어 저들을 사이에 두고 분쇄할 것입니다!”
다들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역시, 계획만 들어 보면 참 좋은데 말이지….
이 계획의 모체가 된 것은 말한 것처럼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끝낸 천왕성 작전과, 중부집단군의 척추를 꺾어 버린 바그라티온 작전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전세를 뒤집고 바그라티온으로 쐐기를 박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나?
소련이 강해졌다 하지만 독일 역시 아직 강하다. 실제 역사에서 독일은 44년까지 군수 생산이 계속 증가했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맹폭을 받으면서도 생산은 오히려 증가한 것이다!
미국이 대서양을 건너 전략폭격을 할 방법을 찾으면 모를까… B-29 정도의 거대 폭격기가 나와야 본토에서 독일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대서양의 한가운데 있는 아조레스 섬조차 뚫지 못하고 빌빌거리는 미국에게 요구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석유와 크롬의 공급을 끊어 버린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아직 비축분을 소모 중이기에 품질을 유지할 수는 있는 것 같았지만 곧, 충분히 곧 한계에 다다르겠지.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베를린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겠습니다!”
“이번 여름이야말로 대전의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전쟁이 곧 끝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 독일군은 처음의 맹렬한 기세를 잃어버리고 주저앉아 버렸다. 겨울에 한 방 쎄게 반격작전을 먹인 이후, 장군들과 정치가들 모두 독일을 만만한 상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독일이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공군마저도 미그-몰니야 전투기의 배치를 통해 교환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대지공격기, 즉 본격적인 공대공 전투기가 아닌 Ju87 슈투카만 떠도 벌벌 떨어야 했던 41년의 소련 공군은 더 이상 없었다. 몰니야, 독일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하면 불곰은 루프트바페의 1선 전투기인 Bf109와도 비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아직은 조종사들의 숙련도 문제로 독일이 우세했지만 곧, 진짜로 얼마 안 가서 우리가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군 총사령관 노비코프는 장담했다.
“몰니야는 그야말로 혁명입니다! 혁명! 벌써 에이스들이 십여 명이나 탄생했습니다.”
“잘됐군. 우리는 전투기를 더 생산해서 가져다주는데 집중하겠네. 엔진의 생산 수량이 아직은 한계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신형 기관총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미국에게 열심히 졸라 미제 엔진 생산 설비와 기술자들을 데려다 우랄에 박아 놓고 열심히 생산하고 있었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 불곰 맛을 본 공군부대들은 모두 더 많은 불곰을 외쳤다.
“더 많은 불곰! 더 많은 불곰을 주십시오! 그 무지막지한 놈들만 있으면 파쇼 놈들을 모조리 쳐부숴 보이겠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서 3교대로 기술자들을 열심히 갈아넣고 있었지만 수만 대를 하루아침에 생산할 수는 없는 법.
신형 전투기가 있다 해도 빼놓을 수 없는 슈투르모빅 같은 전투기 생산까지 더해 현재 항공기 생산은 140% 풀가동 상태였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아직 눈치를 못 챈 듯했지만 공군에는 몇 가지 새로운 장난감들이 더 주어졌었다.
“예,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칼라시니코프 동지의 새 기관총이 도입된 이후 공중전에서 기관총이 고장 나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감소했다고 합니다. 조종사들에게는 호평 일색입니다.”
“들었나? 기관총 생산에도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게.”
“예! 서기장 동지!”
젊은 칼라시니코프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돌격소총’ AK-41을 발명한 이후 그는 몇 가지 자동화기들을 개발해 냈다. 항공기용 중기관총, 분대지원화기로 쓰일 경기관총, 고속유탄발사기까지.
그 총을 써 본 병사들은 굉장한 호평을 했다. 칼라시니코프가 만든 화기들은 모두 신뢰성이 높았고, 전장의 극한 환경에서도 잘 작동했다. 구조도 단순하고 사용법이 간단해 빨리 훈련시켜 빨리 전장에 투입하기 용이하단 장점도 있었다.
물론 무엇보다도 생산성이 높았다. 복잡한 금속가공 공정들을 모조리 생략하고 부품 숫자도 최소화해 생산성 면에서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개념을 주기는 했지만… 역시, 칼라시니코프는 천재가 아닐까?
아직도 장군들은 작전에 대해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독일군들을 어떻게 짓밟아 버릴지 떠들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새로운 장난감을 잔뜩 선물 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인자한 아빠 미소가 내 얼굴에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자… 한번 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