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화
해빙이 왔다. 봄이 왔다.
러시아의 봄이란 우리가 생각하던 생동하는 계절이 아니라, 온 땅이 질척거리는 진흙에 뒤덮이는 끔찍한 계절이지만 아무튼 봄이 왔다.
땅이 질척거리고 아직은 차가운 봄비가 주룩주룩 내려 인간의 활동에 적합하다고 하기엔 빈말로도 어려웠다. 그러나 지난 41년의 겨울 동안 혹독하게 몰아친 눈보라보다는 항공기를 띄우기에 좋은 날씨였다.
독일군은 마침내 돌아온 우위를 활용하기 위해 Bf109 전투기와 Ju87 슈투카를 하늘에 가득 띄웠다. 목표는 소련군 항공기들.
작년 한 해 동안 수십, 수백 명의 에이스들이 탄생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열등한 성능의 기체를 가지고도 필사적으로 공중전에 임한 소련 파일럿들을 일방적으로 도살한 결과였다.
루프트바페의 파일럿들은 외쳤다.
“내일은 우리도 에이스다!”
“하하하하하! 이제 우리 비행대도 에이스를 배출해 보는 겁니까?”
소련군이 41년에 투입했던 항공기들은 ‘소련스러운’ 물건들이었다. 생산성 면에서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으나, 고급 기술은 배제되었고 신뢰도는 엉망이었으며 성능 역시 좋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Yak-1, I-16, MiG-3, LaGG-3 같은 소련 공군의 주력 전투기들은 애초에 전금속제도 아니었다. 알루미늄처럼 전기를 잡아먹는 물건을 생산해 전투기를 만들기에는 소련의 발전 용량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넘쳐나는 목재로 금속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상층부는 오판을 내렸다. 그래서 소련 파일럿들은 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수천 대의 항공기가 전쟁 발발 이후 6개월간 파괴되었으며 귀중한 인재인 파일럿들 역시 수천 명이 죽어 나갔다.
루프트바페의 파일럿들은 스페인 내전부터 시작해 영국군 파일럿들과 영불해협, 북아프리카 등에서 혈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이들. 경험도 시간도 부족했던 소련 공군은 이들에게 경험치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저들은 달라져 있었다.
* * *
“어, 어, 빌리!!!”
“기체가 실속 중입니다! 으아아아악!”
소련의 신형 대구경 대공포가 배치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음알음 조종사들에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겨울의 눈보라로 인해 공군 작전이 극히 제한된바 루프트바페의 조종사들은 그런 소문에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운터멘셴 슬라브들이 무기를 만들면 얼마나 만들겠어? 이들은 안이하게 그렇게 판단 내렸다.
바닥에서 박박 기는 땅개들은 빠져서 그런 거고, 소련 공군이며 탱크며 다 우리가 박살 내고 있는 것 아닌가? 아마 조종사들의 인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러했을 것이다.
전장에서의 방심은 항상 피로 대가를 치르는 법이지만, 독일군은 그들 스스로가 소련의 방심으로 초기의 성공을 거둔 것을 잊고 있었다.
“직격당한 것도 아닌데 왜…!”
“가까이 오면 우릴 감지해서 터지는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작전은 실패다. 기지로 귀환한다!”
루프트바페의 비행기들을 가장 먼저 반겨 준 것은 조밀하게 구성된 대공포 화망이었다. 수백 정의 대공기관총의 십자포화를 두들겨 맞은 Bf109 한 기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기관총 포화를 피해 현란한 공중 기동을 하며 기총소사로 반격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대구경 대공포가 펑펑 발사되며 독일군 비행대를 견제했다. 대구경 대공포는 구경이 크기에 한 발만 맞아도 비행기가 박살 나지만, 맞지 않으면 되었다.
많은 파일럿들은 ‘맞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일관해 왔다. 수백, 수천 발을 쏘아야 한 발 맞는 대공포에 설마 오늘, 내가 맞아서 죽을까?
하지만 소련군은 대공포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고속으로 발사하면서도 비행기에 근접해 포탄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기존의 시한신관으로는 저렇게 맞히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회피기동을 하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터지는 거야!”
예컨대, 신관을 특정 시간에 맞추어 둔다면 포탄은 발사 이후 특정 시간에 공중폭발해 파편을 뿌렸다. 하지만 대공포 사수들이 조준과 시한 설정을 걸어 둔다 한들 비행기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대공포의 특성을 잘 아는 파일럿들은 현란한 곡예비행을 하며 대공포를 피하고자 했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화망에 두 번째 전투기가 터져 나갔다. 100mm급은 되나 본데? 저런 대형 대공포탄은 근거리에서만 터져도 비행기를 박살 내버릴 수 있었다. 제기랄, 오늘은 운수가 더럽군.
“저… 저건 뭐야?”
“모르겠습니다. 소련 놈들의 신형 전투기 같은데…,”
전투기 비행대장은 어딘가 억울해졌다. 뜬금없이 대공포화를 두들겨 맞고 동료들을 잃은 것도 분한데 한 기도 소련기를 격추시키지 못하면 그들에게 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이후 있을 문책에서 전과가 없다면 더욱 심한 질책을 받을 것도 같았다.
“슈투카, 기지로 귀환하게. 우린 저놈들이라도 잡고 가야겠어!”
“…알겠다, 오버.”
비행대장은 조종간을 꽉 부여잡았다. 무선을 통해 비행대장의 명령이 전투기들에게 전파되었다.
“다들 기수 돌려! 저놈들을 빌리와 펠릭스의 영전에 바친다. 내일은!”
“우리도 에이스!”
구호와 함께 Bf109 비행대는 고도를 쭉 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소련 공군의 허접한 기체들로는 고고도에서 제 성능을 낼 수 없었고, 고고도에서 내리찍는 독일 공군의 먹잇감이 되어야 했다.
붐 앤 줌 전술의 요체는 그랬다. 우월한 기체 성능과 엔진 성능을 바탕으로 고도를 올리고 비실비실하는 적기를 상대로 급강하해 일격 이탈한다. 고도를 통해 얻은 위치에너지는 운동에너지로 전환되고, 기체가 제 고도를 계속 유지할 때보다 훨씬 높은 속도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속도를 바탕으로 기수를 꺾어 다시 상승해 붐 하고 올라갔다가 줌 하고 내려와 적기를 사냥하는 것이 루프트바페의 기본 공중전술이었다.
“어? 어?”
“대대장님, 쟤들 따라오는데요?”
그러나 충격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둔중해 보이게 생긴 소련군 항공기는 고도를 올리는 Bf109를 너무도 여유롭게 따라왔다. 그동안의 목제 비행기들은 이쯤 왔으면 엔진 추력이 부족해 실속해야 할 상황인데…
“한스, 루돌프, 날 엄호해라. 한번…!”
이 이상 가면 Bf109로서도 제 성능을 뽑아낼 수 없다. 본능적으로 판단을 내린 비행대장은 강하를 시작했다.
강하가 시작되면 수직방향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공중전이 벌어진다. 소련기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기수를 꺾고 강하하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체급이 훨씬 큰 것 같았다. 무슨 불곰인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비행대장은 손에 땀을 쥐고서도 피식 웃었다. 불곰, 불곰, 좋은 이름이군. 불곰 전투기는 언뜻 봐도 날렵한 Bf109보다 두 배는 덩치가 좋아 보였다.
대체 무슨 엔진을 달고 있기에 비슷하게 따라올 수 있는 거지?
“에잇, 제기랄….”
분명 맞춘 것 같았는데 그 정도는 어림도 없다는 듯, 불곰 전투기가 응사했다. 무려 8정이나 되는 기관총이 총탄을 쏟아냈다. 겨우 벌떼가 쏘는 것으로는 아랑곳하지 않는 곰 같았다. 그 곰은 이제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을 휘두르며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둔한 이미지 때문에 많이들 간과하는 사실이었지만, 곰은 생각보다 민첩한 동물이다.
아마 러시아의 타이가 숲에서 배고픈 불곰에게 쫓겨 본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마 권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불곰이라는 그의 생각에 걸맞게, 소련군 전투기가 맹렬한 속도로 급강하를 시작했다. 체급이 두 배라면 엔진 출력도 마찬가지로 두 배는 되어야 같은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급이 큰 것이 유리한 이유는 지금 같은 상황에 있었다.
수평 방향의 선회전이 아니라 수직 방향에서는 덩치가 크고 공기저항을 적게 받는 것이 유리했다. 그래야 강하 과정에서 더 빠른 속도를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을 다시 상승하면서 활용하기 쉬웠다.
“빌어먹을 불곰 새끼! 이거나 먹어라!”
소련군 비행대는 먹잇감을 쫓는 곰처럼 펄쩍펄쩍 뛰며 Bf109 편대와 공중전을 벌였다. 저 물건은 성능 측면에서 결코 독일군 항공기들에 비해 열등하지 않았다.
비행대장은 그동안의 오만을 뼛속 깊이 반성하고 싶었다. 반성해서 될 문제라면.
물론 없던 실력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은 아마 저런 신형기를 배치하면서 가급적 뛰어난 파일럿들 위주로 부대를 편성했을 것이다. 저 친구도 소련군에서는 꽤나 날리는 파일럿일테고- 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숙련도의 측면에서는 독일의 압승이었다. 비행대장은 기관총으로 불곰 전투기의 중앙선을 쓱 그어 버렸다.
그 전투기는 바로 연기를 뿜으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파일럿은 기관총에 꼬치구이처럼 꿰여 죽었을 것이다.
“후우, 저런 놈들은 반드시 죽여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가 뒈지겠지.
저들이 대등, 혹은 그 이상의 전투기를 확보한 이상 미리미리 싹은 밟아 두어야 했다. 안 그러면 사냥당하는 것은 우리가 될 테니.
그는 저세상으로 간 소련군 파일럿에게 마음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빌어먹을 친구, 나도 아마 금방 따라갈 테니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쇼. 당신네들도 우리 조종사….
“총 4기 손실입니다. 파일럿 손실은….”
네 명 데려갔군.
대체 저런 물건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반드시 그는 알아낼 것이다. 저런 게 -대공포든 전투기든- 있다는 것도 알려 주지 않고 자폭처럼 임무를 던져 준 개새끼가 누구인지도. 피 튀기며 싸우는 게 누군데 후방에서 편히 앉아 있으면서 그까짓 것도 못 한단 말이야?
그도 사람이기에 눈이 있고 귀가 있었다. 본국에서 벌어진 쿠데타 파동은 도무지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아프베어가 총통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고 제국보안본부장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소식은 아무리 쉬쉬하려 해도 병영에 퍼져 나갔다.
그러니 소련군 신형기에 대한 정보도 없지! 개만도 못한 것들… 빠득, 이가 갈렸다.
* * *
소련군 신형 항공기에 대한 보고는 산발적으로 전 전선에서 올라왔다.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던 구 아프베어의 정보부 요원들은 한 번 더 집중적인 문초를 당해야 했다. 수장이 죽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던 제국보안본부는 그나마 덜 당했다는 것이 위안거리라 해야 할까.
정보부는 누군가가 일컬은 대로 <불곰>이라는 식별 명칭을 전투기에 붙였다. 이내 소련 당국에서는 MiG-7, 별명은 ‘몰니야’(번개)라고 한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불곰이 실로 적절한 표현이었기에 빠르게 자리 잡았다.
불곰 전투기가 가져다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더 이상 루프트바페는 동부전선의 넓은 하늘을 지배할 수 없었다. 추락한 기체를 어찌어찌 노획하여 분석한 결과, 기술자들은 그런 답만을 내놓았다. 우리 것에 비해서 결코 더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 있었다. 이 비행기는 소련이 혼자서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었다.
“미제 엔진입니다. 소련 놈들은 이런 물건을 만들지도 못하거니와….”
“미제 맞구만.”
엔진에 선명하게 새겨진 영어 단어들은 너무나 명백한 증거였다.
라이센스 생산인지, 엔진을 들여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보부가 아직도 반쯤은 불구 상태였기에. 소련이 이만큼 고등 기술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미국 역시 언제든 이것보다 더 좋은 물건을 배치할 수 있다는 경고로 보아야 할까. 두 국가의 협력은 상승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신병기가 몇 대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아마 각지의 공장에서 오늘도 새로이 생산되고 있을 테니 숫자는 계속 달라지겠지만… 500대? 1천 대?
그만큼 또 중요한 것은 소련의 생산 역량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었다. 불곰 전투기와 교전한 독일 전투기들은 대부분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러나 교전비는 기존의 공중전에 비해 치솟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소련의 우세가 예상될 정도로.
더 좋은 기체에 탄 파일럿들은 더 오래 살아남고 에이스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훨씬 인원이 많은바, 살아남아 에이스가 되는 이도 더 많을 것이 뻔했다.
참모들은 말을 아꼈다. 지휘관들 역시 그들의 침묵을 이해했다.
작금의 나치 독일에서 패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