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화
아직도 질척질척한 땅이 다 마르지 않았지만, 소련군은 산발적인 공격으로 독일군을 괴롭혔다.
“우라! 우라! 붉은 군대 우라!”
“파쇼들을 쳐부숴라!”
소련군 기병대는 독일군의 전투지경선이 형성된 지역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명령을 내려야 할 상급 사령부는 거의 마비상태였기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텅, 텅, 텅. 참호에 숨어 기관총을 갈겨대는 독일군의 머리 위로 유탄이 날아들었다. 저만치에서 말에서 내려 진군해 온 소련군들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방비된 후방 방어진지를 손쉽게 제압했다.
“기관총이… 제기랄!”
“또 재밍이야?”
규정상 분대 하나마다 MG34 기관총이 1정씩 지급되어야 했으나 지금 와서 규정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규정대로 하자면 사단을 몇 개쯤은 해체시켜 그 인력을 나머지에 나누어 배치해야 했다. 규정대로 하자면 어디 한 군데가 잘린 사람이 현역병으로 전선에 와 있을 일은 없어야 했다. 어디까지나 규정대로라면.
아무튼 방어의 주축인 기관총이 고장 난 독일군 분대에게 사소한 규정 정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군 병사들은 신속하게 참호진지를 제압하고 후방으로 파고들었다.
“2연대는 돌파에 성공했다! 1대대를 선두로 하여 후방으로 진출 중!”
[알았다. 1연대 역시 방금 전 초기 작전목표를 달성했다고 보고했다. 피해 상황은?]
“피해는… 크지 않다! 적의 반격은 미미하다.”
수뇌부가 혼란에 빠져 있어 독일군은 효과적으로 반격을 조율하지 못했지만, 일선 소련군 장교들이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적의 포병 사격이 산발적으로 날아오는 수준이라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할 뿐.
상급 사령부에서 포병대를 통합하여 지휘하는 방식은 사령부의 역량이 뛰어날 때는 효과적으로 적을 분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사령부가 먹통이 되었을 때는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전술제대 지휘관, 즉 일선의 사단장들은 가장 강력한 화력인 포병연대를 빼앗겨 국지적으로 적의 예봉을 꺾고 반격을 도모하는 전술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왜 여기까지 소련군이 밀고 온 거야! 경비대! 경비대!”
협조가 되지 않기로는 육군의 제 부대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독자적인 명령계통을 가지고 육군의 작전에 ‘협조’하는 공군은 소련군이 후방으로 진출한 것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있었다.
괴링이 끝끝내 우긴 끝에 창설된 공군의 육상 사단들, 즉 ‘공군 야전사단’들은 소련군과의 교전 경험이 적어 기습 앞에 우왕좌왕하는 추태를 보일 뿐이었다.
방어선을 우회하고, 근접 항공지원을 위해 설치된 야전 비행장을 습격한 소련 기병군단은 땅에서 미적거리던 독일 항공기들을 노렸다.
“활주로를 파괴하라! 이륙하려는 비행기를 노려!”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비행기를 향해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등에 급탄장치를 짊어진 소련군 병사는 반동도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비행기를 향해 기관총을 긁어 댔다.
막 습격의 소식을 전해듣고 비행기로 달려가 활주로를 달리던 슈투카 한 대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멈춰섰다.
조종사는 허둥지둥 콕핏 바깥으로 도망쳐 나왔지만, 그 뒤를 달리던 다른 비행기는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멈춰 선 슈투카를 정통으로 들이박았다.
“이얏호! 하하하하하하!”
쾅! 폭음과 함께 두 비행기가 폭발했다.
한정된 활주로에서 날아오르기 위해 줄줄이 따라 활주하던 비행기들은 방향을 꺾고 옆의 풀밭에 처박히던가, 아니면 급히 엔진을 끄고 정지했다.
어느 쪽이든, 소련군은 처박힌 비행기들이라고 가만히 두지 않았다. 기관총으로 동체가 찢겨 나간 비행기들은 날아올라 반격하지도 못하고 하나하나 터져 나갔다. 날지 못하는 비행기는 그저 거대한 표적일 뿐.
“활주로도 파괴해! 여기서 날아오르는 비행기들이 우리 전우들을 죽이는 것이다!”
“예!”
포병이 없어 활주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때려 부수지는 못하겠지만, 수류탄 몇 박스라면 군데군데 구멍을 뚫어 기지를 엉망으로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활주로에서 폭발한 항공기들 역시 톡톡한 기여를 했다. 휘발성 높은 항공연료는 뜨겁게 달궈진 납탄이 닿자마자 불타올랐고, 폭발하며 근처에 열풍과 파편을 휘날렸다.
“장교로 보이는 놈들은 무조건 사살해라! 포로로 잡을 생각 마라! 우리 조종사들의 복수다!”
어차피 다시 퇴각할 이들은 포로에 애써 욕심을 내지 않았다.
사실 전장의 불문율을 먼저 어긴 것은 독일군이었다. 루프트바페는 소련 공군의 성장을 막기 위해 격추된 파일럿을 가급적 확인사살할 것을 명령했다.
수많은 소련군 조종사들이 땅에서 기총에 맞고 전사했으며, 그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이를 갈았다. 기병대는 주저 없이 두 손을 들고 비행기에서 걸어 나오는 파일럿의 가슴팍을 쏴 버렸다.
“으아아아악!”
“망설이지 마! 저놈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잊은 거야?”
무방비 상태의 적을 쏜다는데 죄책감을 느꼈는지 손을 덜덜 써는 어린 병사에게 분대장이 쏘아붙였다.
어머니 조국을 짓밟은 침략자, 우리 아내와 누이들을 겁간하는 파시스트 돼지 새끼들, 전쟁범죄를 밥 먹듯 저지르는 범죄자 집단!
총사령부는 독일군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를 대놓고 조장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놓고 그렇지 않다는 정도였다. 포스터와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병사들은 독일인에 대한 적개심을 무럭무럭 키울 수 있었다.
“다 정리했으면 퇴각한다! 퇴각이다!”
총소리가 잦아들고, 기지에는 연기를 뿜어내거나 불타는 항공기들만 널려 있는 것을 본 연대장은 군도를 뽑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우리가 이겼다! 붉은 군대 만세!”
“붉은 기병대 만세!”
기병대 사령관, 부됸늬 원수는 명령했다.
독일인들을 상대할 때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그들은 우군의 뒤통수도 후려갈길 수 있는 승냥이 같은 놈들이라고.
명령대로 기병대는 굳이 습격작전에서 포로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뻔질나게 날아와 폭탄과 기총을 퍼부은 웬수 같은 작자들에게 자비로울 정도로 소련군은 무른 조직이 아니었다.
애초에 별다른 무장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소련군이 눈에 보이자마자 항복한 정비병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독일인들의 군대를 지탱하는 요소를 파괴하는 것은 그들의 군대를 직접 파괴하는 것만큼 중요하네.’
정비, 보급, 수송. 보통 부차적이라 여기는 이런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라고 서기장은 명령했다.
비행기 한 대를 파괴하면 다시 찍어낼 수 있지만, 숙련된 인력을 없애 버리면 군대는 붕괴한다. 숙련병을 모조리 상실할 뻔했던 바르바로사 작전을 겪은 소련군은 받은 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등 뒤에 폐허만을 남기고 기병대는 다시 바람과 같이 퇴각했다.
“증원군이 생각보다 느리군?”
“여기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동시에 습격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이 기지뿐만이 아니었다. 소련군 기병대는 대략 여덟 곳의 야전 비행장과 세 곳의 보급창, 그리고 두 곳의 철도교차점을 습격했다.
원래대로라면 즉각 반격했을 독일군의 기동전력은 각지에서 들려오는 증원 요청에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 전차부대의 기동을 불허하는 진흙탕까지.
철벅, 철벅, 철벅. 연대장이 탄 밤색 암말은 씩씩하게도 흙바닥을 박차고 명령을 따라 앞으로 달렸다. 기병연대장은 말의 갈기를 대견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아무튼 맘에 들어. 항상 이런 때만 있으면 좋겠는데…”
* * *
“노비코프, 우리 소련의 공군력과 파시스트들의 공군력을 비교하면 대략 어느 정도가 되겠나?”
“예? 아…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기장 동지.”
군대의 주요 구성 요소에 있어, 여전히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우월한 요소는 많았다. 물론 소련군은 규모 면에서는 독일군을 앞지른 지 오래고, 질적으로도 전차전력이나 포병전력 같은 측면은 이미 저들을 추월했다.
하지만 공군력만큼은 아직은 확실한 열세였다.
라스푸티차, 그리고 독일군의 지휘체계가 엉망이 되었을 시점을 노려 야전 비행장들을 망가트리며 어느 정도 당장의 열세를 만회하기는 했다.
수백 대의 손실을 입혔으니, 이 정도면 엄청난 전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격차는 아직 한참 벌어져 있었다.
“못해도… 저희가 여러 배의 열세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신형 전폭기를 배치해도 그런가?”
“아, 그… 그렇습니다. 물론 성능 측면에서 현재 파시스트 군대가 가진 그 어떤 기체에도 밀릴 것이 없습니다만 여전히 파일럿 숙련도와 정비병들의 역량 측면에서….”
노비코프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절거리면서 했다. 하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인적 차원에서는 열세라는 말이다.
개전 직후, 내가 빙의하기 직전, 독일은 쾌속 진격하며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다.
기습이 시작되자마자 전진배치되어 있던 공군 기지들은 수천 대의 비행기들과 함께 박살이 났다. 거기에 있던 그나마 경험 있는 파일럿들과 정비인력들은 다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여기에 ‘사다리 걷어차기’처럼, 격추된 파일럿들을 악착같이 죽여 버리기까지 했으니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할 것이다. 후방에서 수천 명씩을 훈련시키고는 있어도 소모가 너무 심했다.
“알겠네. 최대한 신형 전투기를 많이 생산해서 많이 배치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서기장 동지!”
회의실에 있던 장군들은 낮게 끌끌 웃었다.
<많이 만들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들었습니다.>
어느샌가 이 농담은 전군에 퍼져 나가 있었다. T-34 전차와 IL-2 항공기 같은 병기들은 우리 군대의 빵과 같으니 많이 만들어라! 하다가 농담처럼 던진 말인데 사람들은 이 말을 지독하게도 좋아했다.
“파쇼 놈들은 아직도 자기네들끼리 치고받는 중인가?”
“예,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작전의 대상이 된 고위급들은 대부분 무탈하게 풀려났지만 롬멜과 모델은 아직 조사를 받는 중이라고 합니다. 롬멜은 리버풀 학살에 항명했던 전력 때문에, 모델은 계속 비협조적으로 SS와 충돌하는 중이라고… 물론 이들 외에 중견 장교들부터 장성들까지 잔뜩 들쑤셔진 꼴이라고 합니다.”
베리야는 작전의 실패에 죄송하다는 듯 손을 비비며 이야기했다.
슈페어와 만슈타인을 끌어내리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한 전과가 아닐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 정도면 잘했네. 만슈타인은 어차피 히틀러에게 딸랑이는 충견이고, 슈페어는 히틀러의 친구라 하지 않았나? 향후 이용할 수 있도록 균열을 내는 정도면 충분하네. 첩보조직도 강화되었다고 했으니 이 정도면… 아주 좋아….”
42년의 소련군은 41년의 소련군과 전혀 다를 것이다.
제대로 된 정보를 듣고도 믿지 못해 수십만 병력을 잃어버린 소련군은 이제 없다. 독일 참모부와 방첩부에 침투시킨 스파이들로 훤히 활동상황을 꿰고 있기에.
허접한 전차와 몇 번 훈련도 받지 못한 신병을 고기 조각처럼 갈려 버리라고 내던지면서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 전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다.
이제 적이 어디로 진군할지 작전계획까지 손에 넣었다.
“저 파시스트 잡놈들을 박살 내버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