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106화
기나긴 소련의 겨울은 마침내 그 끝을 보여 가고 있었다. 빈약한 월동장구로 유례없이 혹독한 겨울을 버텨내야 했던 독일군은 기어이 찾아온 봄을 만끽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으으으….”
“잘 생각하게. 바지를 벗으면 얼어 죽겠지만, 바지 뒤쪽의 솔기를 뜯어 놓으면 바지를 매번 벗을 필요가 없네.”
쓸데없이 친절한 조언을 한 군의관은 휭하니 다음 환자에게 가서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더럽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전염병은 창궐했다. 집단으로 이질에 걸린 병사들은 설사를 주룩주룩 쏟으며 죽어 갔고, 이들에게 줄 깨끗한 물의 공급은 항상 부족했다.
“빌어먹을… 벌레 새끼들!”
“다 태워 죽여야 한다고! 이런 제기랄….”
이, 빈대, 모기, 진드기. 온갖 해충들이 병영에서 들끓었다. 두꺼운 겨울옷을 일일이 다 삶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부 병영에서 방제를 한다 하여도 순식간에 다른 곳에서 다시 해충들이 퍼져 들어왔다. 환장할 것만 같은 가려움에 병사들은 수시로 온몸을 벅벅 긁어 댔다.
해충들은 가렵고 짜증 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전염병을 옮겼다. 이질,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같은 질병들은 전투에서 발생하는 사상자 이상으로 비전투손실을 발생시켰다.
소련군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지, 교전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 그것 하나만은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의무병들 입장에선 큰 차이가 없었을 뿐. 팔다리가 잘려나간 환자를 보나, 하루에 수십 번씩 설사를 지리는 환자를 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시트가 더러워지는 요인이 피와 고름이냐, 아니면 설사냐의 차이일 뿐.
“방역에 필요한 살충제를 좀 더 많이, 빨리 공급해 달라고 했는데도 이렇게 안 주는 것인가!”
“그… 그렇습니다. 일단 도로 사정이 나빠 보급이 힘듭니다.”
빌어먹을 도로! 나폴레옹은 어떻게 여길 기어들어 온 거지?
총통은… 그렇다고 치자.
지난가을에도 겪어 본 것이지만 진흙탕 속에서는 도저히 차량이 다닐 수 없었다. 철도를 이용해 수송을 하거나 말 같은 전통적인 보급수단을 사용하거나 해야 했지만, 그 말들이 전염병과 기생충들 때문에 픽픽 죽어 나가는 것이다.
철도의 개궤작업 역시 푹푹 빠지는 곳에서 쉬울 리 없었다.
독일은 철도 너비가 1,435mm인 표준궤 철도를 사용했고, 이에 따라 상응하는 너비의 철도차량을 이용했다. 그러나 소련은 누누이 강조된 더러운 날씨와 지반 상태 때문에 1,520mm의 광궤로 철도를 부설했다.
이 간격을 좁혀야 독일이 철도를 통해 보급을 할 수 있었으나 작업은 쉽지 않았다. 개궤를 전담하는 공병 부대를 운영했으나, 끝 모르게 넓은 소련 영토를 전부 커버하기란 난망한 일이었다.
이제 곧 봄이 올 테니, 공세를 위해 전투물자를 상부에서는 보급해 주었다. 그러나 일선 야전군들로서는 ‘곧 봄’은커녕 까마득한 세월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다.
달라는 살충제 대신 엉뚱한 물건들 ―신품 철모, 치약― 이 도착하는 것을 보며 전방부대는 이를 갈고 전화통에다 고함을 치며 따졌다.
그러나 후방사령부에서는 살충제의 ‘다른 수요처’가 있다며 제한된 물량을 아껴 쓰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판국이었다.
그럼 말들이라도 방역하게 마구간용 살충제 좀 더 달라고 해도 그들은 ‘아껴 쓰라’ 말할 뿐이었다.
이 시대에는 내성 획득에 대한 관념이 부족했던바, 어설픈 방역은 내성을 가진 벌레만을 출현시킬 뿐이었지만. 아무튼 군인은 까라면 까야 하는 법.
독일군은 까라는 대로 깔 수밖에 없었다.
* * *
“몽 듀!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버틴 것입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빳빳하게 다린 장교 정복을 입고 기차에서 내린 프랑스군 장교는 일선 진지들을 시찰하며 감탄을 표했다.
“역시, 우릴 이긴 이유가 있었군. 대체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기는 한가?”
나폴레옹 대제, 당신은 틀렸어…. 프랑스인들은 동유럽 평원의 광대함과 가혹함에 경외와 공포를 느꼈다.
멋쟁이 프랑스군들은 퀭한 눈빛으로 멀거니 그들을 노려보는 독일군들의 꼬라지를 보며 떨었다. 저게 우리의 미래란 말인가?
스페인군과 이탈리아군도 대략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는 남유럽에서 온 이들은 4월의 날씨가 이럴 수 있다는 데 경악했다. 영하와 영상을 오가는 기온, 푹푹 빠지는 진흙탕 같은 지면, 맛대가리 없는 데다가 양까지 부족한 배급 식량까지.
새로이 전장에 배치된 병사들은 당장에라도 항명사태를 일으킬 것 같았다. 이 지옥에서도 살아남은 고참 독일군 병사들이 악만 남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어 대규모 참사로 번지는 것은 막아냈지만, 추축 3국의 신병들은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 * *
스탈린은 옳았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독일인들이 그 말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 들었다면 스탈린 동지의 깊은 혜안과 통찰력에 고화… 아니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뭐? 뭐라고 하는 거야! 독일어 못 해? 독.일.어!”
“Ou est la salle de bain?”
“Donde esta la sala de reuniones?”
‘반 볼셰비키 연합군’이라는 때깔 좋은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진정으로 연합을 이루기에는 일단 의사소통부터가 불가능했다.
동유럽의 헝가리나 루마니아인들은 독일계 이민자 출신들이 많아 독어에 능한 이들이 꽤 있었고, 남부전선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핀란드인들은 아예 레닌그라드 이북에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했고.
그러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3국의 군대는 전 전선에 걸쳐 부족한 인원을 메우기 위해 배치되었다. 의사소통의 문제가 전장 전체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6주’ 한 주제에 자존심만 더럽게 높은 프랑스인들은 어느 정도 알아들으면서도 프랑스어로 말해 주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척 곤조를 부렸다.
독일인 장교들은 우다다다 쏘아 대는 프랑스어로 떠들면서 못 알아들어 벙찐 자신들을 비웃는 프랑스인들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넣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엄격히 금지된 일이었다.
그나마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인들은 나았다. 특히, 이탈리아군은 빈약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전장 적응능력을 보여 주었다.
이탈리아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독어와 러시아어를 익혀 나갔다.
왜냐고?
“오 아가씨. 당신의 눈에는 푸른 호수가 숨쉬고 있구려!”
“호호홋, 루이지 대위님도 참….”
“나를 대위님이라는 딱딱한 호칭으로 부르지 말아 주시오, 나의 작은 꾀꼬리. 더 달콤한 말로 불러 주시오.”
이탈리아인들은 어디서나 그들의 근성을 발휘해 여자를 유혹했다.
주요 타겟은 독일인 종군 간호사들이었다. 나치 독일의 남녀 차별 정책에 따라 간호병만큼은 전원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이탈리아인들은 뻔질나게 야전병원을 드나들며 간호사들과 썸을 탔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의 꾀병 통계가 급증했다.
대체 왜 이렇게 병원을 많이 찾는 것인지 올라오는 보고에 충격을 받은 사령관이 직접 진지를 시찰할 정도로.
병사들이 꾀병을 부려 병원에 간 뒤, 간호사들과 놀아났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선 군의관들에게는 별것 아닌 부상으로 병원 후송을 보내는 걸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물론 어디서나 그렇듯, 위에서 정책을 세우면 아래에서는 대책을 세웠다.
“자, 아~ 하세요.”
“고맙소, 일자. 하하하.”
오른손을 흰 붕대로 친친 감은 이탈리아군 병사는 환자복을 입고, 음식을 입에 떠넣어 주는 간호병과 다정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사소한 부상으로 후송되는 게 불가능하다면 중상을 입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기적의 해답이었다.
특히 이렇게 손을 다치면 ‘합법적’으로 간호사의 집중적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풀어헤친 환자복 깃 사이로 가슴팍에 수프가 떨어지자, 이탈리아군 병사는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오! 일자, 수프가 뜨겁군! 마치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처럼. 닦아 주지 않겠어?”
“얼마든지요. 자… 앗!”
맨살에 간호사의 손이 닿자 멀쩡한 왼손으로 이탈리아 병사는 간호병의 손을 포갰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아무튼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상상도 못한 군기문란에 이탈리아군을 감독하는 독일인 장교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탈리아 장교들 역시 딱히 더 군기가 든 것은 아니었다.
“마테오 비살리! 네놈!”
“후… 계급이 높으면 다입니까? 남자의 매력으로 승부하시지요.”
중위는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쏴 버릴 듯 권총을 뽑아 들었다.
기껏해야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으면서 너무나 당당한 병사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얼굴이 붉어진 채 씩씩대는 중위를 보고 조소했다.
주위의 장병들은 와! 싸움이다! 라는 분위기로 와글와글 몰려들었다.
역시 싸움은 항상 재미있는 법이다. 내가 관련된 것만 아니라면.
적군과 싸울 때는 제일 먼저 도망가지만, 여자를 두고 싸울 때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이탈리아인들의 용맹은 전장이 아닌 병영에서 빛났다.
“그래? 좋다! 결투다!”
“하! 당신의 총탄이 내 가슴을 꿰뚫는다 해도 그녀의 심장은 당신을 이미 떠났소!”
독일인 헌병대가 도착했을 때, 두 이탈리아인들은 결투를 벌이기 직전까지 가 있었다. 결투의 입회인을 자청했던 중대장은 어마 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도망쳤다.
중대장씩이나 되어 부하들의 군기 관리도 못 한다는 지적만 해도 충분했다. 결투에 입회인으로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아마 꽤 귀찮아지겠지만.
하여간 장교나 병사나 같은 혈통을 공유한 인간들이었다.
* * *
“그래서… 이 정보가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독일군 총사령부에서 이탈리아군으로 공유해준 작전계획의 전문입니다.”
소련군 사령관 체르냐홉스키는 어이가 없었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들이 군내 입영을 통해 사보타주와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전계획을 통째로 들고 탈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군이 허술한 집단이라고? 그는 눈으로 보면서도 의심이 들었다.
‘대체 이게 20세기의 군대가 맞나?’
그러면서 탈영 과정에 만난 현지 여인을 꼬드기는 데 성공하기까지 하다니. 진짜 스파이라면 왜 저런 짓을 했는지가 의문이고 레지스탕스라도 왜 저런 짓을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여인은 눈물기 섞인 얼굴로 체르냐홉스키에게 호소했다.
“이이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녜요, 사령관 동지. 그냥….”
“당신을 지극히 사랑할 뿐이오. 내 사랑. 지금은 내게 맡겨 주시오.”
여인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이탈리아인은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배석한 참모들이나 엔카베데 요원들은 이마를 짚었다. 무뚝뚝한 러시아 남성들로서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남유럽의 정서를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여자들은 아주 좋아 죽었고.
“하여간 자네가 말한 것이 맞다면… 이는 인민 영웅으로 칭해도 모자람이 없네. 아주 중요한 정보가 되었어. 원하는 것이 있나?”
“제 사랑과 함께 살 수 있는, 정원이 있는 작은 오두막이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고려하겠네.”
체르냐홉스키도 머리가 아파 왔지만, 이 느끼한 이탈리아인은 정말로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군에 침투해 작전사령부의 당번병이 된 그는 군대의 배치도와 대략적인 작전계획을 들고서 유유히 소련군 병영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하도 뻔질나게 민가를 드나들어서 아무도 그가 나갈 때 의심을 안 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이런 보고가 들어온 이상 최대한 빨리 위에 알려야 했다. 아마 지금쯤 정보부가 상신하고 있겠지만… 작계에 수정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