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05화 (105/300)

# 105

105화

“…각하께서 주신 기회, 각하께서 거두어 가는 것이니 아쉬움은 없습니다.”

롬멜은 담담했다. 이미 그는 빼도 박도 못할 만큼 깊이 들어와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늑대굴에서 부대를 동원해 총통을 인질로 잡고, SS를 해체하고 전쟁범죄를 명령한 이들을 싸그리 군부의 고위층에서 치워 버리려던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줄줄 새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참모장, 슈파이델은 이미 처형당했다고 수군대는 것을 건너건너 들어 버린 롬멜은 삶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린 듯했다.

총통은 담담하게 손을 앞으로 모으고 말하는 롬멜을 노려보았다.

롬멜은 여전히 원수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받았던 수많은 훈장들과 원수의 계급장 역시 달고 있었다. 수갑도 차지 않고, 다만 양옆에 두 명의 친위대원들이 그를 언제든 제압할 수 있도록 시립해 있을 뿐.

총통의 눈에는 잔뜩 핏발이 서 있었다. 감히 내 신뢰를 배신했다는 분노, 꼭 그래야만 했냐는 아쉬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그 모든 감정이 터져 나왔다.

“왜! 왜 그래야만 했나! 롬멜 원수!”

“…왜 그래야 했냐고 물으셨습니까.”

롬멜이 되묻자 총통의 눈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롬멜의 눈에서는 어느새 담담함이 가시고 기묘한 불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리버풀에서는 그럼 왜 그러셨습니까? 그들은 그저 도시를 떠나고자 했던 민간인일 뿐입니다. 그들을 길바닥에서 모조리 기관총으로 쓸어 버리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뭡니까? 비무장의 민간인을 전부 학살하고 수용소에 처넣어 버린 이유는 그럼 뭡니까!”

처음에는 질문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그저 고함이 되었다. 친위대원들은 제압할지 묻는 듯한 표정으로 총통을 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롬멜의 눈은 총통이 아니라 불타는 도시를 보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는 어린아이들, 제 아이만큼은 감싸 안고 총탄으로부터 가로막으려는 젊은 어머니들. 그 위로 끼얹어진 기름과 타오르는 불씨!

무장한 이는 사살당했고, 비무장한 이들은 학살당했다. SS는 총통명령에 반항하는 롬멜을 일시적으로 체포하고 충실히 총통의 명을 따랐다.

“고작 그것 때문인가?”

“고작… 고작이라고 하셨습니까….”

둘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고작’ 민간인 학살이라 말하는 정치가와 평생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로 살아온 군인 사이에선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본질적으로 둘은 다른 인간이었다.

“지금이라도 충성을 맹세하게. 그대라면 나는 용서할 수 있어. 당장, 무릎을 꿇고 독일 민족과 국가에 충성하겠다고 말하게. 롬멜 원수, 그대는 내 최고의 야전 원수야.”

“…저는 언제까지라도 독일 민족과 국가에 충성할 것입니다.”

롬멜이 그렇게 말하자 총통의 얼굴이 확 펴지며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다.

“그래, 롬멜 원수. 기다리….”

그가 다음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하지만 총통의 정권에 충성하는 것과 독일 민족 및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듯합니다. 각하, 각하가 명령하시는 범죄는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롬멜 원수.”

“지금이라도 그만두십시오. 각하께서는 그동안 도박 같지만 현명한 판단을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런 짓들은 아닙니다. 승리한다고 하여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롬멜은 절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겠습니다. 무엇을 시켜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범죄만은 독일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그만두어 주십시오. 자국민을 마구 학살하는 저 소련의 볼셰비키들과 우리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정중히 모시고 나가도록.”

“하일 히틀러!”

“총통 각하….”

떡대 좋은 친위대원들이 롬멜의 양팔을 붙잡았다.

롬멜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순순히 그들을 따라 총통의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쾅 닫히자 집무실의 책상에 놓인 서류들이 한번 들썩였다.

에르빈 롬멜, 발터 모델, 에리히 폰 만슈타인, 빌헬름 카나리스… 이름들의 리스트가 이어졌다.

최고위 장성들의 이름은 거의 다 적혀 있었다. 중장 계급일 뿐이지만 첩보국을 담당하는 빌헬름 카나리스의 이름에는 특별히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밑으로도 수천 개의 이름과 계급이 이어졌다. 총통 암살음모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 이들의 리스트는 이름과 계급만이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툼한 서류뭉치가 되어 있었다.

이 문서가 독일군에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SS의 힘러는 길길이 날뛰며 모조리 잡아들여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그렇게 모두 잡아들이면 군 지휘체계 자체가 붕괴할 것이라는 괴링과 참모총장 요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베를린의 지하 심문실 어딘가로 끌려가 버렸다.

단지 총통이 총애해 온 원수들과 고위 장군들만 ‘특혜’로 인해 가택 연금에 그쳤을 뿐. 이미 연금당했던 롬멜 같은 경우에는 별 차이도 없었다.

다만 카나리스처럼 음모의 중핵으로 몰린 이에게는 단 한 점의 자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그는 결국 자결했습니다.”

“…그러한가.”

신임 게슈타포 국장 하인리히 뮐러는 카나리스의 심문 보고서를 총통에게 제출했다.

제3제국의 내로라하는 고문 기술자들이 모여 반역의 핵심을 고문하고 정보를 짜냈다.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의 인간이라도 단 사흘만 주면 굴복시킬 수 있다고 하던 기술자들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둘 수 있었다.

카나리스는 제 혀를 깨물어 자살했다. 그는 결국 몇 장의 자백만을 남기고, 결코 진실을 파헤칠 수 없는 곳으로 도주해 버렸다.

“이 결과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 것 같은가?”

“이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팔 할 정도 진실로 저희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방어적인 대답이었으나 그 이상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아프베어 내부의 숙청을 진두지휘한 발터 셸렌베르크 역시 끄덕거렸다. 물론 팔 할의 진실이건, 구 할 구 푼의 진실이건, 한 점의 거짓이 가장 큰 파국을 일으킬 수도 있는 법.

가벼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이 모든 이들이 다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말인가….”

“….”

2할의 무고할 수도 있는 이들을 제한다 쳐도 그냥 너무 많았다. 그것도 중요한 이들이.

연루되었다 하는 원수만 롬멜, 만슈타인, 모델로 셋. 거기에 장관인 슈페어까지 더하면 넷.

산술적으로 2할을 제한다 하면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자기는 아니라고 하던 만슈타인 하나 빼고 끝난다. 슈페어 역시 딱 잡아떼었으니 뺀다고 할까? 그렇다 해도 롬멜과 모델을 숙청해야 하나?

제3제국 최고의 명장들을?

정보라인은 그야말로 박살이 난 상태였다. 아프베어가 투입시켰다는 스파이망들을 관리하던 첩보국의 핵심 인물들과 소련 내에 간신히 투입한 스파이들은 싸그리 이중첩자로 전향했다고 쓰여 있었다.

제국보안본부의 보고서에는 ‘이것이 동부전선 패배의 원인으로 사료됨’이라고 대놓고 적어두기까지 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대낮에 총격에 암살당한 것까지 이들의 공작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이쯤 온 이상 그저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모조리 잘라낼 수도 없었다.

“일단 다들 체포해서 심문하게. 단! 모델과 롬멜만은 정중히 모시도록.”

“예! 총통 각하!”

“임시 인선은 확정해서 내려보내도록 하지.”

이미 고위층을 쳐내고 파격 승진을 한 번 시켰지만 이제는 두 번째로 그래야 할 때가 왔다.

진급시켜 원수봉을 쥐여 줄 만한 숙장들이 대부분 지난 숙청이든, 이번 숙청이든 사라진 상태에서 독일군은 최고위급이 극히 부족했다.

보크, 룬트슈테트, 레프 같은 노장들은 숙청당했다. 앞으로 국방군을 이끌리라 생각했던 롬멜과 모델은 이번 사건에 깊이 얽혀 있었다. 충성심만큼은 인정해 줄 만한 라이헤나우는 허망하게 죽어 버렸다.

‘누구를… 누구를 기용해야 하지?’

인사 파일을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알 만한 이름이 없었다.

충성심이 있다고 적혀 있는 이는 능력이나 평이 영 좋지 않았다. 가장 유능한 이들은 대부분 이번 사건에 말려들어 갔거나 공공연히 반나치 발언들을 입에 담았다.

“빌어먹을. 충성심이라는 것이 한 점도 없는 것인가?”

* * *

모델은 자신을 ‘심문’하는 젊은 보안국 소속 수사관의 눈을 응시했다. 수사관은 머쓱한 표정으로 하하 웃으며 원수 각하께 차 한 잔을 권했다.

“총통께서는 원수 각하를 정중히 모실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건 내 부하들에겐 해당되지 않겠지. 그렇지 않나?”

수사관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지만 그것이 무언의 긍정임을 모델은 알 수 있었다.

의자에 기댄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부하들은 유능하고 정직했다. 그렇기에 이 범죄 정권에 반기를 드는 것에 가담했으리라.

그들은 모델 자신에게 음모에 대해 알리지 않았으나, 제국보안본부는 수장을 잃은 후 눈이 벌게져 음모자들과 관련 있는 이들이라면 전부 들쑤시고 다니는 것 같았다. 무장친위대와 몇 번이나 각을 세운 모델이라면 충분히 좋은 먹잇감이었겠지.

그렇다 하여 그가 히틀러의 학살에 애정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는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 부하들에게도 총통의 하수인같이 보였나 보군….’

씁쓸한 입을 차로 씻어낸 모델에게 몇 가지 질문이 주어졌다.

왜 소련 장군 체르냐홉스키와 만났는가? 소련 정부는 어째서 ‘생일 선물’인 시계와 초콜릿을 주었는가? 이전에도 소련 정부, 혹은 소련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나 교류가 있었는가?

수사관이 정중히 건네준 만년필을 집어 들고 그는 쓰게 웃었다.

‘이제 내게 이따위 질문들까지 하는군.’

범죄 정권에 충분히 충성하지 않은 자들은 스파이로, 뒷방에서 등짝에 칼을 찌를 음모나 꾸미는 음모자로 격하되었다.

누구보다도 용기 있고 성실한 군인이었던 이들은 이제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쓰고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그 자존심 강한 친구는 이미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다. 수사관을 윽박질러도 그는 계속 저 어색한 웃음만 지으며 슈타우펜베르크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선 말해 주지 않았다.

“항상….”

“예?”

“항상 용맹한 군인이 제일 먼저 죽지. 비겁한 이들이 살아남아 장군이 되고.”

모델은 알았다. 지금 그가 하는 고민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추한 일인지.

어린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천진하게 웃으며 아버지의 무운 장구를 기원하던 아들에게는 무어라 말할까? 네 아비는 양심이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해 이 정권의 원수로 살아남았다고?

물론 이 회의감 속에서도 한 가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너무 공교로워. 너무.’

아무리 히틀러와 나치들이 날뛰고 있다지만 국방군에서 이렇게 많이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동부전선의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물론 총통의 행각이 정말 미쳐 있기는 했다. 그 점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델, 그 자신처럼 말만 나눴다가 얽혀 들어온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대부분이 딱 그 정도 수준의 가담자겠지. 다만 공교롭게도 소련과 얽히는 바람에….

‘소련?’

퍼즐의 한 귀퉁이가 맞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소련 놈들이 무슨 수로 국방군 내부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을까. 카나리스만 보아도 몇 년 전부터, 독소전쟁이 발발하기 전 밀월기에도 반나치 활동에 얽혀 있었다.

모델의 시선이 올라갔다. 저 벽 너머, 동유럽의 대지에 독일의 아들들은 피를 뿌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심문관의 질문은 이어졌지만, 그의 생각은 저 너른 대지로 이미 떠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