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독일군이 촘촘히 매설한 지뢰진지는 보병의 진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펑! 콰쾅! 들리는 함성들 속에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간간히 섞여 들려왔다.
“빌어먹을… 씨발….”
부디, 내가 내딛는 다음 걸음 앞에 지뢰가 없기를. 니콜라이는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아마 지뢰를 밟고 폭사한 소련 소총병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전방위적으로 가해진 소련군의 포격은 독일군의 지뢰지대에 깔린 지뢰를 어느 정도 제거하기는 했다.
이 시대의 지뢰는 충격이 가해지면 터지는 물건이었으며, 포격은 그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포탄이 만든 구덩이는 깊고 행군에 방해가 되었기에 소련 소총병들은 주로 구덩이를 우회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아직 터지지 않은 지뢰를 밟고 폭사하거나, 더 불운하게도 빨리 폭사하지 못하고 천천히, 전장에서 죽어 가야 했다.
아직 전장에 익숙하지 않은 신병들은 그들의 동료들이었던 붉은 잔해 속으로 걸어가고 싶지 않아 했고, 결과적으로 아직 터지지 않은 지뢰를 또 밟아야 했다.
“공병! 공병 어디 있어!”
지뢰를 밟지 않은 보병이라 하여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숙련된 독일 장교들의 지시로 축조된 철조망, 참호, 그리고 기관총 방어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을 살육하기에 최적화된 장벽 앞에서 소총병들은 어머니 대지에 피를 더했다.
단 1개 분대와 기관총 몇 정으로 지켜지는 방어진지는 말만 들으면 간단해 보였지만,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소총병들만으론 엄청난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박격포나 76mm 경야포는 소련군에 충분히 많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지를 구축하고 버티고 있는 독일군 분대마다 할당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을 뿐.
콰쾅! 콰콰쾅!
니콜라이 분대의 소총병들은 대기하며 76mm 직사포가 화염을 뿜는 것을 지켜보았다.
압도적인 체급의 203mm 중곡사포 같은 위엄은 없었지만, 가까이서 보는 소총병들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되는 무기였다.
“철조망 지대가 개척되었다! 소총병 앞으로! 우라! 우라!”
6문의 직사포가 몇 번 포격을 하자 철조망은 금방 걸레짝이 되었고, 독일군 진지의 기관총 역시 침묵하기 시작했다.
맨몸으로 저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앞장서야 했던 전투공병들은 나직이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하느님, 다음 돌격에도 우리를 지키소서….”
지뢰를 밟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철조망에 할퀴어져 사지가 걸레짝이 되어 후송되는 아군을 보며, 공병들은 성호를 그었다.
저 방어선을 넘어도 또 방어선과 지뢰지대가 등장했다.
참호 안에 파묻힌 대전차지뢰들을 제거하기 전까지 야포 같은 중화기는 저쪽에 접근할 수 없었다.
“죽어! 개 같은 파시스트 새끼! 죽어라!”
소련 소총병들은 침묵하는 진지로 돌격해 들어가 생존자들을 제거하고, 또 대전차 지뢰를 제거하고, 또 그 와중에 대대 방어선의 지원을 위해 설치된 10,5cm 곡사포의 포격을 받아야 했다.
“1번 포대, 삼삼둘하나 좌표로 효력사 3발. 이후 넷하나삼하나 좌표에 6발 포격한다. 실시!”
펑! 펑! 펑!
독일군의 곡사포를 제거하기 위해 아군 포병들 역시 맹렬한 대포병 사격을 가하고는 있었으나, 독일군들은 교활하게 잠시간의 집중 포격을 퍼붓고 좌표를 숨기기 위해 침묵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저들이 집중 포격을 퍼붓는 지점은 주로 명백하게 적군이 존재하면서 좌표를 정확히 아는 곳, 쉽게 말해 점령당한 독일군 진지였다.
이런 방어선을 쭉쭉 돌파해 주어야 할 전차는 보병이 넓힌 돌파구로 급속질주하기 위해 후방에서 대기 중이었다.
물론 보병전투차와 트럭들이 야포와 박격포, 유탄발사기들을 싣고 보병부대를 따라오고는 있었으나 항상 아군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법.
기계는 비싸고 인간은 싸다. 최소한 높으신 분들이 보기엔 그랬다. 장군들은 병사들을 팻감처럼 던져 넣었다.
* * *
끼이이이이익 빼애애애애애액!
“하, 빌어먹을….”
니콜라이는 욕설을 뱉었다.
그는 아직 무사히 살아 있었다. 아까 지뢰를 밟아 폭사한 옆 분대의 분대장과 분대원들 몇몇을 빼면 그가 선임분대장으로 지휘하는 부대는 거의 무사했다.
샤샤의 오른쪽 귀가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가 아직도 피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귀 한 짝 정도로 부상자로 불리기에는 전장은 너무나 참혹했다.
샤샤도 그걸 아는지 조용히 입을 닥치고, 귀를 붕대로 감싸 맨 채 터덜터덜 걸었다.
독일인들은 드디어 슈투카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슈투카는 편대를 이루어 날아와 지상의 목표물에 기총소사를 긁어 댔다.
“엄폐해라! 엄폐해!”
“으아아아아악!”
마치 맹금류가 지상의 쥐새끼들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낚아채듯. 그러나 이 맹금이 독수리나 매 따위와 다른 것은 강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발톱이라 할 만한 기관총이 강철로 된 차량도 찢어발겨 터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나 니콜라이 등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지상에 화력지원을 하던 대공전차들이 이제는 하늘에다 대고 기관포를 투다다다 발사했고, 대구경 대공포대들 역시 어두운 하늘에 빛살을 쏘아 댔다.
타타타타타타타! 쾅! 퍼펑!
가끔 슈투카가 격추당할 때, 니콜라이를 비롯한 병사들은 작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아군 차량이 파괴당하는 것이 더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탄식하기에는 당하는 차량이 너무 많았다.
샤샤는 출혈이 많았는지 어질어질한 듯했다. 옆 분대의 신병이 그를 부축했다.
“이봐 샤샤, 좀만 참아 봐. 제―병―합―동 공세, 그러니까 우리 소총병들과 등등이 하는 공세가 끝나면 그때부터는 전차가 투입될 거야.”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문자를 쓰셨답니까?”
꾀돌이 이반은 애써 분위기를 밝게 하려는 듯 농담을 지껄였다.
니콜라이 역시 나름 ‘제병합동’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써 가며 희망을 줘 보려 한 것인데, 차라리 이렇게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몇 시간 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떠나간 친구, 웃음이 그리웠다. 화약과 강철과 피가 튀는 전장에는 좋은 친구를 데려오기 어려운 법. 몇몇 고참병들은 피식 웃거나 입꼬리만 슬쩍 끌어 올리며 뒷목을 긁었다.
하지만 전차가 온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언제 올지는 모르겠고,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겠지만. ‘종심 작전’은 그런 것이었다. 소총병은 공세를 계속 이어가야 했다.
전차가 돌파하는 동안 예비대를 투입시키기 위해서는 적이 예비대를 투입할 지점을 고르기 어렵게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차가 종심을 돌파한 후 예비전력에 대한 적극적인 섬멸전을 벌이는 동안 소총병 역시 적과의 교전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라는 소리를 떠드는 중대장을 니콜라이는 멍한 눈초리로 본 적이 있었다.
중대장은 자기가 너무 어렵고 위대한 말들을 사용했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번에는 쉽고 위대한 말을 선택했다.
‘소총병의 공세는 끝나지 않는다! 소비에트 우라!’
니콜라이는 그 말을 쉽고 반동적인 단어로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뒈질 때까지 뒈지러 가라, 앞으로'.
물론 뒤로 가도 뒈지는 것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겁쟁이, 패배주의자로 몰려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뒈지러 가든가, 형벌부대에 입대해서 뒤통수에 총구를 겨눠진 채로 뒈지러 가든가 아니면 본보기로 정치위원에게 처형당하든가.
정치장교들은 즉결처형을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패배주의를 선동하는 반동적인 인간상을 처형하는 데에도 딱히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장교 중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생사를 알 길이 없는 세묜처럼.
그런 이들은 병사들의 고충을 잘 들어 주었고, 때론 해결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편지를 읽어 주고 써 주는 정치위원들에게 병사들은 항상 고마워했다.
물론 어디나 개 좆같은 인간들은 있는 법.
“앞으로! 진격하라! 당과 스탈린 동지를 위하여 돌격!”
가장 겁쟁이 같은 정치장교들도 안전하게 병사들 뒤에 숨어 적군이 아니라 아군 병사들에게 총을 겨눌 때만큼은 전장의 사자처럼 용감해지곤 했다.
지금도 뒤에서는 어느 정치장교가 돌격! 돌격! 외치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분대는 전진했다.
개 좆같은 전장 속으로.
* * *
“우리는 공세를 지속해야 하네!”
스타브카의 요인들은 다 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칠판에는 거대한 전선 지도와 사상자 수의 통계가 걸려 있었다.
[170 : 310]
한 사람의 죽음은 사건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가 되었다.
적백내전을 겪어본 최고참들부터 병사 출신의 신참 장성들까지. 이들은 이만큼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호하게 공세를 명령했다.
“아군의 비전투손실은 언제든 다시 복구할 수 있소. 그러나 저들에게 손실을 강요하려면 우리는 공세를 지속해야 하네. 그렇게 해야 저들을 소모시킬 수 있어!”
부상당한 이들은 치료한 이후 다시 ‘전선’으로 복귀시킬 수 있었다. 그것이 총포탄이 오가는 전선이건, 아니면 쇠와 화약을 만들어 내는 노동 전선이건.
하지만 후퇴하면서 발생한 포로들은 결코 전선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날 그날까지.
“그… 저, 서기장 동지. 적군의 방어선에 부딪혀 아군의 사상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방어하고 후퇴만 할 것인가! 언젠가는 점령당한 어머니 조국의 대지를 다시 되찾아야 하는데, 지금 저들이 가장 약해져 있지 않나!”
기관총, 지뢰, 철조망과 참호선으로 이루어진 독일군의 세련된 방어체계는 소련군이 무지막지한 손실을 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주로 전과는 사망자로 집계되지만, 죽은 사람 한 사람이 있다면 중상을 입은 사람도 그만큼 있기 마련이고 이들을 후송하거나 수습하느라 비전투손실로 처리될 사람도 몇 명쯤은 있게 마련이었다. 독일은 이렇게 소련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공세를 지속해야 했다.
“나중에 가면 지금 후퇴하면서 손실한 그 장비들이 있었더라면 저 방어선의 돌파가 얼마나 쉬울지 생각하게 되겠지. 얼마나 더 많이 인민들의 피를 쏟아부을 작정인가? 단 하루, 단 1주일이라도 전쟁이 일찍 끝나야 하네!”
사상자의 대부분은 후퇴할 때 발생한다. 고대 시대, 냉병기의 시대에는 대오가 깨지고 도망가는 와중에 학살당하기 마련이었다.
대오를 밀집하고 있을 때는 강하지만 대오가 흩어지면 전투력이 급감해 결국 하나하나 사살당하고 끌려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전쟁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후퇴할 때 피해가 발생했다.
황급히 후퇴하는 와중에 아무리 좋은 대포며 전차라도 다 챙겨 갈 수는 없다. 당장 죽는 마당에 그런 것까지 챙겨가다가는 그냥 죽는다.
그렇기에 다시 수리해 사용할 수 있는 병기라도 후퇴하는 과정에서는 아군의 손으로 파괴하고 가야 했다.
아니면 적의 손에 노획되어 다시 아군을 위해 포구를 들이밀 것이기에 고장 난 물건은 유기하고 유기된 물건은 파괴하고, 국민들이 피와 땀을 바쳐 만든 물건을 제 손으로 고철로 만들어야 했다.
이렇기에, 공세를 취하는 쪽은 수비자에게 출혈을 강요할 수 있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만세!”
“붉은 군대 만세!”
결국 장군들은 명령에 따르기를 결정했다.
수많은 우리 병사들이 죽어 가지만 결국 저들에게 더 큰 손실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소식이 될까.
고개를 주억거리는 장군들과 정치국원들은 점점 사망자 통계에 무감각해져 가는 것 같았다.
나조차도 그러했다.
몇 날 며칠 밤을 악몽에 시달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깨어나, 늘어난 흰머리를 보면 아직 감각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갈까?
계속 이렇게 시달렸다간 내가 먼저 말라죽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시달리지 않게 된다면, 나는 대체 뭐가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