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97화
나치가 군부를 완전히 휘어잡지는 못하였다 해도, 군이 완전히 정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조직은 아니었다.
먼저 히틀러는 1938년, 국방장관 블롬베르크와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를 조작된 혐의를 씌워 군부에서 축출했다. 작년, 1941년에는 또다시 육군 총사령관을 갈아치웠고, 국방군의 최고참인 룬트슈테트와 참모총장 할더 등 고위 간부들을 내쳐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군부가 히틀러에 아부하는 자들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를 추종하는 군인들은 많았다. 그가 가져다줄 독일의 밝은 미래를 선망했기에 그를 따른 사람도 있었다. 우수한 독일인들에게 더 많은 땅과 자원이 합당하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단지 권력에 아부할 뿐인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다. 전략의 마술사처럼 보였던 총통은 자신만만하게 소련을 침공한 이후 거대한 파국 속으로 나라를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단 10주면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 장성들은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숙청당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작전을 승인했던 총통뿐.
그리하여 히틀러는 오롯이 비난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총통에게 반대하는 불만의 목소리는 친인척 관계와 선후배 관계, 각종 공식―비공식적 연줄로 촘촘하게 맺어진 군부 내에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 * *
“원수 각하… 진정으로 이 정권이 옳다 생각하셨습니까?”
“….”
롬멜은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 온 참모장을 보았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핏발이 선 눈으로 참모장은 그에게 절절히 호소하고 있었다.
롬멜은 개인적으로 그를 항상 동생같이 생각해 왔었다. 그리고 동생이 가끔 엇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해가 될라 애써 비행을 쉬쉬하는 형처럼 그가 뭔가 불온한 모임에 참여하는 것 역시 묵인했다.
이제 그의 참모장, 한스 슈파이델은 모든 것을 공개하고 그에게 탄원하고 있었다.
“저들이 유태인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유태인 다음에는 독일인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의 ‘아리안족’ 운운은 그저 프로파간다일 뿐입니다. 영국에서 무엇을 명령했는지….”
“그만, 그만. 그래서, 독일의 원수에게 반역을 사주할 셈인가?”
“….”
이제는 슈파이델이 입을 다물었다. 롬멜은 낮게 끌끌 웃었다.
“그래, 그런가보군.”
국방군 내부에는 히틀러를 싫어하는 작자들이 하고 많았다.
많은 이들이 히틀러의 이상, 소위 ‘레벤스라움’ 개념에는 열광했지만 유태인을 쥐 잡듯 잡아 죽이는 꼴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표했다.
카이저의 군대에서 함께 싸워 본 유태인이 아군인가, 아니면 세계 저편의 황인종 놈들이 아군인가? 어째서 전자는 잡아 죽여야 할 스파이가 되지만 후자는 ‘명예 아리아인’이자 동맹국이 되는가?
국민들은 ‘배후로부터의 중상’을 열렬히 믿고 지지했지만 지난 전쟁에서 싸워 본 군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승리할 수 없었을 것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네들의 패배를 미화하기 위해 유태인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그렇지만 그 결과물, 총통의 ‘최종 해결책’에 대해서는 그들은 마치 폰티우스 필라투스와 같이 행동했다. 세숫대야에 손을 씻으며 무고한 자의 피가 손에 묻은 것을 애써 부인하려는 듯.
“조심하게. 나나 자네나, 감시하는 사람이 붙어 있을 거야. 그 SS놈들이 무슨 짓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되었네. 자네는 그냥… 최선을 다하게.”
“예!”
마지막으로 총통을 찾아가 볼 것이다.
총통은 그를 발탁해 원수의 자리까지 올려 준 은인이나 다름없다. 엇나가고는 있어도 어찌 되었건 독일 민족의 지도자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롬멜은 스스로의 직위를 걸고 마지막까지 총통을 한 번 더 설득해 볼 말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포섭할 이들 역시 생각해 보고 있었다.
“보충군 사령관이라면….”
롬멜 그 자신의 명성이라면 ―아무리 그것이 정권에 의해 부풀려지기는 했어도― 반히틀러파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꽤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히틀러를 끌어내리려면 군사력이 필요했다.
베를린을 지키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연대 단위로 쪼개져 있었고, 총통은 실질적으로 SS 무장친위대 부대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충성심이 어떠한지 직접 경험해 본바, 한두 개 사단만 가지고 쿠데타를 벌이는 것은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았다.
최소한 육군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병력이 필요했다. 예컨대, 보충군(예비군)이라든가.
“그러고 보니… 국내에서 소요가 발생할 경우 보충군 주도하에 진압이 예정되어 있지 않던가? 보충군 사령관, 프롬 장군에게 한번 물어나 봐야겠군.”
“아마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슈파이델의 얼굴은 이제 환희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 만한 거물이 아예 발벗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실전부대 몇 개만 있다면 빌어먹을 나치 새끼들의 목을 따고 미친 전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이 계획을 주도하고 있는건가?”
“예? 음… 제가 알기로는….”
피식, 롬멜은 낮게 웃었다.
“아아 총통 각하. 총통 각하께서는 어찌 이리도 눈이 어두우셨습니까?”
가장 충성해야 할 방첩국, 아프베어가 등잔 밑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이러면 해 볼 만하지. 첩보를 책임질 이들이 배신해서 ‘배후로부터의 중상’을 시도하고 있다면야.
뭐, 첩보부로는 SD(친위대 제국보안본부)도 있지만 국방군 내부에서 그들이 설치지는 못한다. 그네들이 국방군 안에서 설치는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반역을 일으킬 보수적인 원로 장군들은 다 쓸려 나가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들을 좋아하는 자는 별로 없었으니.
“저녁이나 들자고 해야겠어.”
슈파이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롬멜이 본격적으로 거사에 참여하겠다고 한다면 절반의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절반은 실제 행동에 임할 부대를 포섭할 동지들에게 달려 있었으니, 그로서는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롬멜은 저녁 식사에 초대할 이름들을 하나둘씩 받아 적었다. 옛 전우들, 동기들, 그중에서 가장 정직하고 인망 있었던 자들. 그 자신은 벌써 고속 승진해 원수 계급에 와 있지만 그의 옛 전우들은 대부분 일선제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동부전선에 나가 있지만….
* * *
“쥐새끼들 같으니라고. 제놈들이 독일 민족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SS 제국지도자, 하인히리 힘러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모여든 무장친위대의 주요 지휘관들에게 그렇게 씹어 뱉었다.
“불충한 개자식들, 국가와 민족의 반역자들, 음지에서 반란이나 모의하고 더러운 유태 볼셰비키들과 붙어먹는 창부 같은 새끼들!”
국방군 내부의 주요 장성들이 나치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폰 자 붙는 융커 도련님들,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부터 내려왔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귀족 출신 고급군인들은 ‘보헤미아의 상병’이라 불리우는 총통을 극히 혐오했다.
총통 역시 한때는 그들에게 호소하고 협력해야 했으며, 영프를 몰락시키고 룬트슈테트 및 고위 장성단을 숙청함으로써 우위를 잡나 했다.
“또, 또 반역을 꾀한다는 말인가?”
총통과 힘러에게 충성하는 밀정들은 육군 장성들과 영관들이 요새 들어 분주하게 서로 만나고 다닌다는 첩보를 물어 왔다.
장교 클럽에서, 동프로이센의 집안 소유 장원에서, 아니면 고색창연한 가문의 성채에서 그들은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개중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며, 평소에 딱히 나치당을 좋아한다는 티를 내지 않은 이들은 그들 사이에 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어를 물어 왔다.
“베를린 주위에서 병력을 동원해 수도를 점령하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예비병력을 후방으로 돌려 혹시나 모를 소요사태를 안정시키겠다… 제기랄, 꼼짝없이 당할 뻔했군.”
“명령만 내려 주시면 당장 저들을 진압하겠습니다!”
“명령은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총통 각하께서 내리시는 것일세. 내가 직접 가서 총통을 뵙고 어떻게 할지 지시를 받도록 하겠네.”
당당하게 친위대의 지휘관들 앞에서 선언한 힘러는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위엄 있는 걸음걸이로 총통을 알현하러 걸어 나갔다. 무장친위대의 주요 지휘관들이 그를 따랐다.
‘하이드리히 그놈, 너무 체급이 커졌는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체코의 총독으로 나가 있었지만, 여전히 제국 보안본부장을 겸직하면서 총통의 직접 지령에 따라 독자적인 첩보활동을 전개해 왔다.
국방군 내의 아프베어처럼 친위대 내에는 SD가 있었다. 아프베어가 총사령관인 총통의 시야 밖에서 음모를 꾸민 것처럼, SD 역시 조금씩 엇나가고 있었다.
방금의 보고 역시 프라하에 나가 있는 하이드리히가 먼저 입수한 후 그에게 가공하여 보고한 내용이었다.
“만약 그 빌어먹을 아시아인 놈마저 딴 맘을 품는다면….”
두 눈 중 하나는 암세포가 자라 적출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외눈박이가 된 독수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외눈에만 의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놈마저 반역을 꾸민다면?
반역이 아니라도 좋다. 똘똘한 머리와 넘치는 야망으로 무장한 하이드리히는 제 권력을 어떻게든 확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프라하에서도 ‘실적’을 내고 더 위로, 더 위로 올라오려는 것이 힘러의 눈에는 확 들어왔다.
친위대에서 더 올라가고 싶다면 결국 자신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젊고 유능하며 야심가인 하이드리히와 능력으로 맞붙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오직 돌쇠 같은 충성심과 총통의 총애에 힘입어 이 자리까지 올라온 힘러는 그저 총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제국지도자 각하, 여전히 베를린 인근에는 충성파 부대가 더 많습니다.”
“아! 하우서! 그… 그렇지? 저 반역도 놈들이 감히 설치지 못하겠지?”
“저희 무장친위대는 당과 총통을 결사 옹위하겠습니다.”
동부전선에 나가 있는 1사단 LSSAH, 2사단 다스 라이히, 3사단 토텐코프와 7사단 노르트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재편성이나 편성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소련 놈들에게 잃어버린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하우서는 겁에 질린 것이 너무도 명확해 보이는 힘러를 안심시켰다.
“오히려 저들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전력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을 포섭하며 스스로를 노출시키다니…. 쿠데타 음모를 이렇게 허술하게 꾸미기도 한다는 말입니까?”
“총통과 게르만 민족의 명백한 운명에 감히 반기를 드는 광인들이 무슨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 아무튼 하우서 장군, 자네만 믿겠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 가슴을 펴는 힘러를 보며 하우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외적이 쳐들어오는데 분열하는 집안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 정권은 착실하게 몰락으로의 길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군인은 오직 국가와 민족,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정부에 충성할 따름이지만… 한때 국방군 출신으로서 저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