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96화 (96/300)

# 96

96화

“그 그림들은 솔직히 좀 아깝군….”

“예, 아무래도 진품 말고 위조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음, 그럴 것은 없네. 그러다 들키면 어떻게 하는가?”

그림은 조금 아까웠지만, 솔직히 그렇게 아까울 것도 없었다.

일부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빼낸 것이지만 그 그림들의 대부분은 위폐를 주고 구해 놓은 것. 제값을 주고 산 것도 아닐뿐더러 나중에 베를린을 점령한 후 되찾아오면 그만이다.

혹시나 공습이나 포격 등의 이유로 불타 버린다면 좀 억울하겠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수는 없잖아? 괴링 같은 욕심쟁이 돼지들이 알아서 잘 빼돌려서 묻어놓으면 도로 찾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림 쪼가리 값을 아끼자고 청년들의 피를 더 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히틀러는 어딘가 바뀐 게 맞는 것 같소.”

“허어….”

“그렇습니까…!”

소련 첩보망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후세 학자들이 집단적으로 히틀러가 어떤 인간인지 탐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쌓아 올린 연구결과만 하겠는가?

히틀러가 채식주의자고 애견가라는 사실 정도야 꽤 알려진 편이지만 그가 고전주의 예술을 좋아하고 모더니즘을 극히 혐오한다는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기는 어려웠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미끼를 던질 줄은 몰랐겠지.

‘선물’이라고 보낸 그림 중 우리는 히틀러가 좋아할 만한 작품과, 싫어할 만한 것들을 일부러 섞어서 보냈다.

“히틀러는 원래 미대 입시 탈락자 출신에 고전파 예술의 애호가로 유명했지. 그리고 모더니즘을 싫어하는 걸로도. 두 종류의 그림을 섞어서 보냈는데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하하하하, 아마 독일 놈들도 뭔가 이상하게 보고 있을걸?”

“역시, 서기장님의 신묘한 책략은 따를 길이 없습니다!”

히틀러의 태도 자체는 우리가 적국이 되었으니 변화할 수 있다. 그림을 보내도 딱히 안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극혐하는 소련 빨갱이들이 극혐하는 모더니즘 작품을 보내면 어떨까?

‘선물’ 작전은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사절단원은 미리 알려준 암호 중, 히틀러가 분명히 다름을 의미하는 <총통의 반응은 냉담하다>를 짧게 보내왔고 나는 이제 이걸 기반으로 작전을 계획해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인간으로 변했는지는 몰로토프를 비롯한 이들이 와서 주관식으로 보고하겠지만… 일단 ‘나’는 반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미래인인 것 같다…!

“일단 작전 경과를 보고해 보시오.”

“예, 서기장 동지. 저희가 접선한 검은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대부분 첩보국의 눈길을 피해 활동을 끊고 잠적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분을 위장한 채 접근하자 덥석 제안을 물었습니다!”

“역시… 동부전선의 파국이 제법 영향력이 큰 것 같은데?”

검은 오케스트라는 일부가 이미 발각당했었다. 어디까지나 일부 정도나.

SD가 아프베어와 협력해 검거했다고 했는데 검거자의 리스트 중 내가 아는 이름이 거의 없는 것도 있고, 계급도 대부분 영관이나 위관급인 것으로 봐서는 꼬리 자르기인 것 같았다.

진짜 중요한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제 자리에 있었고 이들만으로 작전을 진행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히틀러가 검은 오케스트라가 뭔지, 히틀러 암살음모가 존재했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면 쿠데타야 실패하겠지만 그걸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들이 국방군의 명장들과 아프베어를 박살 내버리는데 기여해 준다면 충분하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이렇게 몰아낸 자리에 더 유능한 자가 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신중한 바실렙스키는 늘 그렇듯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총참모장과 원수 직위에 오른 이후 바실렙스키를 대놓고 찍어누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내 적극적인 승인하에 그는 스타브카 내부에서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유의미한 지적이기도 했다.

“으음… 설마 아무리 유능해도 모델이나 만슈타인보다 더한 작자들이 나오겠소? 그렇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하하하하. 장군들, 들으셨나?”

“송구합니다 서기장 동지!”

“면목이 없습니다!”

소련군 장군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참패한 데다가, 그 이후에도 몇 번씩이나 패배의 전적을 쌓아 나갔다.

유리한 상황에서 10:1 가까운 교환비를 내며 모델한테 갈린 주코프는 특히 이를 빠득빠득 가는 듯했다.

“물론, 꼭 장군뿐만 아니라 아프베어나 SD 같은 곳의 수뇌부가 더 유능한 이로 교체될 수는 있겠지… 제놈들의 권력 다툼에만 휘말리지 않는다면 말이야!”

히틀러 암살 미수 이후 아프베어는 암살사건의 원흉 취급을 받아 갈가리 찢겨 나갔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SD 역시 하이드리히 암살 이후 여러 잡스러운 인물들이 책임자로 임명되지만 이들이 딱히 무슨 대단한 전공을 세운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로 권한과 영역다툼을 하느라 업무에 혼선만 빚고 시간과 인력만 낭비할 뿐이지.

실제 역사에서 독일의 첩보능력은 에니그마가 탈탈 털리는 것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부터 스파이들이 모조리 잡힌 것까지,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았다.

독일 첩보부의 머리 위에서 놀던 영국 첩보부 안에 침투해 50년대까지 자료를 쪽쪽 빨아먹었던 소련 첩보부가 보면 아마 애들 소꿉장난 수준일 것이다. 지금도 저들은 우리가 위폐작전을 하고 있는지 아직 상상도 못 하고 있다는데?

“SD가 더 유능해진다고 저희가 크나큰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바실렙스키 원수 동지.”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들이 주로 담당하는 영역은… ‘속국’, 즉 프랑스나 영국 같은 곳들에서 반란분자, 불평분자의 색출이지 저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일은 아닙니다.”

이 역시 맞는 말이기는 하다. 게슈타포를 비롯한 비밀경찰들은 유태인 색출, 레지스탕스와 첩보전을 벌이는 것이지 소련군은 이들의 직접적인 상대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국방군 내 아프베어의 역할에 가깝지.

우리가 레지스탕스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놈이 그놈이지만… 레지스탕스들이 너무 큰 자율권을 획득하는 것도 딱히 좋지는 않다.

“레지스탕스 내에서는… 우리 지분만 키워 놓으면 되오. 명심하시오! 유일한 무력집단으로서의 입지가 중요하지, 그들의 절대적인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하나다.

독일이 패망한 이후 일제 봉기해 소련에 충성하는 정권을 세우는 것.

독자적으로 투쟁해 독일을 몰아내는 것은 그들 입장에선 좋을지 몰라도 소련 입장에서는 딱히 좋을 것이 없다. 특히 소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프랑스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소련의 앞마당인 유고 같은 곳에서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10만 명 가까운 독일군을 붙들어 매 주는 유고는 그냥 우리 야전군 정도로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프랑스가 그러면 도저히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특히 프랑스. 프랑스만큼은 우리의 지령을 받는 저 공산당원들이 반드시 정권을 장악해야 하오.”

“명령대로 이루어 내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현재 프랑스 레지스탕스 내에서 적어도 과반 이상은 공산당 소속 정파들이니 걱정 마십시오.”

“알겠네. 베리야. 자네 능력만은 내가 잘 알고 있지. 프랑스를 장악하는 것은 향후의 유럽 장악에 있어 더없이 중요하오.”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다. 마셜 플랜으로 수십억 달러를 뿌리고서도 미국은 유럽의 정치인들이 유럽 내 독자주의 노선을 주창하는 것을 막아 내지 못했다.

예컨대, 프랑스의 드골과 서독의 아데나워 같은 이들. 서독과 프랑스는 유럽연합의 모태가 되는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ESCS)를 창설하며 유럽이 미국의 영향력 바깥에서 혼자 설 수 있음을 선포하고자 했다.

여기에 더하여 드골은 독자노선을 주창하며 미국을 엿 먹이는데 성공했다. 독자적 핵무장을 주장했고, 나토에서 탈퇴했으며, 유럽을 프랑스 중심으로 끌어모아 미국에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

“프랑스인들은 꼴에 자존심은 높아서 누가 유럽을 장악하려 하든 방해를 하려 들 것이네. 저들이 우리의 유럽경영전략을 망쳐놓기 전에 길을 들여야 해!”

서유럽을 장악하고자 한 미국은 드골이 이반시킨 프랑스를 자기네 편으로 돌려놓기 위해 진창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서유럽 전략에서 핵심 파트너는 프랑스였다.

영국은 명백히 친미세력이었지만 대륙국가가 아니었고 국력도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프랑스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환심을 사려고 프랑스가 벌인 식민지 전쟁에 열심히 개입하고 다녔다.

그리고 베트남이라는 핵지뢰를 밟아 버렸다.

Quagmire, 진창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전쟁은 그렇게 미국의 국력을 쪽쪽 빨아먹었고 60년대를 여기서 보내다가 루즈벨트 이후로 계속된 진보정권이 아예 뒤집혀 버렸다.

중간의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이기는 했으나 굉장히 진보적인 인물이었고, 그를 제외하면 30년대부터 계속된 민주당 정권이 닉슨 시대가 도래하며 뒤집혀 버린 것이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제아무리 게슈타포라 해도 인민을 모두 죽여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저들이 강경 진압을 하면 할수록 저항의 불길은 번져나갈 것입니다. 그 선두에는 언제나 인민의 당, 우리 공산당이 있을 것입니다!”

맞는 말을 해도 베리야가 하니까 왜 이렇게 찜찜하냐. 또라이 히틀러와 엮여서 그런가? ‘인민을 모두 죽여 버릴’ 수는 없겠지…?

하이드리히 암살 이후 SD는 그의 복수를 한답시고 체코의 마을 하나를 아예 밀어 버렸다. 독일군이 한 명 죽을 때마다 민간인을 몇 배씩 죽이겠다는 그들의 전략은 일시적으로 겁을 줄 수는 있었어도 결국 자충수로 되돌아오기는 했다.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을 뿐.

뭐, 그렇다고 인민의 적을 암살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독일이 누굴 죽일까 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우리까지 같이 죽을 뿐이다.

“잠입한 이들은 접선하였다고 하는가?”

“예, 서기장 각하.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즉시 작전 수행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주 좋군.”

몰로토프가 소련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작전 시행 명령을 내릴 것이다.

이걸 위해 특별히 지시까지 자세하게 내려놓았다.

‘재밍이 잘 되는 스텐 기관단총 말고 다른 거, 확실히 신뢰도가 검증된 걸 써라.’

‘수류탄에는 파상풍 독소를 넣어서 혹여나 살아남더라도 패혈증에 걸려 오락가락하게 만들어 버려라.’

실제 역사에서 암살자들은 스텐 기관단총에 재밍이 걸려 수류탄을 던졌고, 이걸 맞고도 하이드리히는 한참을 더 살아 있다가 결국 패혈증에 걸려 죽었다.

2010년대에도 패혈증이 생기면 걷잡을 수가 없는데 이 시대에는 오죽할까?

실제 역사에서 하이드리히는 부상을 당해 놓고도 체코인 의사들을 믿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열등 인종에게 제 몸을 맡길 수는 없다나?

하지만 여기서는 혹시나 모르니까 더, 더 확실하게 사살해야 한다.

그놈이 죽어야만 히틀러의 뒤통수가 제대로 간지러워질 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