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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93화 (93/300)

# 93

93화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어서 오시지요.”

전직 술 장사꾼, 현직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열렬히 몰로토프의 방문을 환영했다.

둘은 이미 한번 짜고 폴란드를 갈라 먹고,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켜 본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외무장관으로서 자신의 입지가 전쟁으로 인해 흔들릴 것을 우려한 리벤트로프는 소련과의 개전을 반대했을뿐더러 지금도 정전협정을 더 오래 끌고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총통의 반응은 냉담했다.

처음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켰을 때 보여 주었던 뛸 듯한 태도는 다 어디로 갔는가?

히틀러는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앉아 소련이 보내온 제안서를 뒤적거렸다. 그 표정에서, 몰로토프는 확실히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신사협정은 안 되겠구나.

‘되리라 생각한 적도 없다만.’

“전쟁에서 쓰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승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

“유감입니다만 총통 각하, 지금도 우리는 제네바 의정서에 의거하여 독가스와 생물학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실로 유감이군 그래.”

“….”

대놓고 아쉬워하는 히틀러의 모습을 보며 리벤트로프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게 해 보려는 듯 애써 비굴하게 헤헤 웃었다.

몰로토프는 입을 꾹 닫고 총통을 관찰했다.

진짜 화학―생물학 무기를 사용하려 하는 것이라면 소련 역시 그에 대비해야 했다. 그저 허세를 부리는 것인가? 아니면 진실로 세계의 공적이 되기를 자처할 것인가. 궁지에 몰린 독일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은 서기장이 이미 경고한 바 있었다.

아직 독일이 그만큼 절박하지는 않겠지만….

“기왕에 온 김에 푹 쉬고 가시오.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부디 참석하길.”

“알겠습니다, 총통 각하.”

히틀러는 그렇게 일축하고는 손을 휘휘 내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건장한 체격의 SS 병사들이 소련 사절단을 위협적으로 에워싸고 회담장의 바깥으로 ‘안내’하려 했다.

그들의 틈 사이로 몰로토프는 빼꼼 고개를 내밀고 히틀러를 보았다.

“총통 각하? 총통 각하?”

“무슨 일인가?”

“저희가 가져온 선물은 잘 받으셨는지…?”

히틀러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소련 사절단은 평화를 제안하러 온 것은 아니었으니, 그런 것처럼 보이는 신사협정 제안을 했고 선물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혹여나 나치당 고위층을 해하기 위한 음모가 있지는 않을까, 숙련된 전문가들이 이 ‘선물’들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었지만 무엇이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 문서로 작성되어 있었기에 다들 한번은 들여다본 참이었다.

“음, 그렇소. 선물은… 고맙게 받겠네. 그러나 이것이 외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거면 됐다는 듯, 몰로토프는 어쩐지 홀가분한 표정으로 회담장을 나섰다. 그는 스탈린 서기장이 구두로 내렸던 지령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소련 정치국과 스타브카에서는 예전부터 열심히 정보를 수집했다.

그중에서도 최악의 가상적국인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는 광적일 정도로 그의 행적과 사상 등의 정보를 수집해 그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지를 예측하고자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 취향, 말버릇, 식성, 아무튼 독특한 인간인 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내려 했다. 그 결과물을 몰로토프와 소련 사절단원들은 어느 정도 머리에 집어넣고 있었다.

* * *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히틀러는… 어딘가 변한 것 같네.”

2천 킬로미터는 떨어진 크레믈린에서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마찬가지로 베를린의 총통관저나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의 늑대굴에 처박혀 있을 히틀러가 변했는지는 어떻게 아는 건가?

몰로토프는 그것이 궁금했지만, 굳이 서기장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독소불가침조약을 깨트린 것만으로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지만 아무튼 서기장의 표정은 심각했다.

“자네를 이렇게 보내는 이유는,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서이네. 신사협정이 체결되지 않아도 좋네. 히틀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만 잘 보고 오게.”

“예,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굳이 몰로토프, 그 자신을 선택한 이유는 협상이라는 이유로 독일을 방문할 만한 거물급 중 유일하게 히틀러를 면대면으로 직접 만나 본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서기장은 더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몰로토프는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서기장도 어느 정도 바뀐 것 같기는 했다.

전쟁 발발 직전만 하더라도 몰로토프 그 자신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숙청하려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혐오스러운 베리야를 끼고 돌고, 지금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확 내쳐 버린 흐루쇼프를 지극히 총애했다.

그러나 지금은 베리야를 계속 경계하는 한편,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즈다노프 같은 ‘올드보이’들을 다시 친위세력으로 쓰고 있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지만 의심이 덜해졌고, 더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아마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독일이 전쟁을 건 것이 그에게는 충격이겠지. 그래서 히틀러가 대체 무슨 변화가 있어 저렇게 된 것인가 보고 오라는 게 아니었을까.

* * *

“맞는 것 같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외무인민위원 동지.”

히틀러는 소련 사절단에게 시종일관 냉랭하게 대했다.

협상안에 대해 다시 말을 꺼내 보려 한 몰로토프를 재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양 끊어 버린 히틀러는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망쳐지는 것은 아랑곳 않고 자기 접시에 놓인 연어 카르파쵸만을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수행원에게 살짝 귓속말을 한 몰로토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수를 세 번 짝, 짝, 짝 치고 일어섰다.

“이 자리에 초대해주신 독일국의 여러 인사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총통 각하.”

총통을 언급하며, 몰로토프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썰렁한 분위기의 만찬에 질려 있던 여러 인사들 역시 그의 인사에 호응해 박수를 쳤다.

애초에,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한때 소련과의 밀월관계를 기억하고 있었다.

루마니아, 핀란드, 발트 문제로 인해 독소관계는 경색되었고, 결국 전쟁까지 시작하기는 했지만 소련은 독일이 재무장할 수 있도록 영국의 봉쇄를 피해 각종 자원과 물자를 지원했으며 폴란드 분할에 함께한 ‘우방’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을 혐오하는 대다수는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최소한 손님을 대하는 예의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저희 사절단이 가져온 ‘선물’에 대한 검역 작업이 끝났다고 들은 바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 귀하신 분들 앞에서 저희가 가져온 것들을 선보이고자 하는데… 괜찮을는지요?”

“그리하게.”

히틀러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 무슨 선물 말인가? 뭘 가져온 거지?”

“자네 그 소문 못 들었나?”

참석자들 중 진짜 히틀러의 핵심 측근으로 모르는 것이 없는 몇몇을 제외하면 다들 궁금해하고 있었다.

몰로토프는 그 스스로 몇 번 ‘스탈린의 선물’을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 구체적인 정체에 대해서는 일부러인지 말을 아꼈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저 빨갱이 나라의 두목이 대체 무슨 선물을 보내왔을까?

리벤트로프가 씩 웃으며 만찬장을 지키던 호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거대한 문이 열리며 흰 천에 감싸인 뭔가 네모진 것을 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건의 크기는 각기 달랐다. 어떤 것은 한 명이 양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고, 어떤 것은 두 사람이 양 끝에서 낑낑대며 힘겹게 가지고 들어와야 했다.

저것이 무엇인가 하며 궁금해하던 리벤트로프가 신이 나서 이야기하자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소련에서 온 선물입니다. 바로… 진귀한 그림들이지요!”

아예 술장사에서 그림장사로 전직이라도 하려는 듯, 리벤트로프는 그림에 씌워져 있던 흰 천을 손수 하나하나 벗기며 소련인들이 선물로 보내온 그림들을 소개했다.

“이 작품은 화가 누구가 언제 그린 것이고….”

물론 그의 풍부한 지식이라기보단 소련인들이 미리 만들어 준 카탈로그에 있던 내용이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감탄했다.

“돈 깨나 썼겠는데?”

“아니, 저런 그림들은 대체 다 어디서 구한 건가?”

“이걸 다 우리에게 넘긴다고?”

고전적인 작품들부터 현대의 모더니즘 작품들까지.

서로 간의 연속성을 찾자면 그다지 연관은 없지만, 아무튼 유명하고 비싼 작품들을 소련 사절단은 한가득 실어와 독일에게 넘겨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은 잘 몰랐지만, 비싸 보이고 화가들의 이름도 어디서 들어 봤기에 리벤트로프가 하나하나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열렬히 박수를 쳤다.

심드렁해 보이던 히틀러도 조금은 관심을 가지고 보는 듯했다. 뭐, 관심을 가졌다기엔 여전히 소시지 하나를 쿡 찍어 우적우적 씹으며 흘끗흘끗 보는 정도였지만.

미술품에 욕심이 많은 괴링 같은 자들은 아예 침을 질질 흘릴 듯한 얼굴로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개를 마친 작품들이 하나하나 퇴장할 때, 그의 눈동자는 그것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분량으로만 치면 작은 미술관 하나를 만들어도 될 정도라, 아마 내가 몇 개 정도는 쓱싹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욕심 어린 표정이 괴링의 얼굴에는 드러나 있었다.

“……이로써 소개를 마칩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감사합니다.”

리벤트로프는 우아한 체,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모든 사람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히틀러를 제외하면.

소련 사절단 중 만찬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일어나 환영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박수는 꽤나 오래 이어졌다.

만찬에 있어야 할 소련 사절단 중 한 명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 * *

[총통의 반응은 냉담하다]

소련 사절단은 무선전신을 통해 본국과 협상 내용을 주고받고, 또 지령을 받을 수 있도록 전신기의 사용을 허락받았다.

물론 이는 독일에 의해 내용이 속속들이 파악당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소련 역시 모르지 않았기에 기밀 유지가 필요한 내용은 당연히 오갈 수 없었다.

하지만 소련 사절단 한 명이 와서 발송한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었다.

소련인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아프베어 장교 하나는 그 내용을 기록해 보고서에 첨부하기로 하고 신경을 꺼 버렸다.

그는 소련과의 전쟁이 멈추기를 바라지 않았다. 미국과 협상할지언정, 더러운 유태―볼셰비키 빨갱이들은 지구상에서 청소해 버릴 대상이었다.

지금 전쟁을 멈추고 미국과의 싸움에서 치고받고 피를 흘리면, 우리가 그랬듯 저들도 뒤통수를 칠 기회를 노릴 것이라고 장교는 생각했다.

“잘 됐군 그래.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총통 각하의 판단은 옳았다. 아마 저들은 내심에 딴마음을 품고 있겠지. 스탈린, 그 대마왕이 엿을 먹고 당황하는 꼴이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 * *

[총통의 반응은 냉담하다]

사절단이 보내온 전신은 바로 엔카베데를 거쳐 내게 올라왔다.

역시. 내가 생각하던 내용이 맞구만.

“계획했던 대로 실행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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