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92화 (92/300)

# 92

92화

특사단의 파견과 잠시간의 정전 협정은 원활하게 처리되었다.

이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위해 한번 독일에 가 봤던 몰로토프를 특사단장으로 하여 독일에 파견했고, 나는 월리스를 비롯한 미국 사절단을 불러 열심히 기름칠을 했다.

특사단 파견은 사실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지만, 미국이 이걸 독―소가 자기네를 뒤통수치고 서로 손을 잡으려 한다고 생각하면 엿을 먹는 건 소련이 되기 때문이다.

뭐,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미 한번 통수를 맞은 소련이 독일과 짝짜꿍해서 얻을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리고 기왕에 정전협정한 김에… 몇 가지 술수를 더 쓰기로 했다.

“자, 자, 이리로…!”

3월인데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수십 대의 소련군 트럭들이 로브노의 남부집단군 사령부로 들어왔다.

독일군 병사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트럭들을 응시했다.

“저게 다 뭣이다냐…?”

트럭을 운전하는 소련군 병사들 역시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병사들을 헤치고 걸어 나온 독일군 보급장교는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이라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듯 트럭을 인솔해온 소련군 장교를 찾았다.

“초콜릿… 150톤이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15kg, 144개들이 박스가 1만 개 적재되어 있습니다. 하역에 대해서는 독일 측에서 책임지기로 했다고….”

소련군 장교의 독어는 상당히 유창했으나 그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아직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듯했다.

140만 개에 이르는 초콜릿을 독일 병사들을 위한 ‘선물’로 보내는 의도는 뭘까?

수백만에 이르는 소련군 병사들 앞에 하나씩도 못 돌아가는, 사실상 1주일에 소련군이 소비하는 초콜릿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걸 왜 독일군에게?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자 그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서기장 커틀릿, 스팸 스튜, 미제 초콜릿 등 이것저것 잘 먹고 다녀 통통하니 살이 오른 소련군 병사들에 비해 독일 병사들은 눈이 퀭하도록 말라 있었다. 움푹 들어간 뺨에 허옇고 검은 때가 눌어붙은 군복을 둘둘 감은 무리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초콜릿, 초콜릿이래.”

“밥… 밥 줘….”

“야! 다들 물러나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모여든 병사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그들은 기이한 열정으로 빛나는 눈을 하고 트럭에서 내려지는 박스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병사들이 보이는 추태를 눈치챈 독일군 보급장교들이 그들을 훠이 훠이 쫓아냈지만,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도 독일군 병사들은 결코 초콜릿 박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급 장교들은 몰랐지만, 144만 개의 초콜릿을 독일군으로 보내는 작업을 책임진 신규 남서전선군 사령관 체르냐홉스키와 그의 참모들은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한 로브노 근처, 소련군 1개 소대와 독일군 1개 소대가 경비하는 야트막한 야산 밑의 오두막.

상대편의 사령관, 모델 원수와 만난 그는 서기장이 친히 내린 지령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조금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모델 원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어떻게 제 생일까지 아시고….”

여기서 생일 축하를 받을 줄은 진심으로 몰랐던 모델은 평소의 불같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니라 멋쩍은 듯한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스탈린 서기장은 어떻게 알았는지 모델 원수를 흠모해 왔다며, 얼마 전 지나간 그의 51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황금과 백금, 51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회중시계를 보내 왔다.

노동자들의 나라, 소련에서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번쩍거리는 시계를 본 모델 원수는 서기장의 친필 편지를 읽으며 왜 적장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편지에는 ‘독일군 성노예’의 배치를 멈추고 포주들을 단죄한 정의로운 명장, 독일군의 야전원수 모델 장군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 쓰여 있었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아무튼 모델은 스탈린에게 정중한 답장을 보냈다.

[저는 군인이고,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또한, 보내오신 이 시계 역시 군인으로서 가지기에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물건입니다. 병사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야전군인이 이런 시계를 받는 것은 누가 보내든지 간에 아니 될 일입니다.]

그러자, 스탈린은 이번에는 다른 제안을 해 왔다.

[병사들을 생각하는 모델 원수의 마음에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시계가 안 된다면 병사들을 위한 물건은 어떻습니까?]

소련군이 먹는 초콜릿 150톤을 보내 주겠다는 서기장의 제안에 모델은 기가 막혔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보내 주시는 초콜릿은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먹을지 안 먹을지는 모른다. 소련군이 뭘 거기에 넣어 놨을지 모르니.

받는 것은 독일군에게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았다. 소련군이 먹을 초콜릿을 불태워 버리든 묻어 버리든 아무튼 이쪽이 손해 보는 것은 없었으니 받기는 받는데… 먹는 것은 일단 추이를 지켜보고 할 일이다.

몇 가지 실험을 해 보고, 정 이상이 없다면 병사들에게 나눠 줄 수 있다.

“하하하하하, 혹여나 뭘 넣어 뒀을지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지금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이 귀국을 방문 중인데 저희가 여기다 수작을 부렸다간 그분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체르냐홉스키는 빙긋 웃으며 말끝을 흐렸고, 모델은 통역을 들으면서 그 말에 뼈가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총통은 미쳤다. 정상적인 상황 판단이 어렵다.’

그를 발탁해 3계급 특진을 시키고, 원수의 직위에 올려놓은 은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친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모델은 가끔 스스로에게 되뇌곤 했다.

‘이 정권은 범죄 정권이다.’

독일군의 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끄는 것은 군인으로서는 더 이상 없을 명예였다. 하지만 이 정권은 범죄 정권이었고 그는 부역자, 부역자의 우두머리라 할 만했다.

‘전쟁 이후의 책임은 어찌 질 것인가?’

이미 원수가 된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아니, 과도한 영광이었다. 소련마저도 그에게 아첨하듯 대할 정도로.

하지만 지금에야 소련이 이렇게 그를 대우하지만 혹여나 패배가 가까워져 올 때도 그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나 다름없었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병사들이 굉장히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초콜릿은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병사들에게는 영양이 필요했고, 즐거움이 필요했다. 일단 무작위로 추출하여 포로나 군견들에게 먹여 보고 판단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말마따나, 스탈린의 2인자라는 몰로토프가 독일에 사절로 가 있는데 이런 얕은 수작을 부릴 것인가?

모델, 그 자신도 듣는 귀가 있어 소련의 몰로토프가 얼마나 외교가를 종횡무진하며 독일을 곤경에 몰아넣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으뜸패를 함부로 스탈린이 버릴 일은 없다. 오히려, 총통이 그를 해하지나 않을까 하지만… 요새 정신을 차린 괴링 원수나 힘러 같은 심복들조차 그런 짓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 * *

모델과 체르냐홉스키는 그렇게 얼마간 환담을 나누었다.

2주간의 임시 정전은 전쟁에 지쳐 있는 양군의 장병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두 사령관이 호위병들에게 편히 쉴 것을 허락하자 호위병들은 구석구석에서 서로 손짓발짓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음…? 모델 원수, 혹시 동행한 장교분들을 소개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러지요. 이쪽은 제 친구인 한스―발렌틴 후베입니다. 그리고 이 젊은 중령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체르냐홉스키는 그 얼굴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서기장의 친필 지령서에는 그의 얼굴과 이름이 두 줄의 밑줄과 함께 기록되어 있었고, 대체 왜 장군의 차석부관인 젊은 중령 따위에 그렇게 공을 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 지령이 쓰여 있었다.

슈타우펜베르크 중령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일어나 딱딱하고 어색하게 적장에게 경례를 했다.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체르냐홉스키가 악수를 청하자, 후베 소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악수를 마주 받았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중령 역시 군인스러운 딱딱한 태도로 적장의 악수를 받았다. 체르냐홉스키는 그의 손을 유독 꽉 잡고 길게 흔들었다.

“아주 잘 생긴 젊은 군인이로군요. 혹시 나이가 몇 살쯤 됩니까?”

“아, 07년생입니다. 대장 각하.”

“나와 나이가 같군요. 하하하하.”

체르냐홉스키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저렇게 젊은 사람이 대장까지 되었단 말인가? 07년생이면… 소련 군인들이 고속 출세를 했던 적백내전 시기에는 아직 군문에 들어갈 수조차 없을 어린 소년이었을 테고 30년대 대숙청 시기에 갓 위관장교나 되었을 것이다.

독소전이 발발한 지 이제 채 1년이 안 되었는데 대체 얼마나 전공을 세웠기에 별 4개, 대장 계급장에 전선군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받은 것인가?

슈타우펜베르크 역시 황당한 듯했으나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고,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솔직히 체르냐홉스키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 스탈린 서기장은 그에게 1계급 특진으로 소장 계급(1스타)과 사단장 보직을 주었다. 공훈을 세워 다시 중장으로 승진하기는 했으나 또 순식간에 상장을 건너뛰고 대장까지 갈 수 있을 줄은 그조차도 몰랐다.

전 남서전선군 사령관 키르포노스 대장이 크게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그 자리에 지명받은 것이다. 남들은 혹시 서기장의 숨겨진 아들이 아니냐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우스갯소리를 했고, 아버지마저 어머니의 정조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다 뜻이 있으시겠지.’

원래대로라면 이 잘생긴 친구처럼 중령, 빠르다면 대령 정도가 적절했겠지만 벼락출세를 했으니 겸손해야 했다.

아무튼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린 듯했다.

참모부 회의에서 바실렙스키 원수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서기장의 의중은 우리가 다 알 수 없고, 그분의 능력 역시 그렇다. 각료들과 장군들 중 가장 열등한 자는 서기장의 도구가 될 뿐이고, 그보다 조금 나은 자들은 수족이 될 것이며, 가장 우수한 자라 하여도 그분의 조수 정도나 될 수 있을 뿐이다.”

체르냐홉스키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만 잘하자.

지금 서기장이 시킨 일을 가장 잘하려면, 모델 원수와 열심히 노가리를 까야 했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보다는 목표는 덜 매력적이지만. 무뚝뚝한 중년의 독일 군인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후자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슈타우펜베르크 중령은 자녀들이 있습니까? 하하하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