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화
독일이 총력전 태세로 돌입하기 어려웠던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했다.
먼저, 1차 대전을 겪어 본 독일 국민들은 그 궁핍했던 시절을 악몽으로 기억했다.
나치 정권은 끝까지 곤조를 부리는 군부와의 힘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군부의 힘은 키워주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깎아 먹는 것은 본질적으로 나치들이 정치가인 이상 선택하기 힘들었다.
또한, 군수공업 분야에 막대한 투자가 되었으나 이 투자는 많은 부분 고정자본 형성, 인프라 정비를 위한 투자였다.
한창 공장이 쌩쌩 돌아가야 할 때, 새로 공장을 짓고 설비를 올리는 데 투자한다면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소련은 1920년대, 30년대를 거치며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때문에 이미 중공업이 확대된 상태였다면 독일은 전쟁을 계획보다 일찍 시작했기에 전선에서 포화를 주고받는 동시에 공장을 짓고 있어야 했다.
나치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1944~45년쯤 Z계획을 통해 함대를 재건하고 재무장을 완료한 이후에나 전쟁이 벌어져야 했지만 국제적 상황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또, 독일은 전통적인 ‘마이스터’ 장인 문화로 인해 대량생산에 어울리지 않는 생산체계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인력의 부족으로 이 숙련공들마저 징집당해 전선으로 끌려갔기에 생산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
아무르 강변에는 조국의 감시병이 있다
윗대가리들은 이 위에 각종 정치적, 개인적 이유로 소품종 대량 생산이 아닌 끊임없는 개량안을 요구했으며 이 역시 총력전―대량생산에 걸림돌이 되었다.
세 명의 전차병, 세 명의 즐거운 전우들이 전차에 타고 있다
세 명의 전차병, 세 명의 즐거운 전우들이 전차에 타고 있다>
이걸 제동을 걸었어야 할 군부의 고위 장성들은 전략적, 정치적 마인드를 결여하고 있었고 ‘전쟁’에 대해서는 이들보다 조금 나았던 히틀러도 망상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소련군의 군종별로 상징하는 군가를 꼽으라면, 기갑부대의 대표 군가는 단연 <세 전차병>이었다.
전선에서 검증된바, 한 대의 명품 전차보다는 열 대의 범상한 수준의 전차를 전선에 배치하는 게 훨씬 나았다.
군악대와 합창단이 군가를 합창하는 가운데 수백 대의 T―34/85 전차들이 모스크바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지난 퍼레이드처럼 삐까뻔쩍하게 광을 낸 전차들이 아니라, 이번에는 적의 포탄을 맞아 패이고 그슬린 흔적이 있는 전차들이었다.
가끔 최고의 숙련도를 갖추고 티거나 판터같이 강력한 전차를 탄 전차병들은 10대 1 이상의 전과를 국지적으로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없는 곳에서는 구멍이 뻥뻥 뚫려 버렸다. 나치의 위엄 넘치는 중전차들은 중과부적으로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결사 항전을 하다 파괴되고 유기되어야 했다.
“전차부대 장병들의 용전분투를 인민의 이름으로 치하하오!”
“우라! 우라! 우라!”
그나마 독일군이 진격하며 발생한 손실이었다면 이렇게 유기된 전차는 다시 회수되어 수리해 전선에 재배치될 수도 있었겠지만 후퇴 와중에 벌어진 손실은 최종적으로 완전손실로 이어졌고, 독일군은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손실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다.
코네프가 지휘하는 북부집단군에 소속되어 있던 전차부대들은 이제 공세가 멈춘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와 퍼레이드를 벌였다.
내 왼쪽에는 이제 원수로 승진할 바실렙스키와 코네프가 한껏 기대에 들뜬 채 가슴을 펴고 곧이어 이어질 원수 계급장 수여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실렙스키 동지 만세>, <코네프 동지를 위하여 전진> 같은 구호를 건 플래카드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붉은 광장을 가득 메운 인민들은 이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내 오른편에 서 있는 샤포슈니코프였다. 오랜 군 생활을 마치고 비로소 야인으로 돌아가는 그를 축하하기 위해 볼셰비키당과 군부의 이름있는 인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노원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어렸다.
“조국과 당을 위한 오랜 헌신을 마치고 이제 인생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내 축사와 샤포슈니코프의 고별 연설이 끝나고, 두 명의 새로운 원수가 탄생하는 자리까지. 인민들에게 우리가 이만큼이나 괜찮은 상황이라고 보여 주려면 행사는 최대한 화려해야 했다. 군부의 사기도 올릴 겸, 선전도 할 겸 겸사겸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이제 누군가가 무사히 은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 * *
“코바… 이젠 내 죽음을 필요로 하나?”
스탈린의 최고 심복인 보로실로프마저 본인이 숙청당할 거라고 두려워했다. 부됸늬는 예전에 숙청당할 뻔한 기억 때문인지 내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이번에 새로 원수가 되는 바실렙스키와 코네프를 빼면 기존 원수는 아홉 명. 그중 넷은 처형당했고, 한 명은 처형당할 뻔했다. 지금 와서 독일에 이간계를 쓰려 하니 어쩐지 내 뒷목도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보여 주었다. 인민을 위해 충실하게 일한 자는 명예로이 물러날 수 있노라고.
너희들도 충성을 바치면 우리는 명예로 보답하리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샤포슈니코프는 감동한 것 같았다. 코네프에게 원수 계급장을 달아 주고 나서는 왈칵 울음이 나왔는지 계속 훌쩍거렸다.
다른 장군들 역시 계속 박수를 치며 그에게 덕담을 건넸다.
“원수 동지, 항상 건강하십시오.”
“언제든 다시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원수 각하와 함께한 시간이 새록새록 기억납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왔는지요.”
샤포슈니코프는 모여든 사람들과 정답게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다. 워낙 인망이 있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베리야가 눈을 빛낼 만큼. 그는 면밀히 사람들을 지켜보며 혹시나 샤포슈니코프가 반역음모의 핵심으로 떠오르지 않을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찰기관의 수장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베리야인 만큼 오히려 저런 태도가 더 의심스러웠다.
‘베리야를 숙청해야 하나….’
이번 공작에 있어서도 베리야가 없었다면 아마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독일 군부 내 얽히고설킨 친분 관계와 인맥을 샅샅이 파악해 내고 ‘작업’을 칠 사람을 선정해 내는 한편 프라하 내의 저항조직과 접선해 하이드리히 암살을 위한 밑밥을 깔았다.
독일측의 카운터파트라고 할 수 있는 힘러나 카나리스에 비하면 베리야는 지극히 유능했다. 유능해서 더 무서웠다만.
베리야에게서 눈길을 돌리자, 샤포슈니코프 주위에 바글바글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한 사람. 굉장히 어색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악수를 하고는 새로 원수로 임명된 바실렙스키와 코네프에게 덕담을 건네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체 날 여기에 왜 데려온 거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그런 표정이 대놓고 보이는 것이 꽤… 솔직히 웃겼다.
“오래 기다리게 했소. 월리스 동… 아니 부통령!”
“반갑습니다 서기장님!”
루즈벨트의 건강이 악화되었기에 우리는 굳이 ‘고위급 회담’을 위해 부통령을 초청했다. 미국에서 부통령은 명예직에 가깝다지만, 월리스는 역사상 최고의 실세 부통령이었고 소련에 친화적이기도 했다.
여기에 농업장관, 무역장관을 역임해 관료로서의 역량도 가지고 있었고, 부통령 경선에서 민주당 보수파 중진들에게 밀려난 이후에도 루즈벨트에게 무역장관으로 지명받을 만큼 그의 충실한 심복이었다.
우리 소련으로서는 반드시 친해져야 할 사람이었다.
“또, 우리 소련의 소중한 인재, 샤포슈니코프 원수의 퇴임식에 참여해 자리를 빛내 주어 고맙습니다. 날씨가 추운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신 점, 그와 저 모두 감동했습니다.”
“하하하하, 함께 피 흘리는 전우의 일에 어찌 빠질 수 있겠습니까? 미합중국은 소련을 최고의 전우로 생각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트루먼이 있었다면 잡소리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트루먼은 아직 일개 상원의원이었고, 사실 부통령 지명 때까지만 해도 중진들이 꼭두각시라고 생각해 올려 둔 수준의 인물이었다.
이 화기애애함은 언젠간 사라지겠지. 전쟁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이 세상을 양분하게 되면 끊임없이 으르렁거리게 되겠지만 지금은 이 기회를 활용해야 했다.
“먼저 약소한 선물 하나를 주고 싶습니다.”
“하하, 공직자는 그런 것을 받으면 안 됩니다. 서기장 동지. 마음만은 감사하지만….”
“허허허, 그런 선물은 아닙니다.”
내가 서류 몇 장을 내밀자 월리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잘생겼지만 냉혹한 젊은 남자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서류에 박혀 있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이 자는….”
“체코 총독이지요. 나치의 제국보안본부(SD)장이자 경찰 상급대장이자 뭐 아무튼 그런 으리으리한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입니다.”
“으음, 저는 이런 자는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월리스의 얼굴에는 짙은 혐오감이 드러났다. 대체 이런 걸 왜 보여 주는 것인가? 그는 생각하는 듯했다.
“그자의 시체라면 어떻습니까?”
“예?”
“우리 소련은 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사살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한다면 공은 ‘미국과 소련 간의 협력을 주도한’ 월리스 부통령, 바로 당신이 가져가게 될 것이고요. 이것이 우리 소련이 준비한 선물입니다.”
“이러시는 의도를 잘 모르겠군요. 서기장 동지. 이것이 무슨….”
이제는 당혹한 듯했다.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두 나라에는 양국의 협력을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 사악한 파시스트들에게 함께 맞서 싸우면서도 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단 말입니까? 위대한 두 나라가 힘을 합치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은데요!”
“….”
“이것은 단지 예시일 뿐입니다. 하지만 좋은 선례이기도 하지요. 소련과 미국이 협력하여 나치를 처단할 수 있다. 전 세계의 파시스트들이여, 긴장하라!”
한참이나 굳은 얼굴로 고심하던 월리스는 ‘선물’을 받아 들었다. 아직 50대 중반으로 정치인으로선 충분히 젊은 만큼 앞으로의 커리어 생각도 났을 것이다.
맥아더 같은 자가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올 때, 전쟁에 단 하나도 기여한 것이 없다면 조금은 꿀릴 테니.
뭐, 우리에게도 이 조치는 필요한 일이었다.
“연계될 작전을 위해서는 우리가 독일 내에서 공작을 벌인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베리야는 내 의견에 동의를 표하며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하이드리히를 죽이는 것은 언론에 보여 주기 위한 쾌거일 수는 있어도, 동부전선에서 발생할 희생을 줄이는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보기 좋은 개살구 정도는 미국에 던져 주고 실리를 취하는 게 훨씬 낫다. 막말로, 상급대장 하이드리히 따위가 대마인가?
진짜 대마들이 따로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