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히틀러가 진짜 히틀러가 아니라 미래인, 혹은 미래 지식을 알고 있다면… 그 역시 약점이 될 수 있었다.
마치 내가 백린탄 사용에 잠시 주저한 것처럼.
만약 미래인이 히틀러가 되었다고 하자. 그의 승리와 패배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제일 무서운 게 뭘까?
“자네들은 히틀러가 뭘 제일 무서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예? 음….”
“우리 소련의 막강한 붉은 군대가 아니겠습니까?”
몰로토프는 주저했고, 베리야는 주저 없이 아첨했다. 둘 다 틀렸어.
“붉은 군대는… 한 2등에서 3등쯤 될 것 같은데? 히틀러가 안전히 웅거하고 있는 베를린에서 붉은 군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충분히 가까워졌다면 모를까….”
“설마… ‘그 폭탄’입니까?”
“그래. 하지만 그건 아직 없지.”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베리야와 몰로토프가 골똘히 고민하는 것을 보는 것은 꽤 재미있었지만 너무 뜸을 들인 것 같았다.
“군대. 군대 아니겠나?”
“방금 붉은 군대는 아니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붉은 군대 말고, 이 사람아. 자기네들 군대 말이야!”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부터의 빛나는 전통을 가진 독일군. 그들은 막강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보헤미아의 상병’ 나부랭이에게 끊임없이 반기를 들었다.
당장 히틀러를 실제로 죽일 뻔했던 것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육군 대령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작전명 발키리>로 히틀러를 거의 폭사시킬 뻔했다.
이름에 폰 자가 들어가는 동프로이센 융커들은 하찮은 평민들이나 돌격대, 친위대 따위의 잡것들을 용납하지 못했다.
이들도 독일 우월주의에 물들어 있기는 했기에 나치당이 승리할 때는 붙어먹을 수 있었지만,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하자 등을 돌린 것이다.
물론 육군에 친나치 세력도 있었다. 대대적인 군비 확장 속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여 쾌속 승진한 평민 장교들은 융커들을 싫어했고, 그 반동으로 나치들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모델이나 롬멜 같은 평민 출신들이 그랬다.
만슈타인이나 라이헤나우 같은 귀족 출신들 중에서도 나치당에 협력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국방군 주류는 히틀러와 나치를 혐오했고, 실제 역사에서나 여기서나 히틀러는 군의 주도권을 놓고 이들과 싸워야 했다.
“총구를 쥔 놈들이 정권에 불만을 품었다는 게 권력자에게 얼마나… 뒤통수가 가려운 일인지. 자네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흐흐흐, 아무렴요. 지극히 맞는 말이십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이런 점에 있어서는 철저한 거울쌍이나 다름없었다.
스탈린은 군부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반대파뿐만 아니라, 자기 파벌에서 향후 분란의 소지가 있을 만한 사람들까지 모두.
스탈린은 초기 5원수 중 하나이자 국방차관으로 급진적인 기계화를 주장하며 국가의 산업 분야에 간섭하려 했던 투하쳅스키를 숙청했다. 그와 함께 친트로츠키파 장교들을 싹 날려 버렸다.
소비에트 초창기 5원수 중 극동의 황태자였던 블류헤르를 처형했고, 스탈린 파벌의 거물이었던 예고로프도 ‘분란 조장’ 혐의로 투옥해서 고문사시켰다. 최고의 기병대장인 부됸늬 역시 스탈린에게 직접 빌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5원수 중 남은 것은 스탈린의 정치적 동맹자이자 전략전술에서는 철저히 무능했던 보로실로프뿐이었다. 이런 피바람 속에서 스탈린은 반항적인 군부를 길들여 버릴 수 있었다.
“히틀러… 저 친구는 실책을 저질렀지. 제 손에 들어온 무력을 제 손으로 쳐내 버리다니? 숙청에 있어서는 과감하고 멋지게 해냈지만, 숙청해 버린 대상이 잘못됐어!”
“돌격대 숙청 말이십니까?”
“그래! 군부가 덤비면 군부의 모가지를 쳐 버려야지. 왜 충성스러운 무력집단을 날려 버린단 말인가?”
히틀러는 반대로 군부와 중산계급의 반발에 직면하여 돌격대를 해산시켜 버렸다. 돌격대 역시 히틀러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집단은 아니었고, 향후 친위대를 창설하기는 했지만 군부는 끊임없이 사소한 반항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가서는 히틀러를 암살해 버리고 자기네들이 정권을 차지하려 할 정도로.
“우리가 저놈들한테 신사협정을 제시하면 저놈들이 그걸 받아먹기는 하겠나? 개뿔이! 저 개만도 못한 살인마 새끼들한테 신사도가 무엇인지 설파해 봐야 무슨 쓸모가 있겠나?”
“그렇다면 서기장 동지의 의도는….”
“가서 보고 오게. 그리고 분란의 씨앗을 뿌리는 것일세! 마치 군부 인물들이 자네들 통해서 우리와 내통하는 것 같은 상황을 히틀러에게 보여 주는 거지!”
“저는 그럼 뒷공작을 펼쳐야겠군요. 저들이 진짜로 히틀러에게 반기를 드는 것처럼 조작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저쪽 방첩국 놈들이 히틀러를 싫어한단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웃기는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프베어(Abwehr), 국방군 방첩국은 첩보활동을 막으라고 설치된 주제에 자기네들이 정보를 팔아넘겼다.
아프베어 국장 해군중장 빌헬름 카나리스, 그리고 부국장 육군소장 한스 오스터. 이 두 수뇌부터가 반히틀러 음모에 깊이 관여해 있었다. 한스 오스터는 38년 히틀러 암살음모의 배후에 있었고, 유태인들을 빼내다 43년 체포당했다.
빌헬름 카나리스는 위에서 언급한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음모 이후에 발생한 숙군에 걸려 들어갔다. 여기서 아프베어가 연합국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났고, 한스 오스터 등 다른 아프베어의 내통자들과 함께 45년에 처형당했다.
여기서도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히틀러가 프랑스와 영국을 너무 쉽게 평정하면서 국방군 내부 불만세력들이 감히 끽소리도 못한 것은 있었지만….
그 대신 동부전선이 붕괴하고 있었다.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먼저 몰로토프 자네가 한번 보고 오게나. 독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독일군 장성들하고 괜히 사담도 좀 해 보고, 의미심장한 헛소리도 좀 흘려 보고. 평화가 얼마나 좋냐고 저들에게 마구 떠들면서 어?”
“예, 서기장 동지.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사실 내 의도는 이게 아니었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어 명령을 내렸다.
진짜 의도는… 히틀러가 정말 ‘다른 누구’인지 보고 오는 것이었다.
내가 스탈린의 몸에 들어온 것처럼 히틀러 역시 다른 누가 되었다면 분명히 뭔가가 달라져 있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히틀러가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도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저지르는 짓들이 너무 20세기스러워서.
실제로 히틀러를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 때문에 만나본 적 있는 몰로토프라면 어느 정도 눈치챌 수도 있을 것이고. 신사협정 따위는 그저 몰로토프를 독일에 보내는 핑계나 다름없었다.
괜히 다른 사유를 붙였다가 바다 저편에서 이쪽을 주의 깊게 보고 있을 미국이 의심하면 골치 아파지니….
“베리야 자네는 공작을 좀 해 주어야겠네. 이미 뭘 해야 할지는 자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만….”
“예! 멋지게 한번 해 보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한 가지만 더 해 주어야겠어. 누굴 좀 암살해야겠는데 말이야?”
“암살 말씀이십니까?”
나는 내 앞에 놓인 종이에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나갔다. 군부와 정계, 그리고 방첩국 등에서 우리와 엮어 버릴 자들, 그리고 죽여 버려야 할 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이 자는 그 체코 총독이 아닙니까 서기장 동지?”
“호오, 알고 있구만? 할 수 있겠나?”
“서기장 동지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해내겠습니다!”
베리야는 이런 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시키면 될지 안 될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무조건 해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어지간한 것은 다 성공했고.
아마 베리야가 초창기에 스탈린의 신임을 산 것도 이런 유능함과 충성심? 이 합쳐져서였을 것이다. 스탈린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나무가 보기 싫다고 했더니 손으로 땅을 파헤치면서 다 파내 버리겠다고 했다나?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하이드리히는 암살당했다. 영국 정부가 지원하는 체코 망명정부의 요원들은 프라하에서 하이드리히를 죽여 버리는 데 성공했었다. 지금은 영국 정부가 망명정부가 되었고, 체코 망명정부는 망명망명정부… 인가.
“아 그리고 몰로토프, 하나 더 시킬 것이 있네.”
“말씀만 하십시오 서기장 동지!”
“미국인들하고 이야기를 좀 하고 싶네. 샤포슈니코프 원수의 퇴임식에 맞추어 미국인들더러 한번 방문해 주십사 말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예. 미국인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나 미국인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 큰일이다. 인도주의라는 허울은 이럴 때 덮어씌우기 참 좋은 위장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이 독일하고 협상을 한다고 하면 뒤통수를 때리고 빠질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안이 지뢰나 백린탄 같은 걸 쓰지 말자고 협상하는 거라면 계속 전쟁할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사실 지뢰를 좀 안 썼으면 하기는 한다. 작금의 전장은 소련 영토 내였고, 영토 내에 수백만 개의 지뢰를 파묻는 것은 전쟁 후를 생각해서라도 좋지 못했다. 한국처럼 DMZ 같은 민간인 출입 금지 지역에다 파묻는 것도 아니고, 멀쩡하게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곳인데?
“기왕이면 그 우리를 좋아하는 부통령 있잖는가? 월리스? 그 사람이 오면 좋겠네. 얼굴 보고 악수도 좀 하고 뭐 성과를 들려서 보내 주면 향후 정치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맞습니다, 서기장 동지.”
어째 성의 없는 동의 같은데? 이것도 미래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인가….
FDR은 네 번의 대통령 선거 동안 세 명의 부통령 후보와 함께했다. 재선까지는 친독파, 불간섭주의자로 유명했던 존 낸스 가너. 이번 세 번째 임기에는 친소파이자 진보주의자로 유명했던 헨리 월리스, 그리고 다음 45년의 선거에는 우리도 잘 아는 트루먼.
현 부통령인 월리스는 그의 진보주의적 정책을 싫어하는 민주당 중진들의 뒷공작에 휘말려 결국 부통령 경선에서 1위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3위인 트루먼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FDR의 건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기에 다음 부통령을 누구로 하느냐가 향후 미국 대통령을 결정할 수 있었다. 반소 강경파인 트루먼 대신 친소 유화파인 월리스를 그 자리에 앉히면… 소련 입장에서는 대박이나 다름없고.
지금도 미국 역사상 최고 실세 부통령이나 다름없는데 여기에 소련과의 외교에서 막대한 공적을 세운다면 다음 대선에도 무난하게 부통령 자리는 가능하지 않을까?
“대중에게 보여 주기 좋은 게 뭐가 있겠나? 베리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는 정치에는 문외한이지만….”
어디서 발뺌을 하려고…. 베리야만큼 정치에 관심 많은 사람도 몇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통통한 뺨을 씰룩거리던 그는 순간 눈을 빛냈다.
“명령하신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그와 미국인들의 공으로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호오, 그런 방법이 있었군?”
“예 서기장 동지. 그 부통령이라는 자의 주도하에 소련과 미국이 협력해서 이뤄낸 쾌거! 이렇게 포장해서 선전하는 것입니다. 친소 용공분자라고 모함했는데 협력을 통해 업적을 세웠다면 상당히 선전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제 짧은 소견이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온 김에 선물 보따리 하나 안겨 주며, 겸사겸사 대중한테 보여 줄 번쩍번쩍한 것도 얹어 주는 것이다.
“좋네! 그대로 추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