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스탈린의 어록에서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전쟁의 본질을 꽤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저들보다 50년에서 100년 가까이 뒤처져 있소. 이 격차를 10년 안에 따라잡지 못하면 우리는 짓밟힐 것이오.>
<탄약을 조금만 사용한다면 더 많은 병력을 희생해야 하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네. 병사를 아끼면서 총포탄을 더 많이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총포탄을 아끼면서 병사를 더 많이 희생시킬 것인지.>
<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
스탈린에게 전쟁은 본질적으로 국력과 국력의 싸움이었다.
더 많은 자원을 더 효과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국가는 승리했고 그렇지 못한 국가는 패배했다.
1차 세계대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은 국가 체제 내부의 균열로 인해 결국 전장에 사회갈등을 봉합할 자원을 쏟아붓다 몰락해 버렸다. 반대로 해석하면 사회갈등을 봉합하는 데 자원이 많이 들어 투사할 수 있는 자원이 적었다고 해도 좋았다.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국력은 더 높았을지언정 식민지에 집착하느라 본토의 전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 역시 독일에 패배해 버렸다. 식민지로 인해 총생산력이나 산출은 컸을지 몰라도, 그 비대한 체구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자원이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소수민족이 정권에 반기를 드는 것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갈등을 짓눌러야 했고, 그의 눈에는 민족주의자들의 갈망은 그저 분란의 소지였기에.
그 스스로가 한때는 그루지야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종류의 반항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렇게 갈등을 찍어누른 이후, 모든 잉여 자원은 국력―생산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는 산업 분야인 중공업에 투자되었다.
<10년 안에 따라잡지 못하면 우리는 몰락한다>
이 말은 정확히 1931년에 스탈린이 한 말이었다. 그리고 1941년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고.
그야말로 예언과도 같은 이 통찰하에 스탈린은 중공업화를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이렇게 만들어 낸 생산력으로 전 서유럽을 틀어쥔 독일과 건곤일척의 대승부를 벌여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두 번째 어록. 포탄이냐 병사의 목숨이냐 역시 총력전에 대한 스탈린의 통찰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전쟁은 생산력의 싸움이다. 동시에 적의 생산력을 얼마나 깎아 먹느냐도 중요했다. 제한된 생산력과 ‘자원 소모’(인적 자원을 포함하여!)를 감안할 때, 미래의 생산인구이자 노동력인 병사들을 갈아 넣는 것보다는 대포를 쏘는 게 더 좋았다.
아마 그래서 세 번째 어록이 나온 것이 아닐까? 포병은 이 시대에 가장 효율적으로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수단이었다. 저 대원칙하에 소련군은 포병 전력을 막대하게 증강하는 데 성공했다.
“작년 6월부터 12월 말까지 박격포는 총 14만 문이 생산되었습니다.”
“좋소, 좋소! 자 모두 박수!”
대규모 병력 증강과 무기의 증산과정에서 박격포는 제일 쉽고 빠르게 증산할 수 있는 포병 전력이었다. 익숙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도 짧고, 이것마저 없으면 딸랑 소총만 들고 독일군에게 돌격해야 할 소총병들에게 뭐라도 더 쥐여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소련은 박격포를 마구 찍어냈고, 단 6개월 만에 14만 문의 박격포를 생산했다.
5만 문가량이 초기에 배치되어 있던 것을 생각하면 거의 가지고 있던 양의 3배나 생산한 것이다. 물론 그중 많은 물량이 82mm였고, 120mm는 제반 조건이 열악하여 그다지 많이 배치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병사들은 82mm 박격포가 대량배치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했다.
박격포 생산을 담당했던 부서의 대표책임자는 쏟아지는 박수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올해, 1942년의 박격포 생산에서는 소총병이 직접 들고 다닐 수 있는 82mm급이나 그 이하의 소형박격포보다 본격적인 화력 지원이 가능한 120mm급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오. 우리는 이제 충분히 많은 양의 트럭과 트랙터들을 가지고 있지. 좋은 친구 루즈벨트 씨 덕분에. 하하하하!”
82mm급이 괴롭겠지만 운반이 가능한 크기의 12~14kg 정도였다면 120mm는 전투중량 280kg의 무식하게 무거운 물건이었다.
당연히 운송 수단을 배치해 주어야 했고, 미국의 렌드리스로 들어온 트럭들은 엄청난 도움이 됐다. 트럭이나 경전차, 트랙터들은 직접 박격포를 끌고 다니기도 했고, 개조해서 박격포 발사 차량으로 아예 전용시키기도 했다.
아직은 차량이 부족했기에 대부분 2문 이상의 박격포를 용접해 붙이거나 대공기관총도 싣고 다니는 형태였지만 이만해도 일선에서는 대호평이 돌아왔다. 뭐든 일단 더 주면 좋고, 직접 보병이 끌고 다녀야 한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니까.
“76.2mm 평사포는 총 1만 500문이 새로 배치되었으며 이는 T―70 차체를 이용하여 자주화된 수량을 포함한 숫자입니다. 자주화된 SU―76은 2천 2백 문이 새로….”
“T―70의 개조에는 어려움이 없었소?”
“예, 서기장 동지. 처음에는 엔진 구조의 잘못된 설계 때문에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으나 이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으음, 알겠소. 76.2mm 포는 이제 전차포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바, 기존 생산라인을 통일하여 자주포의 생산에 만전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하시오.”
T―34/76은 이제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 그 자리는 85mm로 업건된 T―34/85들이 채우고 있고, 요녀석들로도 부족한 중전차가 등장한다면 그건 부됸늬 중전차가 책임져야 할 일. 아니면 다굴빵을 놓아서 잡던가.
76.2mm 야포는 실제 역사에서 소련군의 대전차포, 보병포 역할을 했다.
일선의 적 화력에 노출되어 가며 낑낑대며 포를 끌고 쏴 대다가 손실율도 엄청나게 높았고, 싸게 생산하려고 자주화 과정에서 기본적인 체급이 딸리는 T―70 차체를 썼는데 이게 패착이 되었다.
워낙 엔진 출력이 낮아 장갑을 씌울 수가 없는데, 그 탓에 일선 보병들의 화염병에도 불이 붙어 터질 수가 있을 정도로 취약한 물건이었다. 어쨌건, 이제 더 이상 76mm로 대전차전 할 일 없으니 보병 화력지원용으로만 열심히 쓰면 상대적으로 낫기는 할 것이다.
122mm와 152mm 곡사포 역시 열심히 생산되고 있었다. 후방에서 교육용으로 천 단위가 돌려진 걸 보면 진짜 불곰국의 기상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적당히 치하하거나 꾸짖고, 또 적당히 지시를 내리고. 어느 순간에는 살짝 정줄을 놓고 끄덕거리면서 몸이 자동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스탈린인가… 스탈린이 나인가?
“……그리고 백린 연막탄의 생산에선….”
“뭐, 잠깐만. 백린탄?”
“예.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우리 백린탄도 쓰고 있었나?”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참석자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백린탄을 썼다고? 그거 금지된 게… 아니었구나. 참석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금지는 안 된 것 같았다. 내 기억으로는 제네바 의정서에서 금지됐는데 그게 2차대전 때는 없었나? 허, 이거 참….
“아니, 우리 독가스는 못 쓰게 되어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제네바 의정서에서 독가스와 생물학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만… 이미 파시스트들은 이 협약을 어기고 아비시니아와 중국에서 독가스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백린탄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하이고… 빌어먹을 일본 새끼들. 진짜 더러운 짓은 혼자 다 해요.
독소전에서 독일은 운송수단 문제 때문이라고는 해도 대놓고 독가스를 쓰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수만 마리의 말을 운송을 위해 투자했는데, 소련군이 독일군의 독가스에 대응해 마찬가지로 독가스를 쓰면 병사들은 몰라도 말은 떼죽음을 당할 게 뻔했으니. 그 대신 동유럽 유태인들 죽이는데 썼을 뿐.
막대한 화학물질 생산능력을 가진 소련과 그걸로 맞다이를 까면 자기네들이 더 손해 보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가, 아니면 실제로 한계가 있어서 그런가….
이 세계의 상또라이 히틀러라면 쓸 법도 하다만. 당장 독일 폭격기가 우리 도시들에 날아와 독가스를 떨어트려도 독일 민간인들에게 동해보복을 가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었다. 스몰렌스크와 프스코프, 런던을 불태우고 리버풀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른 주제에 독가스를 쓸 배짱이 없다는 것도 우스웠다.
아무튼 아직 쓰이지 않는 독가스는 그렇다 치자.
“백린탄을 어디어디에 쓰고 있지?”
“대전차 수류탄이나 야포탄, 박격포탄, 항공폭탄에 로켓포탄, 그리고 전차용 연막탄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박격포탄의 20%가량이 백린탄이기도 합니다, 서기장 동지.”
소이용도에 민간인 살상능력, 그리고 더러운 뒤끝까지. 적의 사기를 꺾고 피해를 입히고 의료자원까지 소모시키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백린은 몸에 붙으면 아예 파고들며 타오르기에 일반적인 화상보다 흉악했다. 산화되어 생기는 가스도 독성이 있었고.
어쩐지 괴리감이 느껴졌다. 이 시대 사람들도 충분히 많은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테지만 생각하는 방향은 사뭇 달랐다. 으음. 이게 어쩌면 내 약점이 될지도 몰랐다.
21세기는 물론 충분히 잔혹하고 폭력적인 시대였다. 하지만 광기로 넘쳐나는 20세기보다는 훨씬 온건했다. 스탈린의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21세기 사람인 나로서는 핵폭탄, 백린탄, 독가스 같은 ‘잔인한’ 수단에 거부감을 품고 있었다.
‘미래인의 한계인가…?’
어쩌면 이것은 미래인의 한계일 지도 몰랐다. 후대의 관점으로 바라보았기에 이 시대의 상황에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과도하게 비판하는.
백린탄이나 독가스뿐만 아니라 베리야 같은 사례도 있었다. 스탈린이 죽고 난 미래에서 그가 ‘배신’했다고 지금 베리야를 의심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워낙 잔인하고 흉악한 인간으로 유명해서 그런가?
미래를 안다면 사람을 보는 시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음…?”
그리고 어쩌면,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닐지도 몰랐다.
“오늘은 이만하지. 몰로토프, 베리야, 자네들만 남아 보게.”
파이프. 그렇게 말하자 경호원은 내가 요새 애용하는 해포석 파이프를 빠르게 꺼내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사람들은 뜬금없는 내 변덕에 의아함을 표하며 후다닥 도망쳐 나갔고, 몰로토프와 베리야는 대체 자기들은 왜 불렀는지 갸우뚱하며 옆의 의자에 와서 앉았다.
담뱃잎을 재고, 성냥 한 개비를 꺼냈다.
“자네들도 피우겠나?”
둘 모두 정중히 사양했기에 성냥을 휙 그어 불을 붙였다.
흡, 흡, 몇 번 빨아들이자 구수하고 향긋한 담배 연기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떨이에 성냥을 던져 버리고 경호원에게 손짓하자 경호원들 역시 잽싸게 퇴장해 버렸다. 덩치들은 산만한데 행동은 진짜 빠르단 말이야.
“…고생 좀 해 줄 수 있겠나.”
“서기장 동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반응도 빠르다.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말하는 거냐, 아님 그냥 살아남기 위한 본능인 거냐? 뭘 맡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 다 큰 어른이 말이야.
“파쇼 놈들에게 다녀오게. ‘신사협정’을 제안해 보도록 하지.”
“예?”
“독가스, 백린탄, 대인지뢰, 생물학 무기, 다 쓰지 말자고.”
“??!?!”
몰로토프의 표정은 그야말로 이랬다. 서기장이 돌았나? 베리야도 표정이 괴상하게 변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수작을 부리려는 음모가의 웃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