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86화
“참… 명장도 한철이구만. 안 그런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뜬금없이 던진 내 코멘트에 장군들은 싹 얼어붙었다. 어쩐지 이런 식으로 남들이 긴장하고 빠릿빠릿한 반응을 하는 것을 보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
“아니, 동장군 말일세. 솔직히 자네들 중 그 누구보다도 외적을 많이 물리친 분 아니신가?”
“아! 하하하하, 서기장 동지는 유머 감각도 뛰어나십니다.”
“하하하하하! 제 배꼽!”
유난히도 혹독했던 41년의 겨울은 이제 막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원래 러시아의 겨울은 춥고 혹독하기로 유명했지만, 1941년 겨울은 평년보다도 몇 도 이상 기온이 낮았다고 한다. 후대의 관측에 따르면 20세기 중 가장 추웠다나?
독일군은 프랑스와 영국 육군을 단 6주 만에 갈아 버린 것에 취해 소련 역시 와장창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0주면 형편없이 약해져 있는 소련군은 벌벌 떨며 항복할 것이다!>
전 독일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근거 없는 자신감에 기반해 방한 장비들도 충분히 생산하지 않았고. 실제로 전쟁이 길어질 것 같은 상황이 되니 다른 필수물자를 공급하기도 어려워 독일군 수십만이 얼어 죽어 버렸다.
반면 소련은 39―40년의 겨울전쟁에서 핀란드에게 탈탈 털려본 이후 방한장구 생산을 어느 정도 해 둔 상태라 독일만큼 추위에 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스스로 생산한 것에 더해 미국이라는 거대한 물주는 두툼한 장갑과 양말, 털 달린 따뜻한 군화, 아늑한 군용 코트 등을 수백만 벌씩 보내 주었고, 병사들은 ‘좋은 친구 미국인들’이 가져다준 물건으로 추운 겨울을 버텨 냈다.
“실로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정보부의 조사에 따르면 추축군이 입은 손실은 거의 100만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인가? 허허허허허!”
군부의 장성들과 라이벌 관계인 베리야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이 가져온 정보를 풀어놓았다. 어떻게든 군부의 공적을 깎아 먹고 싶어 하는 그 음습한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텐가? 사실은 사실인데.
“이제 다시 라스푸티차의 시기가 오고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겠지만, 그 시점이 지나면 저들의 반격이 시작될 거요. 기상을 분석한 결과 대략 4월 즈음? 5월 중순부터는 땅이 완전히 굳어질 거라고 하네.”
“예! 서기장 동지!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 * *
북극으로부터 몰아쳐 오는 눈폭풍의 기세가 잠잠해졌다는 것은 한뎃잠을 자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일견 좋아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공습이다! 공습!”
“제기랄! 대공포! 대공포 사수 총원 위치로!”
험악한 기상조건 때문에 제대로 뜨지 못하던 독일 공군의 활동은 날씨가 풀리자 점점 활발해졌다. 아직까지 소련 공군은 숙련도나 기체의 성능에서나 압도적인 열세에 있는바, 루프트바페는 러시아의 하늘에서 마지막으로 주어진 한철을 즐기고 다녔다.
투타타타타타! 쾅!
독일의 Bf109가 필사적으로 선회전을 펼치던 소련 MiG―1의 캐노피를 기관총으로 긁어 버렸다. 조종석이 납탄의 세례에 난자당하는 상황에서 조종사가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미그기는 결국 고꾸라져 지면에 들이박혀 폭발하고 말았다.
“씨발… 슈투카다!”
휘이이이이이익! 빼애애애애액!
그렇게 비어 버린 하늘에서 강철 맹금이 급강하해 허둥지둥 피신하는 병사들을 덮쳤다. 병사들은 각기 기관총을 들고 쏴 대거나, 정 안되면 소총이라도 타타탕 쏘아 댔지만 소구경 탄환은 비행기에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소구경 탄환’은.
쾅! 쾅! 쾅! 순식간에 반격 태세로 들어간 소련군 대공포대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독일 항공기들이 혼비백산할 차례였다. 신형 100mm 대공포는 위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치치치치칙…. ]
“한스? 한스! 제기랄! ‘그 대공포’다!”
방금까지 잘만 통신을 주고받던 동료 파일럿의 통신이 끊기자 편대장은 이를 악물었다. 저 신형 대구경 대공포에 적중당하면 웬만한 소형 항공기들은 문자 그대로 분해당했다. 저쪽에서 화려하게 파편을 날리며 파괴당한 슈투카가 바로 그의 편대원인 것 같았다.
“씨발, 이런 데에 왜 이렇게 대공기관총이 많아? 정보국 새끼들 일 안 하나?”
[나도 맞았다! 기지로 돌아가겠다!]
순식간에 소련군 기지에서는 중대구경 기관총들의 포화가 거꾸로 빗발치기 시작했다. 경전차를 개수해 중기관총 4정을 달아 놓고 고각사격을 가능케 한 대공전투차량들이 몰려나와 마구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긁어 댄 것이다.
하나하나, 치명적인 부분에 손상을 입은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비명 같은 고함을 무전망에 질러 대기 시작했다.
[엔진 피격! 기체 속력을 유지할 수가 없다!]
[아으아아악! 피가 난다!]
“제기랄, 돌아가라! 돌아가!”
에이스 편대장으로서 그 자신은 간신히 소련군의 집중포화를 피해 냈지만,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쉬운 먹잇감’이어야 할 전차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보인다 하더라도 대공포나 기관총에 쫓겨 제대로 조준하고 쏴 버릴 수가 없었다.
슈투카가 장착한 3,7cm 기관포는 T―34의 상면장갑을 관통해 격파하는 데 충분했지만 먹잇감은 없고 사냥꾼들만 득실댔다.
[북동동 방향에서… 적기로 추정되는 편대 접근 중!]
“뭐? 엿 됐군….”
그나마 소련군 전투기들을 격추했다는 데 위안을 삼아야 했다.
지난여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 해도 저들은 여전히 허접한 초짜들이었다. 목재 캔버스 비행기들을 무더기로 몰고 와서 학살당하던 시절을 견뎌내고 성장한 몇몇은 놀라울 정도의 실력을 보여 주기는 했다만.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기체 성능에도 불구하고 루프트바페가 거두는 전과는 점점 줄어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열등인종들도 독일의 것에 준하는 항공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양키 새끼들과 붙어먹고 있으니.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독일 공군이 써온 전략 자체가 무너진다.
편대장은 지상에 처박혀 뭉게뭉게 연기를 피워 올리는 소련기를 한 번 더, 기관총으로 확인사살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 새끼가 혹시 살았다면, 나중에 성장해 뭐가 될지 모르니….’
지상에 떨어졌다면 적이라도 공격하지 않는 것이 하늘의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더 이상 그럴 여유가 없었다.
소련 파일럿들은 너무 많았다. 그들 중 행운이 따르고, 재능 있는 자들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그래서 그자들이 에이스로 성장해 독일인들을 학살하기 전에 싹부터 밟아 놓아야 한다!
독일은 어쩔 수 없는 지속적인 소모를 겪고 있었다. 크롬 공급이 끊기며 항공기 생산에는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폴란드, 프랑스, 북아프리카, 영국 전역을 겪으며 성장한 에이스들은 신참을 지키려다, 기체 이상이 생겨서, 혹은 그냥 운수 더럽게도 대공포화에 직격당해 죽어 갔다.
허접한 소련기들을 학살하고 탄생한 에이스들은 많았지만 기본 실력 자체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진짜배기’ 에이스들은 그렇게 불평했다.
그들이 실전을 겪으며 성장할 시간이 주어져야 하는데, 상부에서는 육군의 방어선에 뚫린 구멍을 막기 위해 마구잡이로, 조밀한 대공포화 속으로 파일럿들을 던져 넣었다.
“가면 내가 꼭 저 새끼들 다 뒤집어 버린다….”
죽어 간 동료들을 떠올리며 편대장은 이를 갈았다. 가슴팍에 달린 묵직한 훈장은 뾰족뾰족한 장식물 덕분에 얼굴에 던질 경우 상당한 상해를 입히는 것이 가능했다.
이미 몇몇 공군 지휘관들이 훈장을 남의 얼굴에 던졌다가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놈들 가는 길에 마지막 작별이다….’
기관총으로 소련기 하나를 격추시키며, 그는 그렇게 되뇌었다.
* * *
“임무는 다들 숙지했겠지?”
“예! 연대장 동지!”
가혹하고 무자비한 소련군이라 할지언정, 형벌부대가 아니라면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맡기지는 않았다.
“살아서 돌아오자. 우라!”
“우라! 우라!”
공군의 질적 열세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부는 그래서 조종사들에게 독일군과 정면충돌하는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제46근위야간폭격비행연대의 사례가 바로 그러했다.
이들은 독일군의 방공망이 허술해질 수밖에 없는 밤을 틈타 후방의 목표물을 타격했다. 서기장은 이러한 전술을 ‘종심 항공 지원’(Deep air support)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조종사들에게 무작정 독일인들과 싸우다 죽으라고 명령하지 않을 거요. 저들과 직접 싸워 죽일 필요도 없소. 실제로 비행기 한 대를 격추시키나, 아니면 저들의 지원체계를 망가트려 비행기 한 대를 못 쓰게 만드나 둘은 같은 것 아니겠소?”
전쟁은 보급의 싸움이다. 저들이 전력을 전선에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방에서 전방으로 물자가 전달되어야 한다.
기름이 없다면, 탄약이 없다면 저들은 싸울 수 없다. 싸워서 큰 피해를 입으며 죽고 죽이는 것보다 최소한의 피해를 입으며 말려 죽이는 게 좋지 않겠는가?
“2대대는 1번부터 4번까지 지정된 교량을 폭격한다. 3대대는 철도선에, 그리고 내가 직접 지휘하는 1대대는 수송행렬을 폭격한다.”
[예!!!]
어머니 조국은 너무나도 광활해 도저히 조밀하게 철도를 깔 수 없었다. 많은 역들이 단선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고, 물동량이 많은 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날려 버린다면 일선 부대에 엄청난 보급난을 초래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강줄기에 몇 킬로미터마다 교량을 깔아 줄 수도 없는 노릇. 저들이 반드시 지나다녀야만 하는 교량들이 존재했다.
독일군의 후방에 침투한 스페츠나츠 특수부대원들이나 파르티잔들은 매복하여 물동에 핵심적인 교량 및 철도지점을 파악한 후 상부에 전달했다.
이렇게 파악한 저들의 약점을 정확히 찔러 줄 수만 있다면 독일군을 비명 지르게 만들 수 있었다.
“밤의 마녀들, 출격하라!”
연대장, 마리나 라스코바 대령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죽을지도 모르는 임무를 받아 나가는 부하 파일럿들은 지금만큼은 소녀처럼 꺄르륵 웃었다.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46근위야간폭격연대를 독일군들은 ‘밤의 마녀들’이라고 불렀다.
라스코바 대령의 애기, ‘로지나’(조국)의 옆면에는 그 별명을 기려 험상궂은 얼굴을 한 바바 야가(러시아 전설 속의 마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절구통을 타고 날아다니며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처럼, ‘밤의 마녀들’은 슈투르모빅을 타고 날아다니며 독일군의 보급을 잡아먹었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황혼을 향해, 수십 기의 항공기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 * *
“저기, 저기 보인다!”
[아… 확인했습니다!]
후방에 침투한 정보원들은 독일인들이 어디서 어디로 지나는지 수시로 무전을 통해 보고했다. 야간폭격대들은 주로 그들의 유도를 통해 목표물을 파악하고 공격할 수 있었다.
물론 독일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기네들이 파악한 중요 포인트며 수송행렬을 방어하기 위해 이들도 대공포를 배치했다.
하지만 ‘밤의 마녀들’은 나름의 방어전술을 개발했다. 이들이 모는 Il―2 슈투르모빅 자체가 튼튼하고 방어력이 높기는 했지만, 대공포화에는 삽시간에 찢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대공포에 들키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다들 엔진 꺼! 활공 들어간다!”
[옙!]
어둑어둑한 밤에 새까맣게 칠한 항공기를 타고, 엔진조차 끄고 활공하여 목표물에 접근한다면? 웬만해선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언제 적기가 나타날지 몰라 혹사당하는 중인 대공포대는 정작 필요할 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날카로운 밤눈으로 삐죽 튀어나온 두 문의 대공포를 확인한 폭격대원들은 기관총의 조준선에 포대를 맞추어 놓고 사격 개시를 기다렸다.
타타타타타타탕!
라스코바 대령의 애기, 로지나가 가장 먼저 불을 뿜자 다른 마녀들 역시 공격 신호로 판단하고 제각기 표적에 총탄을 난사했다.
난자당한 대공포대는 발사를 해 보지도 못하고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아래의 수송트럭 행렬들이 혼비백산하면서 우왕좌왕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준비된 기체로부터 공격!”
[예엡!]
대원들은 다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어머니 조국을 감히 짓밟은 저 무도한 인간들을 징벌하는. 휘발유 엔진이 납탄에 찢겨 불타오르며 보급물자들을 집어삼켰다. 얼음판이나 다름없는 도로에서 트럭들은 급선회하다가 길가에 처박혔으며, 폭격대원들은 그런 표적을 놓치지 않았다.
수십 대의 귀중한 트럭들을 찢어 버린 후, 마녀들은 유유히 사라졌다. 또다시 찾아올 내일 밤을 기대하며.
“소비에트 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