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화
소련군에서 전통적으로 중시된 병과는 바로 포병이었다. 서기장 동지는 ‘포병은 전장의 신’이라며 포병의 효용을 극찬했고, 이에 따라 군대 역시 포병의 육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물론 포병이라는 병과는 높은 숙련도와 지적 수준을 요구했다. 다른 병과들에 용맹함이나 순발력 같은 덕목들이 중요하게 여겨졌다면 포병은 전투병과 중에서 가장 지적인 능력, 특히 수학적 능력을 요구했고, 다른 병과의 장교들보다 학력 면에서 평균적으로 몇 년은 가방끈이 길다 해도 좋았다.
관련 학과,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한 대학생들은 지망에 상관없이 통신 관련 병과나 포병으로 끌려 들어왔고, 이들은 열심히 병사들에게 수학을 가르쳐야 했다. 그렇게 굴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병 병과는 빵빵한 지원과 남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다.
이렇게 자부심 높은 소련의 포병장교들은 그러나, 드높은 콧대가 한번은 깨져야 했다.
“내레 조선의용대의 포병 사령관, 무정 아니겠슴메? 껄껄껄껄!”
극동에서 온 이 사나이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중령 계급을 달고,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포병대대를 이끄는 대대장으로 북부전선군 휘하 야전군의 군 직할 포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얼마나 빽이 좋은지는 모르나, 윗선에서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할 것을 암묵적으로 명령했다.
“어디 저 중국 깡촌에서 굴러먹다 온 새끼들이, 나 중령이오, 나 대대장이오 꺼드럭거린단 말인가?”
“우리야말로 소련군 최고 엘리트들인데? 빌어먹을 새끼들. 하하….”
어눌한 러시아어로 더듬더듬 자신을 무정이라고 소개한 조선인을 보고 소련군의 포병장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등교육도 못 받았고, 저기 어디서 허접한 박격포나 조금 만져 봤던 놈이 낙하산으로 내려와 대대장이라고?’
빽 있는 놈 앞에 설설 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군인다운 성깔로 무정 중령의 자질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동안 소련에서 금기시됐던 민족 단위 부대 역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리 그들이 일련의 ‘실전 경험’ 이후 자체적인 군단으로 편성되어 소련군과는 별도의 명령체계를 가지게 될 것이라지만… 아니꼬운 것은 아니꼬운 것이었다.
그러나 무정은 본인의 실력 하나로 이 모든 불신을 종식시켰다.
“명… 명중!”
82mm 박격포를 귀신같이 다루는 그와 조선인 포병대대원들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묘기들을 보여 주었다.
박격포로 움직이는 전차를 쏘아 맞히지 않나, 고정된 표적은 크기에 상관없이 초탄에 척척 쏴 터트리는 것이었다.
“야, 저게 되는 거냐? 나도 한번 해 보자.”
“풉, 푸흡…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요!”
이 묘기를 보며 소련군 포병장교들은 어? 저게 되나? 하며 박격포에 다들 한 번씩은 손을 대 보았지만 조선인 대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해야 했다.
고등수학도 모르면서, 박격포같이 쩨쩨한 거 잘 다룬다고 진짜 포병이냐? 라며 발끈한 이들은 조선인 대대원들의 ‘실력’을 알아본다는 핑계로 온갖 신형 무기들을 들이댔지만 대체 뭘 먹고 저렇게 쏘는 것인지.
소련군의 정예 장교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무기들을 얼마 사이에 능숙하게 다루기 시작한 조선인 대대는 그야말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 * *
소련군 포병은 이즈음 비약적인 하드웨어적 진전을 겪고 있었다.
코룔로프 설계국에서 만들어낸 각종 로켓포들은 하나하나 양산되어 일선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고, 대구경 곡사포들과 자주포들이 양산되어 배속되었다.
또한, 최신식 비밀무기인 근접 신관이 203mm 고폭탄 위주로 적은 수량이지만 보급되기 시작했다.
군 사령부는 근접 신관의 비싼 가격을 전해 듣고 기함하며 비싼 물건이니 아껴 쓰라는 식으로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려 사용을 통제했다. 하지만 대체 얼마나 높은 빽이 있는지 조선인 대대원들은 군사령관의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넣은 신무기들을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애마냥 펑펑 쏴대기 시작했다.
“간다! 간다! 뿅 간다~!”
“가주와~~~”
펑! 펑!
주위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소련군 포병대 소속 병사들은 낄낄 웃으며 혀를 배배 꼰 발음으로 이들의 구호를 따라 했다.
51군 직할 203돌파포병사단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인 203mm B―4 중곡사포는 결국 조선인 대대에게 돌려졌다. 워낙 수량이 적어 소련군 내에서도 이걸 다뤄 본 이들이 적었기에, 사단에서 가장 능력 있는 대대로 선정된 조선인들에게 중곡사포가 돌려진 것이다.
원래는 대공포탄으로 쓰이기 위해 근접신관을 개발하였으나, 개량에 개량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비싼 가격을 보고 놀란 스타브카는 수백 발씩 난사하는 대공포탄이 아니라 한 방에 엄청난 범위를 때릴 수 있는 100kg짜리 중포탄에 근접신관을 박아 주었다.
100kg에 포함된 압도적인 작약에 힘입어, 공중폭발시 엄청난 살상반경을 가지게 된 중포는 소련군의 공세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포로로 잡힌 독일군 병사들은 ‘스탈린의 오함마’의 파괴력에 치를 떨며 대체 뭐 하는 물건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아주 좋다우! 3회 일제 포격 후 날래 튀어 재방열!”
“예!”
소련군 관측병이 불러 주는 좌표를 들여다본 무정 중령은 한번 쓱 포대를 둘러보더니 소련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조선어로 따따따따 지시를 내렸다.
“2번 포대! 1밀 틀라! 재장전 날래 하라우!”
100kg짜리 거대한 포탄을 몇 명이 붙어 낑낑거리며 재장전을 하는 것을 본 그는 혀를 쯧쯧 찼다.
“병사들이레 저 무거운 포탄 때문에 낑낑거리는 거 좀 보라우. 자동장전장치 좀 만들 수 없갓나?”
“알겠습니다, 대대장 동지. 보고하겠습니다.”
자동장전장치도 붙여 주고, 기왕에 만드는 김에 저 무거운 포 좀 편하게 굴리고 방열도 하게 자주화도 시켜 주고! 무정이 그렇게 관측장교에게 훈수를 두는 동안 그의 가슴팍에서 레닌훈장이 빛났다.
독일군 포병보다 넉넉히 1.5배쯤 되는 사거리를 가진 B―4 중곡사포 대대의 주 역할은 적의 포병대에 대한 대포병사격이었다.
아군이 치열하게 교전을 하는 동안 관측반이 분석한 자료를 들고 오면, 해당하는 포병 진지를 폭발적인 사거리와 파워를 가진 중곡사포로 포격을 쏟아부어 침묵시켜 버리는 전장의 사신.
정확한 전과 집계가 어려워 몇 대의 독일군 포를 잡아냈는지에 대해 알 수는 없었으나 포병에 의한 피해는 전 북부전구를 통틀어 51야전군이 제일 적었다는 것이 스타브카에까지 올라갔다.
스타브카는 이런 놀라운 공적에 대해 조선인 대대에 적기훈장을 서훈하고 그 대대장인 무정에 대해서는 레닌훈장까지 추가로 서훈하는, 답지 않게 발 빠른 대처를 보였다.
<이 주의 영웅 부대: 203 돌파포병사단 ‘조선인 대대’>
<극동의 전우들이 레닌 훈장을 수훈하다!>
전선 이곳저곳에서 활약 중인 조선인 부대에 대해 신문들은 조국 조선의 해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 싸우는 영웅적인 전우라며 그들을 극찬했다.
서기장과 조선 해방군의 명예 사령관 홍범도 중장, 마찬가지로 동맹 국가인 미국에서 소련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 온 조선인 김영옥 대위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이 1면을 장식했다.
물론 이들이 세운 놀라운 전공은 일정 부분 사령부의 배려가 있기에 가능했다.
훈련을 마친 이후, 이들은 가장 좋은 장비를 받았고 최악의 격전지에서는 뒤로 돌려졌다.
여기에 더해 조선인들은 많은 수가 중화민국군, 중국 공산당군, 혹은 일본군을 경험해 본 베테랑들이었으며 몇 년의 실전 경험이 있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대부분의 병사나 장교들이 실전경험이 거의 없는 소련군 입장에서는 조선인 부대들은 귀중한 자원이었으며 이들의 요구는 대부분 일리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가급적 원하는 모든 것이 제공되었다.
“자, 날래 튀라우!”
“예엡!”
세 번의 일제사격 이후 18문의 트랙터가 쿠릉쿠릉 하는 엔진음을 내며 미끄러져 들어왔다. 육중한 곡사포대에 연결된 트랙터들은 독일군의 반격이 가해지기 전에 빠르게 현장을 이탈하기 위해 하나하나 줄을 이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파시스트 놈들의 포대가 침묵 중입니다!”
통신반이 보고하자 병사들은 환호했다. 역시!
“까레야 우라! 까레야 우라!”
“으하하하하하! 싸볘트 우라! 싸볘트 이 벨리끼야 스뜨라나!”(소비에트 만세! 소련은 위대한 나라다)
소련 병사들이 까레야 우라를 외쳤다.
우라! 우라! 영웅 대대 우라! 조선인 부대의 대다수는 중국에서 활동하다 온 이들이었기에 러시아어를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점점 한두 마디 정도는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빨리 배운 것은 ‘우라’. 만세! 였다.
조금 더 많이 러시아어를 배운 이들은 함께 만세를 외치며 소련은 위대한 나라다! 라며 어눌한 러시아어로 답했다.
몇몇 병사들이 휘파람을 불었고, 트랙터에 실린 채 멀어져 가며 조선인들은 그들에게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소련인들은 대개 무뚝뚝하고 잘 웃지도 않아 딱딱해 보였지만, 전장을 거치거나 술이 몇 순배 돌고 난 이후라면 의리 있는 친구가 되었다.
“되놈들은 친한 척해도, 뒤통수나 치려 하더만.”
“거, 말 한번 잘했네. 돼지 같은 더러운 되놈들….”
조선인 병사 중 하나가 중국인을 욕하자 그걸 들은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개석이나 모택동이나 조선인들을 이용하면서도 경계했다. 군벌로 시작한 이들이니 조선인들이 군벌이 되는 것을 경계했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중국 내에서 호의호식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같은 공산주의 동지라던가, 혹은 왜놈에 맞서 싸우는 친구로서 그들과 함께했을 뿐. 잃어버린 고향산천이 그립지 말 다르고 물 다른 중국 땅이 좋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끝까지 조선인들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지도자들도 그랬고, 일상에서 만나는 약삭빠른 중국인들 역시 소소한 면에서부터 어떻게든 뭐 하나를 더 벗겨 먹으려 들었기에 조선인들은 중국인이라면 진저리쳤다.
소련이 조선인들을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꽤 많은 조선인들은 저 되놈들이 비로소 우릴 로스케들에게 팔아넘겼구나 생각했다. 뭐, 와 보니 그게 아닌 것을 알았지만.
소련인들은 처음에는 말도 안 통하는, 노란 얼굴의 조선인들을 경계하기는 했어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스딸린 서기장이 저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끌고 갔던 동포들이 워낙 뛰어난 성과를 이뤄서 그런가? 아니면 여운형 동지, 김원봉 동지가 서기장을 구워삶았나?
소련인들은 조선인들을 융숭히 대접했고, 서기장부터가 조선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지금 서쪽에서의 위협 때문에 동쪽의 일본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날이 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국을 해방시키는 위대한 임무의 최선봉을 맡을 수 있게 될 겁니다. 해방 조선 우라! 우라!”
“와아아아아!!!”
* * *
“서기장 동지. 조선인들을 저렇게 한 부대로 편성하는 것이 좋은 생각인지 저는 잘….”
“주코프 동지. 정치에 대해서는 자네가 관여할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네만… 정치국의 명령에 대항하는 반동적인 의도를 품고 있었던 것인가?”
“죄, 죄송합니다!”
몇몇 소련 정치인들이나 군인들은 조선인들에 대한 ‘특별 대우’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대체 왜 저 사람들에게 이런 대우를 해 주는 것인가? 물론 결국에는 납득했지만.
“향후 극동에서 우리가 중국을 조종할 수 있겠는가?”
“예?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일본은?”
“…그것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지도를 펴서 하나하나 짚어 내려가면 보통은 납득하곤 했다. 주코프 역시 지도에서 내가 짚어 주는 점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 자네 말대로 우리가 중국이든 일본이든 마음대로 할 수 없겠지. 하지만 만약… 조선을 우리의 영향력하에 둔다고 하세나. 그러면 이곳 원산, 그리고… 저기 제주를 우리가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음… 소관은 잘….”
“잘 보게. 일본은 대륙으로의 교두보를 잃고 섬이 될 것이고, 우리는 태평양으로의 항구를 얻을 수 있게 되지. 북경과 남경에 대한 공군 기지로서의 역할도 있을 것이고. 차르 시대부터 이 작은 반도를 차지하려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외에도, 한반도를 우리 영향하에 두어야 할 만한 이유는 엄청나게 많았다.
원산, 부산 등 러시아가 오래도록 갈망해 왔던 부동항의 확보가 그 하나였고,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서 한반도가 가진 가치가 둘이었다.
향후 일본과 중국을 미국과 반분한다 치면 동아시아의 무게추는 그 사이에 있는 한반도가 되는바, 그들을 영향권 내에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저 땅덩이를 우습게 보지 말게. 미국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는가? 이것은 또 하나의 그레이트 게임이나 다름없네. 단지 상대가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 되었을 뿐.”
지난 19세기, 러시아는 대륙 안에 봉쇄당한 것을 깨고 세계로 진출하기 위하여 영국과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여 왔다. 흑해와 지중해로 나가기 위해 오스만을, 인도양으로 나가기 위해 페르시아를, 극동에서는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영국의 극동 파트너였던 일본에게 대판 깨지고 결국 블라디보스톡으로 물러나고, 독일을 상대하기 위해 영러협상을 맺기는 했다. 재기한 독일을 다시 밟아 두기 위해 이번 전쟁에서도 손을 잡기는 했지만 언제까지나 아군일 수는 없는 법이다.
미국은 지금은 친구일지 몰라도 언젠간 소련과 경쟁 구도로 돌입할 것이다. 그 전에 세계에 영향력을 퍼트릴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자기 힘을 자각하고 고립주의를 깨고 나오기 전에.
“독일과 프랑스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 대서양으로 진출하고, 한반도와 일본에 영향력을 투사해 태평양으로 진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대륙에 갇히지 않게 될 걸세. 그를 위한 조치이니, 너무 불만 가지지 말게. 알겠나?”
“예! 서기장 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