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81화 (81/300)

# 81

81화

소련군을 괴롭히는 적은 여럿이 있었다. 충치는 한번 ‘발치의 폭풍’ 작전으로 토벌을 시행한 이후 병사들 개개인의 경계심이 높아지며 어느 정도 진압에 성공한 바 있었다.

내부의 적인 부패한 간부진은 근대적―전근대적 처벌의 병행을 통해 일벌백계하여 걸리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소련군은 여러 적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서기장 동지, 여기 명령하신 보고서입니다.”

“으음… 그래, 고생했네.”

현대까지도 토벌하지 못한 적. 바로 PTSD였다.

사실 실제 역사에서나, 아니면 지금이나 대조국전쟁은 그다지 PTSD를 많이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후대의 전쟁에 비하면. 의학의 발전이 느려 진단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조국을 침략한 악랄한 파시스트와 맞서 싸운다는 신념이 PTSD 발생을 많이 예방했다고 한다.

살인, 그리고 살해의 경험에서 같은 충격을 받아도 이를 정당화해 줄 기제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천지 차이라고 한다.

대조국전쟁 당시의 소련군은 명백히 악마 같았던 독일군을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결국 승리해 인민들의 찬사와 국가적인 기념, 지원을 받았기에 PTSD 문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아직까지 정신의학은 태동기나 다름없었고, PTSD 증상을 보이며 벌벌 떠는 병사들은 겁쟁이, 패배주의자로 몰려 처벌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것을 예방하라는 목적으로 보낸 정치장교들이 처벌을 주도할 때도 있었다.

“우리 인민들은 용맹하지만, 모든 병사들이 충격 앞에서 강철같은 견고함만을 보일 수는 없소. 그들은 인간이고 피와 살로 되어 있으며, 예민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우리는 반드시 그 점을 이해해야 하오.”

아직 SSRI와 같은 현대적 정신치료 약물이 개발되지 않은 이상 다른 방식의 정신치료, 주로 정신적 지지체계를 만드는 것에 의존해야 했다.

보통 병사들은 전우애, 집단 내에서의 교감과 지지를 통해 PTSD를 이겨 내는 것으로 알려져 왔고, 이런 체계에서 동떨어진 이들이 더 높은 확률로 PTSD에 걸렸다.

소대와 중대 단위로 배치된 정치위원들은 조직 내의 ‘외톨이’ 병사들의 정신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래에서는 그런 업무, 사회 부적응자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짓을 정치위원에게 시키냐고 반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기장이 까라면 까야 했다.

또한, 병사들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여러 행사들 역시 정치장교들의 책임하에 열렸다.

“아자씨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개중 가장 반응이 좋은 것은 인근 지역 초급학교의 아이들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지역, 우리 동네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그렇게 감사의 편지를 쓰고, 부대에 방문해 병사들과 인사를 하고 손잡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무뚝뚝하고 감정을 잘 내보이지 않는 소련 병사들에게도 잘 먹힌 것 같았다.

병사들은 울고, 아이들은 그렇게 우는 병사들을 끌어안고 토닥토닥 달래 주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병사들은 다 같이 한동안 펑펑 울다가 다음날이면 용기백배하여 전선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프리 허그’ 같은 걸 제안한 정치장교 하나가 포상으로 2계급 특진한 것이 알려지자 인근 학교 아이들을 데려다 프리 허그를 시키는 부대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기도 했다.

예컨대, 북부전선군 소속 53야전군 392소총병사단 8672연대 2대대는 인근 푸시킨 제5초급학교 4학년 3반과 연결되었다.

2대대의 장병들은 4학년 3반 어린이들이 보내는 편지를 몇 통씩 받아 볼 수 있었고, 대대와 중대 정치장교는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를 하나하나 장병들에게 읽어 주기도 했다.

“군인 아저씨들께! 아저씨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반 세묘노프라고 해요. 우리 도시를 지켜 주시는….”

2대대 1중대 병사들은 다 같이 사단 전속 사진사가 찍어 주는 단체 사진을 찍으며 활짝 웃었다.

“하나, 둘, 셋! 스탈린!”

“스탈리이이인!”

이 사진은 인화되어 4학년 3반의 아이들에게 보내졌고, 아이들은 이제 이 사진을 붙인 큰 벽보용 종이 아래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나갔다.

‘군인 아저씨께, 감사합니다. 저희 도시를 지켜 주시고 항상 나라를 위해 고생하시는 군인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감동적입니다. 저희 오빠도 아저씨처럼 군대에 갔는데 건강하면 좋겠습니다. 나타샤 페트로프.’

벽보용 종이, 롤링 페이퍼가 전달될 때는 한 무리의 꼬맹이들이 벽보를 들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진을 같이 붙여 보냈다.

“야! 야! 샤샤 이병!”

“예! 이등병 알렉산드르 바랴노프!”

“너 글자 읽을 줄 알지? 이거 좀 읽어 봐라.”

병사들은 개중 글을 잘 읽는 이들을 중심으로 모여 눈물을 훌쩍이거나 껄껄 웃으며 아이들이 보낸 작은 편지들을 읽어 내려갔다.

“다 읽었냐? 그럼 이리 와서 편지 좀 써 봐.”

“야 이거 제대로 쓴 거 맞냐? 원 참… 글자 존나 어렵네… 열심히 좀 배워 둘걸.”

글을 잘 쓰는 병사들은 아이들에게 답장을 써 보려는 무식한 고참병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그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어야 했고, 정치장교들은 그런 현상을 훈훈한 미소를 띠고 지켜보았다.

또, 정서적 안정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 혹은 노래 가사를 짓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들이 병사들에게 권장되었다.

“자! 각자 만든 제출물들을 2월 15일까지 해당 부대 정치위원을 통해 제출하시오!”

정치장교들은 각 사단, 연대별로 병사들이 만들어낸 ‘모범적인’ 예술작품들을 선발해 숙영지의 게시판에 걸고, 음악에 재능을 보인 병사들은 전투나 경계배치 상태가 아닐 경우 모여 부대장이나 정치장교 주도하에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상급 지도부의 묵인하에 글을 쓰기 위한 필기구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스케치북, 음악 연주를 위한 악기들이 각 부대마다 일정량씩은 주어졌다.

물론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서는 뭔가 당근이 있어야 했다.

뛰어난 작품에는 항상 크든 작든 포상이 뒤따랐다. 작은 포상으론 해당 병사와 병사가 소속된 소대에 미제 허쉬 초콜릿 일 킬로그램부터, 아주 뛰어난 공훈을 세웠을 경우 특진, 혹은 정치위원 후보생 교육과정으로 편입된 이도 있었다.

“음? 이자는…?”

“예? 아! 문예 경진대회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의 작가들 중 하나입니다. 이름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입니다. 포병 중대장인데 짬짬이 글을 써서 입선을 했다고 합니다.”

…? 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대표적인 소련의 반체제 문필가 중 하나인 솔제니친이 ‘모범적인 사회주의 군인 문학’을 시상하기 위한 프로그램에서 최우수상 후보자로 선정되어 나에게까지 올라와 있었다.

‘나’, 그러니까 스탈린은 원래 젊을 적부터 그루지야어로 시를 써서 그루지야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문예에 재능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이들 중 대상 수상작을 나한테 선정하라고 올려보냈나 본데… 하필 솔제니친의 이름이 눈에 띈 것이다.

“제목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그… 그렇습니다.”

‘뭐지? 얘 벌써 수용소 다녀왔나? 그건 아닐 텐데…?’

문학작품 위에 간단히 요약되어 있는 인사기록에는 전혀 그런 언급이 없었다. 애초에 굴라그까지 끌려갔다 온 사람이 장교로 있기가 어렵겠지만… 으음. 분명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읽어보고 걸러서 올린 것이니 ‘모범적인’ 작품이겠지?

“으음… 매우 잘 쓴 글이로군.”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병사들의 문학적 역량이 이렇게 뛰어난 줄은… 다 서기장 동지의 영명하심 덕분입니다.”

휘리릭 읽어 보니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는 소련의 굴라그가 아니라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끌려갔다 복귀한 전쟁영웅으로 그려져 있었다.

대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담담하고 정제된 문체로 쓰여 있었다.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담백하게, 때론 유쾌할 정도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래서 더 가혹한― 을 평범한 소련인의 눈으로 그려내어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글을 읽어 내려가며 내가 다 감동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 진짜인가?”

나는 처음에 히틀러가 미래에서 나처럼 빙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자꾸 아닌 것 같게 만드는 증거들이 튀어나왔다. NKVD가 간간이 올리는 보고들에는 비슷한 말들이 있기는 했는데… 떠도는 낭설들도 아마 소문 수집에 걸릴 것이고, 솔제니친 역시 그런 소문들을 들었겠지.

아무튼 상상력만은 인정할 만했다.

상상력이겠지? 설마?

“음. 난 이 작품이 마음에 드는군.”

“예! 감사합니다. 서기장 동지.”

대상으로 솔제니친을 콱! 찍어 준 나는 이제 PTSD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짜내기 위해 또 고심했다.

롤링 페이퍼, 프리 허그, 레크리에이션… 병사들의 반응이 좋을 만한 아이디어들이 곳곳에서 올라오긴 했지만 전통의 강호들은 대부분 이러했다. 뭐, 겪어 봤던 나도 그 정도가 무난했지.

레크리에이션은 기술의 발전을 신봉하는 소련답게 지극히 ‘기술집약적인’ 방식이었다.

최일선 부대에서는 안전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후방 부대들에서는 통칭 ‘영화부대’로 불리는 순회 부대들이 돌아다녔다. 이 영화부대들은 스크린과 영사기, 팝콘 등을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병사들을 위해 영화 상영회를 했다.

영화부대가 온 날, 어둑어둑한 밤이면 병사들은 빽빽하게 들어앉아서 오매불망 언제 영화를 틀어 주나 기다리곤 했다.

제일 짬이 높은 병사가 자기도 튀기면서 한 움큼씩 주워 먹기 위해 팝콘을 튀기고, 신병이 끙끙대며 영사기를 설치한 후 돌리기 시작하면 장병들은 환호성을 터트리곤 했다.

“우와아아아!”

[제작 ―소비에트 중앙 문예위원회―]

물론 영화의 인트로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야외 영화관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곤 했다.

가끔 오줌이 급한 병사가 일어서서 일을 보고 오려다 영화 스크린이 그림자로 가려지면 야유와 고함, 그리고 작게작게 폭력사태가 터져 나오곤 했지만, 병사들은 영화를 보고 웃고 울었다.

“와하하하하! 저 파쇼 놈 좀 봐!”

“엄마… 보고 싶어요….”

영화부대가 틀어 주는 영화는 당연히 군부대답게 주로 선전 영화였다.

예컨대 <레프 일병 구하기>나 <즐거운 전우들>처럼 액션과 선전을 적절히 가미한 영화들도 있었고, <건국대업>, <건당위업>처럼 레닌과 소련 건설의 역사를 아름답게 미화한 역사 영화들도 틀어 주곤 했다.

야시시한 장면을 검열하려는 문화공보부에는 스탈린 서기장께서 직접 제동을 넣어 병사들은 그런 밤이면 잠을 못 이루곤 했다.

[아들아, 날씨가 추운데 너는 잘 있느냐. 우리는 잘 있단다. 네 여동생은 올해 중학교에 들어가기로 했다. 모쪼록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인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거라. 흑, 건강하거라… 꼭 돌아오거라….]

가끔은 평범한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영상편지 모음을 틀어 주면 병사들은 좀 다른 의미로 잠을 못 이루곤 했다고 한다.

“어머니! 아버지!”

달 밝은 밤 그리운 고향과 보고 싶은 어머니 아버지를 찾는 장병들은 막사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고 부모님의 성함을 부르곤 했다. 정치장교는 그런 장병들을 잘 달래고, 내일 아침에는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쓰자며 다시 잠을 청하게 들여보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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