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80화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은 피로 교훈을 얻었고, 그것을 이제 독일인들한테 써먹고 있었다.
“더러운 열등인종 새끼들… 온갖 비열한 수작을 다 부리는군?”
“그러게 말이야. 퉷, 그놈의 잠입 전술은 솔직히 다시 당하고 싶진 않아.”
물론 독일군 장교들은 대숙청에 시달리던 소련군보다는 훨씬 더 경험이 많고 노련했기에 침투해 오는 소련군을 역으로 기만하고, 포격을 퍼부어 스키부대들을 몰살시킨 후 역으로 독일인 스키―산악사단을 투입해 몇 번의 포위섬멸에 성공하기는 했다.
북부집단군 사령부는 전차와 장갑차를 닥닥 긁어모아 전선을 돌파해 깊이 들어온 소련군 6전차군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종심작전은 원래 공세종말점이 오기 전에 아군의 후속부대가 더 전진하고, 상대가 예비대를 투입할 여력을 없애 공세종말점 이후에 닥쳐올 역습에 대비하는 작전술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그 정도로 세련된 작전을 펼쳐 보일 능력이 아직 없었다.
몰아치는 눈폭풍 앞에서는 소련군 역시 철인이 아닌지라 진군을 방해받았고, 이 틈새로 만슈타인은 제대로 한 방의 공세를 꽂아 넣어 소련군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전선에서 최소 군단급 기갑부대의 공세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56기갑군단 전면에… 300대? 400대 이상의 적 전차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탱크들을 뽑아 오는 거야! 제기랄!”
그러나 6전차군이 박살 난 자리에 5전차군과 8전차군이 투입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만슈타인은 미련 없이 뒤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무익한 싸움에 더 이상 병사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니… 후퇴하라.”
“…각하!”
“후퇴 과정에서 부대의 재편성 작업이 필요할 테니 귀관들은 이를 유념하여 준비하도록!”
여름, 여름이 오면 얼마든지 지금 잃은 땅은 다시 빼앗을 수 있다. 병력이 오고 장비가 공급되면 최정예 독일군은 저 허접한 소련군을 언제든지 박살 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겨울에 저 땅 한 치를 빼앗겠다고 너무 많은 병사들의 피를 뿌려 버렸다. 병력은 보충할 수 있지만 정예병은 키우기 어려웠고, 신병이든 고참 정예병이든 추위 앞에서는 똑같이 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오히려 얼어 죽어 가는 신병을 위해 전우애로 제 옷가지를 내준 고참병들이 많아 이들의 피해가 더 클 지경이었다.
동상으로 손발을 잘라 내야 했던 한 병사는 위문차 야전병원을 방문한 사령관 만슈타인에게 경례를 붙이려다 이제는 잘려 없는 오른손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사령관 각하, 죄송합니다. 어린 신병 녀석이 당장에라도 죽어 버릴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기랄, 멍청한 놈. 몸 성히, 살아 돌아와야지….
그의 맏아들은 중부집단군에서 싸우다 실종되었다. 포로로 끌려갔다 믿고 싶었고, 멀쩡한 사지로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다. 아들의 모습이 그 병사에서 겹쳐 보였다. 항상 책임감 있고, 남들에게 베풀고 제가 가장 먼저 사지로 들어갈 정도로 용맹한 아들이었다.
총명하고 용감했기에 좋은 장교가 되리라 생각했고, 늘 아비의 자랑이었지만… 누군가 했던 불길한 농담이 떠올랐다.
‘용감한 장교는 항상 제일 먼저 죽지. 비겁한 놈이 살아서 장군이 되는 거야. 나처럼. 하하하!’
아니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용맹하게도 그 녀석을 잡으러 온 악마마저 뿌리쳐 버리고 잘 살아서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가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릴 아이이니…. 만슈타인 원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면 결코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간 오싹한 예감이 스쳤다.
‘스탈린, 그 악마 같은 작자.’
스탈린의 큰아들은 스몰렌스크에서 전사했고, 작은아들은 프스코프에서 전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독일군을 갈아 버리는 저 소련의 차르가 과연…?
가혹한 차르라고 할지언정 원수의 아들에겐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마구 죽여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막사 안은 따뜻했지만, 만슈타인은 등골에 흐르는 소름에 몸서리쳤다.
소련군은 악마 같았고, 스탈린은 그 악마들을 다스리는 악마대왕, 사탄 같았다. 주제를 모르고 제 영역에 기어들어 온 필멸자들을 강철과 불꽃과 혹한으로 징벌하는 악마의 왕.
인간이 악마에게 싸움을 건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 * *
중부집단군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북부집단군의 후퇴를 그저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실제로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는 논외로 치고 중부집단군의 목표는 모스크바였다.
그러나 양익을 적으로 가득 채워 둔 채 모스크바만 보고 달릴 수는 없는 노릇. 좌익의 북부집단군과 우익의 남부집단군이 반드시 충분히 진군해 중부집단군을 위한 빈틈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차라리 프리퍄티 습지로 막혀 있는 우익 방향은 낫다만….”
독일군의 급속 기동을 베껴 가 제 나름대로 써먹는 소련군이라 할지언정 차량이 기동할 수조차 없는 대습지를 가로질러 독일군의 옆구리를 강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북부집단군이 밀려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당장 모스크바로 가는 두 줄기 철도선의 기점이라 할 수 있는 벨리키에 류키가 소련군의 압력에 정면으로 노출될 처지가 되었다.
아직 프리퍄티 이북 드네프르 동안의 소련군을 일소하지 못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진격로조차 막혀 버리는 것이다.
벨리키에 류키가 뚫리면 그다음은 비텝스크.
비텝스크에서 밀리면 스몰렌스크는 결국 고립될 테니 힘들여 점령한 스몰렌스크마저 다시 내주어야 한다.
“북부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저희 예비대인 8군단을 북부로 보내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잘못하다간 우리가 밀려나겠지.”
그렇다고 집단군의 얼마 안 되는 예비대를 또다시 차출해 북부집단군 방향을 지원할 경우 간신히 획득한 드네프르 동안에서 밀려날 상황이다.
여름에는 그토록 넓고 거대한, 천연의 장벽으로 느껴졌던 드네프르강이 맹추위에 꽁꽁 얼어 버렸기에 강을 끼고 방어를 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 강을 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데….”
나이 지긋한 참모 하나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조용해진 회의실 내에서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잘 들려왔다.
수도 없이 많은 독일군 병사들이 소련군이 구축한 방어선을 뚫으려다 광활한 대지의 피거름이 되었는데, 이제 이 강을 넘어가야 한다. 쫓겨서가 아니라 제 발로.
다시 이 강을 넘으려면 몇 명의 독일인을 또 소련군의 포화 앞에 바쳐야 할까? 다시 넘어갈 수는 있을까? 소련군은 처음 교전했던 그때보다 월등히 강해져 있었다.
질적인 측면에서나, 양적인 측면에서나.
“고멜에서는 연락이 없는가?”
“아닙니다, 각하. 아직 도시를 사수 중이라고….”
통신장교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 사수 중일 것이다.
남부집단군이 키예프 앞에서 얼쩡거리며 소련의 남서전선군, 남부전선군의 정면을 압박 중이라면 중부집단군은 고멜을 넘어, 체르니고브를 친 후 드네프르의 지류인 데스나강을 넘어 적의 배후를 찔러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델 원수는 남부집단군의 전면 붕괴를 막기 위해 지토미르―키예프 축선으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퇴각했고, 이제 고멜은 소련군의 집중공세 앞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모델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철저한 열세 속에서도 놀라우리만치 잘 싸웠고,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결국 패배했다.
고멜이라는 교두보가 사라질 경우 독일은 한 걸음, 드네프르 반대편으로 물러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밀어내다 보면 결국 스몰렌스크의 턱밑까지 밀려와 역포위를 당하느냐 마느냐, 가 되는 것이다.
“증원 없이도 사수가 가능하겠는가…?”
“…연락을 하겠습니다.”
고멜을 사수하는 병력은 끽해야 감편된 1개 사단뿐. 집단군의 각 휘하 제대 중 완편 정수를 채운 부대는 단 하나도 없었다.
개전 시작부터 사단 화력을 책임질 포병연대의 중곡사포대대가 기갑집단의 완편을 위해 차출되었거나,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아예 편제를 재편, 감편해 버린 부대들도 있었다.
지금 고멜을 사수하는 161사단 역시 1만 명도 안 되는 데다 감편 포병연대로 간신히 구색을 맞춘 수준이었다.
그리고 고멜 교두보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펼치는 소련군은… 알 수 없었다.
10만? 20만? 날이 잠시 갤 때 날려 본 항공정찰대는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소련군이 후방에 밀집해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렇게 쌓인 병력들은 고멜에 끊임없이 포탄과 로켓포를 퍼붓고, 독일군을 포위하려 애쓰고 있었다.
결사의 각오로 저항하는 독일군이 정예라 할지언정 기계가 아닌 이상 하나하나 죽어가기 마련. 아니, 기계마저도 마모되고 고장 나 수리가 필요할진대 어찌 인간이 버틸 수 있을까?
[증원… 저희 병력들은… 일주일이 한계일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 이전에 예비대가 필요한 다른 곳으로….]
사단장의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전화선을 통해 들어왔다. 뒤로는 아릿한 포성이 들리는 듯했다. 고함 소리와 타다당 하는 총성 역시 어렴풋이 들려왔다.
사단장의 말은 아마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죽는 데에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고, 아마 그 전에 소련군이 우리를 짓밟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짓밟히는 전우가 있을지 모르니, 차마 우리에게 먼저 증원을 보내 달라고 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참모들은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의 고민하는 얼굴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161사단은 도시 방어선을 사수하며 소련군에게 피해를 강요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잘 구축된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소련군은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물론 그러다 전선에 한번 구멍이 뚫리면 그동안 옥쇄의 각오로 도시를 사수해 온 161사단은 포위당해 결국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만 명이 넘는 소련군, 잘 기계화되고 적어도 두 배쯤은 많은 화포로 무장한 소련군을 저지하고 161사단의 장병들이 탈출할 동안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는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이렇게 간신히 긁어모은 예비대란 자원을 소모하고 나면 스몰렌스크와 벨리키에 류키를 향할 그다음 공세를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다.
뭐, 예비대를 지금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막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일대를 평정한 이후 저 거대한 군대에서 다시 전략예비대를 차출하여 북부와 중부의 핵심 전역에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보고로드―프스코프 축선, 벨리키에 류키―비텝스크, 스몰렌스크 돌출부, 그리고 고멜 돌출부까지.
“고작 고멜 같은 도시에, 1개 사단을 상대로 10만, 20만을 투입할 수 있는 소련군이라면 스몰렌스크와 벨리키에 류키로는 대체 얼마나 많은 소련군이 밀려올까?”
“총통이 약속한 증원은 언제 오는가… 아니, 최소한 보급이라도!”
추운 겨울에 부족한 식량과 피복 때문에 덜덜 떨고 배를 곯아야 하는 병사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들의 정신 역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소련군이 시도 때도 없이 쏴대는 좆대가리 미사일과 포탄의 충격음 때문인지 신경증을 호소하는 병사들이 너무 많았다. 꽤나 자주, 자기들이 처형해야 했던 소련 민간인들이 보인다며 환시, 환청을 이야기하며 날뛰기도 했다.
나치당을 맹종하는 몇몇 재수 없는 장교들은 열등인간, 슬라브족에 대해 자비 혹은 두려움을 보이는 병사들에게 사기 저하를 유발하고 패배주의를 선동한다며 군법재판에 회부하겠다 을러대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아군을 쏘거나 스스로를 쏜 병사와 장교들에 대한 보고가 책상에 쌓였다. 사령부의 참모장교들은 각종 참혹한 사건에 대한 보고를 매일같이 읽은 나머지 몇몇은 아예 병사들과 같은 히스테리적 증상을 표출하기도 했다.
사령부 전속 여성 타이피스트 하나가 피로감과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다 권총을 빼돌려 자살한 이후, 병사들의 ‘비행’에 대한 보고는 각 단위 제대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할 것을 명령했지만….
어쩐지, 군인들의 영혼의 상처는 아물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