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서유럽이 나치 제3제국의 손 아래 하나가 되었다지만 모두가 그 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공산당이 이끄는 좌익 레지스탕스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몇 번의 테러 사건을 성공시켰다. 비시의 해군장관이었던 프랑수아 다를랑은 비밀결사 소속의 대학생에게 저격당해 사망했다.
비시 정부의 수반이었던 페탱 원수 역시 공개석상에서 가해진 폭탄 투척으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다행히 독일인 주재무관이 수류탄을 걷어차 비시 정부의 장군들 몇 명이 크게 부상당하는 수준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비시 정부는 체면을 제대로 깎아 먹어 버렸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척탄 의거를 실행한 공산당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빨갱이면 어때? 저 빌어먹을 독일 돼지 새끼들한테 엿을 먹여 줄 수만 있다면 사탄 엉덩이에다가도 입을 맞출 수 있겠다.”
“거 말 한번 잘 했수. 애국이라고 떠드는 새끼들이 어째 조국이 없다는 공산당만도 못해?”
비시 정부는 국가경찰과 국가헌병대, 그리고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조직한’ 친독 민병대 밀리스를 통합해 프랑스 헌병군으로 재편했다.
한때 동네에서 할 일 없이 건달 노릇이나 하다가 어쩌다 독일과 협력하고, 밀리스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리던 깡패들이 대거 헌병군의 간부가 되었고, 이들은 그동안 가졌던 열등감을 풀기 위해 지식층이 많았던 레지스탕스 및 그 후보군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지역의 대학생, 교사, 의사와 법률가 중 평소에 애국심이 강하거나 반독일적 성향을 드러냈던 이들은 헌병군 주재소로 끌려가 심문을 당하기 일쑤였고, 헌병군은 별의별 명목을 만들어 반독일 시위로 번질 기미라도 있는 활동을 탄압했다.
레지스탕스는 밟아 볼 테면 밟아 보라는 듯 더 격렬하게 저항했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 레지스탕스 점조직들은 아예 지하 공장이라도 가동하고 있는지 온갖 종류의 폭발물들을 만들어 연계된 조직들에게 공급했다.
이 조직들 중, 가장 젊고 피가 끓는 대학생들은 헌병군에 대해 수시로 공격을 가했다.
그야말로 한 블록, 한 학과마다 레지스탕스 서클이 하나씩 있다고 할 정도로 파리는 레지스탕스가 들끓었고, 이들을 관리하는 헌병군 주재소들은 거의 매일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테러를 당해야 했다.
“잡아라! 잡아!”
“헉, 헉, 헉….”
어둑어둑한 저녁, 한 청년이 급조된 폭발물을 높디높은 주재소 담장 안으로 던지고 도망가는 것을 본 헌병 몇이 그를 추격했다.
분명 잡으라고 헌병들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으나 지나가는 시민들은 멀뚱멀뚱, 도망치는 청년을 방관했다.
오히려 그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비켜 주고, 헌병들과는 은근슬쩍 부딪히며 진로를 방해할 정도로 시민들은 헌병들을 싫어했다.
“당신네들 다 공무방해로 체포야! 체포!”
“흐음… 저 청년이 뭐라도 했습니까?”
청년은 골목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를 놓쳐 분통이 터진 헌병들은 씩씩대며 사람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들어가는지,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한 노신사는 태연하게 경찰봉을 휘두르는 헌병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물었다.
“저자는 테러 현행범이야! 늙은이! 잡으라는 걸 못 들었나?”
“음? 음? 내가 귀가 좀 먹어서….”
노신사는 이제 대놓고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헌병들에게 뻔뻔하게 굴었다.
“푸흡, 앞잡이 새끼들 꼬라지 좀 봐!”
“휘릭 휘릭~ 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킥킥 웃었고, 몇몇은 아예 크게 라 마르세예즈를 휘파람으로 불었다. 성미대로라면 노신사를 경찰봉으로 두들겨 패고 끌고 가야 맞겠지만 주변 골목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나와 그들을 둘러싸는 것 같았다.
주먹을 뿌드득거리며 풀고 목을 꺾는 건장한 체구의 청년들을 보며 헌병들은 곤봉을 더 꽉 쥐어야만 했다. 노신사는 더욱 과장된 제스처와 목소리로 그들을 조롱했다.
“아니, 좀 잘 들리게 말해 주게! 젊은 친구들이 식사도 못 했나… 내가 개 짖는 소리는 잘 못 알아들어서.”
“뭐?”
“음?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게. 뭐라고 하는지 안 들려!”
노신사는 개 짖는 소리라는 대목은 은근슬쩍 톤을 낮추어 들릴락 말락 하게 이야기했으나, 주변 사람들은 다 들은 것 같았다. 와락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의 흉흉한 분위기를 보며 헌병들은 위협적으로 경찰봉과 권총을 움켜잡으면서도 뒷걸음질 쳐야 했다.
“빌어먹을… 퉷! 야, 가자. 가자.”
“와하하하! 간다! 간다!”
아무리 총기로 무장하고 있다 해도, 권총 몇 정 가지고는 여차하다간 내일 아침 골목길 하수구 속에서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었다.
공산당 레지스탕스들은 그야말로 수천 단위로 총기를 풀어 놓았고, 골목에서 노는 꼬마들도 탄피나 총알 몇 개 정도는 가지고 놀 정도로 파리는 지금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
독일 SS의 보안국과 프랑스 헌병군은 대체 어디서 이 무기들이 다 흘러나오는지를 찾아내려 온갖 방법을 사용했지만, 한 가지 결론에만 이르고 수사를 흐지부지 끝내야 했다.
“빌어먹을, 한두 새끼가 아니로구만.”
“그… 그렇습니다.”
프랑스군을 동부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프랑스 각지에 위치한 공장에서는 다시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있었고, 이 물자들이 빼돌려지고 있었다는 것이 수사 결과 드러났다.
레지스탕스를 추적하기 위해 총기와 탄약에다 비밀리에 생산처 확인용 일련번호들을 박아 놓았지만, 결국 이들은 거의 대부분의 공장에서 물자가 빼돌려졌다는 것만을 알아내는 데 그쳤다.
“대체… 총기와 탄약 공장에 종사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신원조회와 사상검증을 거치지 않나? 그런데도 이렇게 빠짐없이 모든 놈들이 레지스탕스와 내통한다고?”
내무장관 겸 헌병군 총사령관 조제프 다르낭은 탁자를 쾅쾅 두드리며 화를 냈지만 현실이 그런 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분명 프랑스 내에도 독일 지배에 찬성하는 이들은 존재했고, 그들이 있기에 비시 프랑스 정부 자체가 존립할 수 있었다.
위험한 물건을 취급하는 곳에는 주로 친독파들을 배치하고 경공업처럼 ‘무해한’ 분야에는 일반 노동자들을 배치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데 비시 정부의 고위층은 다들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저… 각하?”
“뭐, 또 뭔가!”
“이게… 꼭 내통이 아니라, 음… 매수된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 다르낭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매수? 매수라고? 레지스탕스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매수를 하지? 자금책이 있는 건가?”
프랑스 유수의 기업들은 대부분 독일인 고문들과 이사들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유태인 부호들은 모조리 재산을 압수당한 채 어디론가 끌려갔고.
하지만 돈 있는 이들이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한 푼 두 푼 시민들이 모금한 돈도 있을 것이고, 나름 부호들이 전 재산을 턴 사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돈을 썼길래 전국 각지에 널린 군수공장이나 무기고 담당자들을 구워삶고, 온갖 물자를 빼돌리는 사보타주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돈은 어디서 다 나왔다는 말인가? 못해도 수백만 마르크는 써야 했을 텐데?
‘노동조합인가? 레지스탕스 따위가 이런 일을…?’
다르낭은 그렇게 의심했다.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 있습니다만… 저희가 내통자로 의심하여 감시 중인 몇몇의 씀씀이가 크게 늘어난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레지스탕스에게 무기를 팔아먹고 돈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빌어먹을 새끼들! 그럼 요새 씀씀이 늘어난 놈들 다 찾아서 조져 버려!”
“예! 각하!”
레지스탕스는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헌병군이 범인을 잡으려고만 해도 파리의 시민들은 길을 막고 도망치는 범죄자를 숨겨 주었으며, 레지스탕스를 알게 모르게 후원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파리에서는 대학생이 책을 옆에 끼고 길을 가기만 해도 끼니 걱정은 없다던가? 책 안에 폭탄을 숨겨 둔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시민들이 대학생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준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렇다는 생생한 증언들이 보고되기도 했다.
종종 멋모르는 순진한 아주머니들이 프락치들에게 사과 몇 알이나 우유 한 통 따위 소소한 것들을 건네주다가 걸리는 정도였지만.
“그리고… 밀고자들은?”
“…이미 대부분이 발각당한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 주기적으로 보고하던 ‘그 거물’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3주가 지났습니다.”
다르낭은 다시 탁상을 꽝 내리쳤다.
“대체! 그자 하나만 있어도 빨갱이, 볼셰비키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데 그자를 날려 먹어?”
레지스탕스들의 전국 연대 운동은 그 규모 때문에라도 헌병군과 독일 보안국의 감시에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헌병군은 그 기회를 노려, 체포 이후 전향해 비시 정부에 협력하기로 한 레지스탕스의 거물 하나를 전국 평의회에 집어넣고자 했고 보기 좋게 실패해 버렸다.
헌병군 내부에도 레지스탕스와 내통하는 이들이 있다는 정도의 추측은 모두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누군가 하는 문제가 있을 뿐.
수많은 사람들, 예컨대 작년 8월, 지하철에서 독일군 장교를 암살한 프랑스군 대령 피에르―조르주 파비엔 같은 군인부터 골목이나 건물을 청소하는 일용 잡부들까지 다 수사대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
몇몇은 보안을 위해 민간 직원들을 다 갈아치우고 싶어 했다.
“서류를 정리하는 소년 사환들이나 커피를 타는 여비서들, 지금 저렇게 문서를 작성하는 속기사들. 저런 사람들까지 다 일일이 조사해야 합니다! 저 프랑스 놈들이 어떻게 정보를 빼돌릴지 어떻게 압니까?”
“저들을 다 해고하자는 말입니까?”
“으음… 그건 좀….”
물론 이러한 주장은 그들과 달콤한 밀회를 즐기고 있는 꽤나 많은 독일군 상급 간부들에 의해 필사적으로 저지되었다. 무뚝뚝하고 덩치 큰 독일 여자들보다는 나긋나긋하고 가녀린 프랑스 여인들이 좋은 것은 누구나 비슷했다.
분명, 스파이가 존재할 수는 있다. 다들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인력들을 교체할 경우 업무가 마비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사람을 데려온다면 의사소통에 장애가 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이라고 꼭 스파이 짓을 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그들을 모조리 갈아치운다면 헌병군의 모든 업무는 정지한다. 하지만 다시 들어온 이들 중 레지스탕스 첩자들이 섞여 있지 않다는 보장도 없었다.
모든 인력을 독일에서 데려오지 않는 한 신원조사에는 항상 허점이 있었다. 또, 레지스탕스는 신규 직원들을 매수한다는 선택지까지 가지고 있었다.
“으음…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로군.”
감시에 감시에 감시를 더해도 줄줄 새어 나가는 정보를 다 막을 수 없었다.
바닷속에서 물과 싸운다는 선택을 한 게 아닐까…? 레지스탕스는 헌병군을 비웃듯, 자기네들의 표어를 내건 플래카드를 건물에 걸어 놓곤 했다.
<너희들은 익사하리라, 민중의 바닷속에>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었다.
“그놈들 돈줄부터 졸라매야 돈 때문에라도 밖으로 나오는데, 그것 하나 못 찾고 있나? 자네들이 밥 축내는 것 빼고 할 줄 아는 게 뭔가!”
사실 얼마 전엔 노동조합에서 들어가던 기부금 돈뭉치를 적발해 내 몇몇 불순분자들을 검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어느샌가 레지스탕스들은 돈줄을 새로 구했는지 곳곳에서 신형 무기로 무장하고 총질을 하고 다녔다.
“송구합니다 각하….”
“제기랄, 송구하다, 죄송하다, 염치없다, 유감이다! 그다음은 뭔가!”
“할 말이 없습니다 각하….”
“에잉… 빌어먹을 멍청이들.”
내무장관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