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화
사실 흐루쇼프가 무식하고 멍청한 거 빼면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나? 단순무식한 게 문제지. 진짜 원흉은 바로 리셴코, 저 새끼다.
“자네 말대로 옥수수를 저 광대한 땅에 심었다고 하지. 그러면 어떻게 됐겠나? 인민들은 식량 생산조차 제대로 못 한 채 굶어 죽고, 우리는 막대한 자원과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한 뒤겠지. 진짜로 그랬으면 자넨 사형이야, 사형.”
“흐읍….”
“이번엔 사형에 처하지는 않겠네. 자넨 앞으로 농업 근처에는 가지도 말게. 부정 탈 것 같으니. 빌어먹을 우크라이나의 대머리 같으니라고… 머리털이 없다고 농지조차 대머리 꼴로 만들어 버릴 셈인가? 썩 꺼지게!”
“예! 예! 서기장 동지!”
흐루쇼프는 뜨거운 담뱃재를 털지도 못한 채 다시 자기 자리로 달려가야만 했다. 어느샌가 자리가 바뀌어 상석에서 가장 멀고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진 자리. 한창 출세가도를 달려온 그로서는 말석이 굴욕적일 수밖에 없겠으나….
오히려 동료들의 배려라 해도 좋았다. 왜? 내가 자꾸 쟤 보면 피꺼솟할 테니까.
“리셴코 박사.”
“예! 서기장 동지!”
그는 이미 무슨 큰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한 것 같았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다지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사실 리셴코 역시 피해자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자연과학을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한 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권들이 시도했다.
우생학이나 골상학 등을 믿던 파시스트들, 적자생존 원칙을 자유주의에 비견했던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소비에트적 인간’을 만들겠다고 용불용설같이 검증이 안 되는 이론을 가져와 붙인 소련의 과학자들.
소련 지도부가 야심 차게 추진했다 말아먹은 실패를 남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어쩌면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자는 ―물론 숙청은 결국 스탈린이 했지만― 바빌로프와 같은 유전학자들을 서방의 스파이로 날조해 몰아내고, 자신이 내세우는 유사과학을 가지고 과학계를 주물럭거렸다.
이제는 충격적인 뭔가를 보여 주어야 했다. 조작과 눈속임으로 사람들을 속여 먹으려는 개만도 못한 학자들에게….
“끌고 나가게.”
“서기장 동… 읍읍! 읍!”
그 역시 발버둥 쳤다. 살고 싶겠지. 그게 생물의 본능인데.
그런데 누가 약 팔래?
탕! 탕! 탕! 밖에서 총소리 몇 발이 났다.
뒤처리는 알아서 깨끗하게 하겠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맞는데, 아무 흔적도 없이 깨끗한 것이 더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것은 스탈린의 기억에 아주 잘 남아 있었다. 뭔가 더 끔찍하고 거대한 것이 존재함을 암시하기에.
나는 파이프에 다시 담뱃잎을 채워 넣고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였다.
“후….”
숙청의 시간은 지났다. 이제 교육의 시간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 지식은 이 당시에 상상도 못 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생물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DNA라는 것도 아마 대전이 지나야 발견될 것이고, 이중나선도 60년대인가에 발견된다. 육종학? 아직은 지극히 원시적인 수준이다.
끽해야 고등학교 생물 지식만을 가지고 있어도 여기서는 아직 미지의 비의인 것이다.
DNA 이중나선 구조, 콜히친 처리를 통한 식물 배수체 생식, 광합성에서 캘빈회로의 구조같이 고등학교 생물2 정도에서 배울 내용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걸 알아내는 실험 내용에 대해서야 모르고, 피상적으로만 알 뿐이지만 그건 그냥 학자들에게 맡겨 두면 된다. 중요한가? 하면 갸웃거릴 수준이었기에.
“저자, 트로핌 리셴코는 사기꾼이라는 게 밝혀졌네. ‘소비에트적 과학’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그동안 우리를 현혹시켜 왔지만… 그것이 검증, 재현이 불가능하며 아예 틀린 연구라는 보고서가 내게 도착했지.”
보고서는 없다. 하지만 이들을 납득시키려면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한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정보랑 대조해 봤을 때 저 새끼는 사기꾼임! 이라기보단 어떤 ‘객관적’ 증거가 있다고 말하는 게 훨씬 더 인간이 수긍하기 쉬웠다.
누군가는 내가 너무 미국이나 외국에서 가져온 정보들을 신뢰한다고 하겠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순간 다음 처형자가 될 수도 있는데 어쩔 텐가? 그 정도로 내가 처형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지금 저들 보기에는 정말로 스탈린 같아 보일 테니.
“거짓말하지 말게. 나는 나를 속이는 걸 가장 싫어하지. 리셴코는 거짓을 보고하며 우리가 그에게 투자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처럼 이야기했지. 그가 주장한 춘화처리? 그게 모든 곡식에 보장될 거라는 근거는 어디 있지? 근거를 가져오게. 근거.”
이래도 인간은 조작된 근거를 가져오고 권력을 가진 상부의 눈을 피해 제 잇속을 챙기려 든다. 권력을 가진 지역당 관료와 공공사업체가 한 몸이 되는 이 고질적인 부패는 공산권 국가들을 끝까지 괴롭혔다.
이미 스탈린 시절 볼가, 이바노보 등의 지역당 부패를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가면 우랄 연방관구의 관료들은 대놓고 짬짜미질을 해서 잘못된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끌어올 만큼 대담해져 있었다.
소련 후반기에 가면 이들은 노멘클라투라가 되어 소련을 제 욕심을 위해 갈가리 찢어먹었다.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 상해방, 이런 단어로 설명이 부족한가?
부패는 반드시 처벌해야 했다. 벌써부터 리셴코와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 벌벌 떠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 네가 뭘 받아먹고 뭘 해 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리셴코는 없지.
“바빌로프의 유전자론이 맞았다는 게 검증되었어. 바빌로프는 복권될 것이네. 그의 이력은 분명 부르주아지적이고, 그의 이론 역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 소련에 이득이 되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적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반동이네. 바빌로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과학자이고 리셴코는 반동. 간단한 원리지.”
소련 생물학의 아버지라 할 만한 바빌로프는 서유럽 유학 등의 경력에서 알 수 있듯 부르주아지라고 모함당하기 딱 좋은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리셴코의 춘화처리에 대한 발견을 높게 사 그를 상부에 추천했지만, 리셴코는 그의 뒤통수를 치고 유전자설이 태생적인 한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이라고 모함했다. 그래서 그는 숙청당했고… 이제 그를 데려올 엔카베데 요원이 그가 수감된 굴라그로 이동 중일 것이다.
다행히도 바빌로프가 숙청 이전에 지어 두었던 레닌그라드의 종자 보관국은 멀쩡했고, 이로써 소련은 실제 역사에서 탄생부터 소멸까지 끝없이 소련을 괴롭혀 왔던 농업 문제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리야.”
“예? 서기장 동지?”
“저기 조선반도와 일본에… 현지인들이 키우는, 키가 작고 대가 두꺼운 난쟁이 밀이라는 품종이 있을 것이네. 그걸 반드시 구해 오도록 하게. 파쇼 이탈리아인들이 그와 비슷한 품종을 육종하여 밀 생산량을 엄청나게 증대시켰다고 한다네.”
“예! 서기장 동지.”
녹색 혁명, 실제 역사의 60년대에 엄청난 곡물 생산량 증대를 이끈 이 혁명의 핵심은 바로 난쟁이 밀 품종과의 교잡이었다.
난쟁이 밀은 긴 줄기를 키우기 위한 영양이 모두 이삭에 집중되어 생산량 증대 효과를 볼 수 있었고, 다품종 간의 교잡을 통해 질병 저항력 역시 부여할 수 있었다. 노먼 볼로그라는 농학자가 만들어 낸 소노라64라는 밀 품종을 통해 멕시코와 남아시아의 곡물 생산량은 그야말로 두 배로 증가했고, 우리 소련도 그래야 했다.
이 정도 알려 줬으면 농학자들을 갈아 넣어서 어떻게든 결과물을 가져오겠지. 나는 방향을 잡아 주고 어디서 뭘 찾아서 어떤 걸 할지만 알려 주면 된다.
“그리고 화학비료의 생산 역시 필요하네. 이는 화약 공장에서 약간의 설비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저 우크라이나의 대머리가 좋아하는 옥수수를 생산하려면 비료가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하지.”
흐루쇼프는 움찔거렸다. 내가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아마 그는 본인이 죽지는 않을 것이라 직감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미래가 밝아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는 유물론자들이네. 노동자들이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것만으로 생산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물론 저기 영웅적인 노동자들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지만… 더 많은 비료, 더 많은 트랙터와 농기계들, 더 많은 물자들을 공급해 준다면 영웅적이지 못한 이들도 영웅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네.
이제 우리는 농업에 대한 투자도 생각해 볼 때가 되었네. 집단농장은 쁘띠부르주아적인 농민들을 분명 ‘소련인’으로 개조하는 데 나름의 효과를 냈지.
그러나 집단농장이 소련인들을 게으르고 비효율적으로 만든다면 이는 분명히 반동적인 기구이네. 각 사회는 각 사회에 맞는 생산수단의 분배 양식을 가져야 하고, 집단농장은… 평가가 필요해.”
스탈린을 위시한 고참 볼셰비키들은 레닌 사망 이전부터 집단농장에 대한 갑론을박을 벌여 왔다. 당내 우파인 부하린 같은 이들은 신경제정책을 통해 부농을 인정하고 생산성 증대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농업을 끌고 가고자 했다.
스탈린은? 다들 알다시피, 부농계급을 박살 내고 농민을 모조리 집단농장에 몰아넣어 농업을 편리한 지갑처럼 활용했다. 인력과 물자를 꺼내 쓰는.
이는 분명 중공업화에는 도움이 되었다. 싼 가격에 공출되는 곡식은 도시노동자의 좋은 식량 공급원이 되었고, 많은 이들이 희망 없어 보이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왔다.
그러나 농업의 고질적인 저효율 저생산성은 소련의 발목을 잡았다. 텃밭에서 몰래몰래 키우는 작물이 전체 생산량의 1/4 가까이를 차지하고, 광대하고 비옥한 토지가 그저 처벌받지 않기 위해 대충대충 일하는 이들에 의해 쓸모없는 땅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 참사를 불러온 집단농장을, 그걸 열렬히 지지했던 내 손으로 해체해 버릴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많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는 집단농장을 포기했다.
‘내’ 정적 트로츠키는 소련의 급속한 집단농장화를 비판하며 충분한 농기계와 비료 등이 공급된 이후에나 집단농장화를 진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게 옳을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노력 ‘따위’로 생산량이 좌우되는 작은 규모의 농장을 집단화해 봐야 노동의욕의 감소밖에 불러오지 못한다.
그러나 기계와 비료 등이 충분히 공급되어 여럿이 협업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구조가 된다면, 그때는 농업을 집산화하고 농민은 분업화된 ‘농업노동자’가 될 수 있겠지.
“나는 여러분들이 명심했으면 하네. 소련에 도움이 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적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부르주아적이네. 그 반대 방향이 아니라. 흐루쇼프!”
“예! 서기장 동지!”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중 어떤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인가?”
“예?”
뜬금없는 선문답에 흐루쇼프는 당황하는 듯했다.
나는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경호원이 또다시 잽싸게 불을 붙여 주자 향긋한 담배 향이 간질간질하게 코를 적셨다. 후우… 무식한 새끼. 그렇게 말해 줘도 못 알아먹네.
“당연히 쥐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일세. 멍청한 대머리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