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화
“예! 서기장 동지!”
다들 영화를 좋아하긴 하나 보다.
생긴 거는 시베리아의 동토 벌판을 달려 불곰과 씨름하고, 통나무를 씹어먹을 것 같이 생긴 내 경호원들도 그 험상궂은 얼굴에 싱글싱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가, 진지하고 재미없고 교훈만 많은 소련 영화보다는 말은 못 알아먹어도 영상미와 헐벗은 여인들이 나오는 미국 영화를 더 좋아하는 듯했다.
솔직히 나도 그렇긴 하다. 그래도 ‘미제의 식민지’ 한국에서 20여 년을 살아와서 대충 영어를 알아듣는 정도가 되기에 진짜 한마디도 못 하는 나머지 사람들보다야 미국―영국 영화가 훨씬 재밌었다.
괜히 무슨 프랑스산 예술영화 같은 걸 가지고 오면 이해도 안 가고 졸려 죽겠고, 액션 영화는 2010년대를 살다 온 나에게는 연출이 너무 허접해서 웃길 수준이었으니 미국에서 만든 코미디나 에로에로한 영화들이 제일 좋았다.
여전히 그것은 잘 서지도 않으니 보는 거로 만족할 수밖에. 술 좀 줄이고 운동 좀 했더니 살짝 기미가 보이긴 하는데… 크흠흠. 아무튼 스탈린의 원래 취향은 그런 게 아닌 듯했지만, 취향은 바뀔 수도 있다고! 취존해 주세요!
“오늘의 영화는….”
아 씨바.
볼샤코프, 저 새끼 숙청할까?
아무리 봐도 문화부 장관으로 적합한 인재가 아닌 것 같다. 서기장이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 빠릿빠릿하게 파악하고 재밌는 걸 틀어주지는 못할망정… 부들부들….
다들 나랑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안되는 영어로 떠듬떠듬 인물들의 대사를 통역해 주려는 볼샤코프의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 사람이 뜁니다. 문을 엽니다.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동시통역은커녕 스토리를 외워서 간신히 이해를 하는 마당에 어떻게 설명이 되겠는가. 뭐, 나야 영어는 대강 알아들어서 볼 수 있기는 했다.
반응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한 것인지, 어두운 영화관 조명 아래서도 볼샤코프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팝콘이랑 콜라 가져다 놔서 봐준다. 렌드리스를 통해 국민들에게 필요한 소비재를 들여와야 하는데, 뭘 들여오면 좋을지 고민하던 관료들은 아주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일단 미국에 가서 있는 거를 다 한 번씩 써 보고 먹어 본 후 괜찮은 걸 찍어서 양산―구매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정된 것이 주코프가 그리도 좋아하는 코카콜라, 병사들이 환장하는 허쉬 사의 초콜릿 제품들이었고, 그 틈에는 팝콘이 끼어 있었다.
서기장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버터와 소금을 치고 짭조름하게 튀겨낸 팝콘의 맛을 본 크렘린의 고위 관료들은 영화 시간이 될 때마다 팝콘을 내심 기대하는 듯했고,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볼샤코프는 아예 영화실 뒤편에 팝콘 만드는 기계를 하나 들여다 놓았다.
지금도 팔뚝이 내 허벅지만 한 경호원이 뒤에서 기계를 돌리며 팝콘을 한 움큼씩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먹다 보니 버터구이 오징어나 콜팝, 나초와 치즈같이 영화관에서 먹던 간식들이 그리워졌지만… 건강 때문에라도 좀 덜 처먹어야 했기에 애써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나는 콜레스테롤 때문에 못 먹는데 밑의 부하들이 버터구이 오징어 쳐묵쳐묵 하고 있으면….
‘정말 숙청하고 싶었겠지.’
“서기장 동지, 이 팝콘은 정말 맛있는 것 같습니다.”
“우적우적…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이참에 우리 소련도 팝콘의 원료가 되는 옥수수를 재배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저기 중앙아시아 방면에 광대한 처녀지….”
내가 재미없어하며 팝콘만 열심히 쳐묵하고 있다는 걸 눈치깐 이들이 내 기분을 띄워 보려고 팝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내 옆옆 자리에 앉아서 팝콘을 세 바구니나 퍼먹던 흐루쇼프가 옥수수 재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흐루쇼프는 눈치도 없이 광대한 평원에 가득 자라는 황금빛 옥수수밭이 있다면 얼마나 인민들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역설했고, 몇몇은 그의 열성적인 웅변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같았다.
내 굳어진 얼굴을 본 이들만 빼면.
와, 어떻게 인간은 변하는 것이 없는 거지?
“볼샤코프! 영화는 여기서 끝내지.”
“예! 예! 서기장 동지.”
볼샤코프는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이마의 땀을 닦으며 후다다닥 도망갔다. 내 목소리에 섞인 역력한 분노를 감지한 이들은 다들 움츠러들었다. 흐루쇼프 역시 어리둥절한 채 잔뜩 쫄아들어 있었다.
“불.”
파이프를 잡아 들고 나직하게 말하자, 경호원이 잽싸게 달려와 파이프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솔직히, 실제 역사에서 흐루쇼프는 공과 과가 공존하는 사람이라고 그동안 나는 생각했다.
흐루쇼프가 추진했던 스탈린 격하 운동은 그 시대에 나름의 공헌을 했고, 시행했던 해빙―정치적 개혁은 스탈린 시대의 공포정치를 누그러트리고 조금 더 나은 소련을 만들었다.
숙청의 결과물이 시베리아의 굴라그나 엔카베데에 의한 총살이 아니라 적당한 연금을 받는 야인 생활 정도로 나아진 것 역시 흐루쇼프의 공이었고 이로써 소련은 죽음을 각오한 살벌한 정치적 암투가 사라질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적 중공업 편중에서 소비재, 경공업 생산에도 일정 투자를 해 인민의 삶을 나아지게 했기도 하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오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비록 브레즈네프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고, 다시 스탈린주의가 돌아와 소련은 회색 정체기를 맞이했지만… 아무튼 그 정도의 공은 있었다.
그러나 과 역시 지대했다. 모택동과 비슷하게, 농업의 농 짜도 잘 모르는 광산 노동자 출신에 무학 문맹의 무식쟁이가 미국에서 본 옥수수밭에 뻑가서 중앙아시아의 그 졸라 춥고 건조한 땅에다 옥수수를 키워 보겠다고 삽질하다 농업을 처말아먹은 게 제일 컸다.
트로핌 리셴코 같은 사이비 새끼 말을 믿고 춘화처리니 용불용설이니 하다가… 아! 리셴코! 바빌로프!
“다시 회의장으로 가세나. 흐루쇼프, 자네는… 각오하게.”
* * *
파이프 담배 연기를 후 내뿜자 짙은 회색의 연기가 방 안에 자욱하게 퍼졌다. 나는 다리를 꼬고 말없이 파이프를 뻐끔뻐끔했고, 경호원들은 그 험상궂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태의 원흉, 흐루쇼프는 참석자들의 눈총을 제대로 받으며 울먹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탁, 탁, 탁. 내가 탁자를 두드리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떨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쿨리크가 ‘스파이’ 혐의로 즉결 처형당했다.
그가 개새끼이긴 해도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으나 이들은 그가 처형당하는 것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켜봐야 했다.
단 6개월 만에 또 한 명의 고참 당원이 공개적으로 이렇게 당하는 것을 봐야 하는 당료들과 관료들은 그야말로 제대로 겁에 질린 듯했다.
후… 무서우면 좀 똑바로 하든가? 물론 아직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시대라 해도… 아니, 씨발 소련 추운 거 모르나? 꼬우면 알보병으로 전선에 한번 나가 보시든가!
“리셴코 박사가 도착했습니다. 서기장 동지.”
“들라 하게.”
트로핌 리셴코, 소련의 몰락에 혁혁한 공을 세운 빌어먹을 유사과학자 놈이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오다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 소리는 모두에게 매우 잘 들렸고, 리셴코는 모두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리셴코 박사. 앉으시게.”
“예!”
허겁지겁 본인에게 배정된 자리로 달려가 앉은 리셴코는 잔뜩 움츠러든 채,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려 했다.
명백히 흐루쇼프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대체 자기가 어떻게 연관된 것일지를 파악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럴 필요 없는데.
“후… 흐루쇼프?”
“예, 서기장 동지.”
“이리 와 보게.”
뜨끈한 담배 연기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가 내뿜자 금세 연기로 주위가 자욱해졌다.
파이프를 쥔 손수건 너머로도, 은은하게 전해지는 열기가 느껴졌다.
후, 한 모금 다시 담배를 머금은 나는 무릎으로 비척비척 기어 내 앞까지 와서 대머리 뒤통수를 보인 채 벌벌 떨고 있는 흐루쇼프의 머리통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잡히는 대로 끌려온 그의 뒤통수에 뜨거운 담뱃재를 털었다.
치이이이익!
“흐읍!”
흐루쇼프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툭툭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인가? 질질 짜기는. 뜨거운 담뱃재가 맨살에 닿아 살 타는 냄새가 났다.
모든 사람이 꽁꽁 얼어붙어 흐루쇼프의 굴욕을 지켜보고 있었다. 꽤나 굴욕적일 것이다. 이때까지 무학의 광부에서 출세해 상승가도를 달려온 그가 모두 앞에서 대놓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니.
그러나 이렇게라도 쐐기를 박아 놔야 했다. 빌어먹을 멍청이들.
사실 흐루쇼프는 그나마 나았다. 처녀지 개간한다고 안 그래도 씹창난 농업을 개 씹창내 놓기는 했어도, 빨리 과를 인정하고 외국(주로 미국)에서 곡물 수입 당겨와서 막기는 했다.
모택동은 그마저도 자존심 상한다고 안 해서 몇백만이 굶어 죽은 대참사를 일으켰고. 그래서 대약진 운동으로 수백만, 수천만이 굶어 죽었다. 모택동이 나중에 그럴 권력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본때를 보여 줘야 했다.
흐루쇼프, 똥 밟은 셈 쳐라.
“자네… 같은 대머리에, 이 담배를 뿌리면 뭐가 자라겠나?”
“아… 아닙니다 서기장 동지.”
“그래, 밭이 문제지. 자네가 대머리인 이유가 뭔가? 머리털이 두피에 적합하지 않던지, 두피가 머리털에 적합하지 않던지. 그 둘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흐루쇼프는 평소에 재미없는 개그를 치기로 유명했는데, 그나마 흐루쇼프가 남을 웃기는 데 성공하는 것은 대머리 자폭개그를 할 때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대머리 가지고 놀리면 평소에는 사람들은 와락 웃고, 흐루쇼프는 그걸 받아서 개그를 치며 좌중을 웃게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웃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서기장은 옥수수에 저렇게 편집증적으로 반응했고, 누가 죽고 누가 굴라그로 끌려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야 이미 계획을 세워 뒀지만.
“그런데… 자, 미국인들이 옥수수를 키운다 하지. 그 땅은 비옥하고 따뜻한 땅일세. 우리 소련에 터키나 발칸 국가들이 합류한다면 모를까… 우리에게 그만큼 따뜻한 땅이 있나?”
“아닙니다, 서기장 동지.”
미국의 빵 바구니라 불리는 대평원 지역, 그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아이오와가 대충 북위 40도 언저리다. 소련령하고 비교한다면 코카서스 산맥이랑 비슷한 정도다. 흐루쇼프가 말한 ‘처녀지’는? 우랄, 볼가 강변, 북카자흐스탄 일대니까… 북위 50도가 넘는 동네다.
스탈린그라드보다도 위도상 북쪽에 있고, 건조하고 춥기로는 세계에서 어디 밀릴 만한 곳이 없다. 뭣도 모르면서 이 추운 동네에다 수십만 명의 인력을 던져 넣고는 자! 옥수수 생산해! 라고 명령한 멍청이가 바로 내 앞에 있는 멍청이고.
그 동네는 땅이야 비옥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람 손이 안 닿은 ‘처녀지’라는데 개간의 의의가 있는데… 아니, 아무도 거기서 농사를 지었으면 안 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건가?
날씨만 문제가 아니다. 사실 작물의 문제에 가깝지. 옥수수는 C4 식물로 광합성 방법 자체가 밀이나 벼, 콩과는 다르고, 광합성의 최대 효율이 높은 대신 그만큼 고온건조한 기후와 많은 비료를 요구한다.
아마 이 세상에서는 아직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런 저간의 사정도 모르는 채 무조건 가져다 심으면 된다! 리셴코가 맞다고 해 줬다! 라고 밀어붙인 이 빡대가리는… 후….
“옥수수는 덥고 건조한 사막 기후에서 자라지. 사탕수수와 유사하다고 하네. 우리 소련이 사탕수수를 기를 수 있는가?”
“아닙니다, 서기장 동지.”
“그래, 이렇게 좋은 담배를 자네 머리털 대신 털어 줘도 자네 머리통에선 담배도 머리털도 안 자라지 않나? 차라리 담배라도 자라면 쓸모 있을 텐데.”
“죄송합니다! 서기장 동지!”
죄송하면 끝나냐?
농업 생산성을 저해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소련에 적합하지 않은 작물을 키우도록 유도하는 사보타주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숙청, 굴라그에 처박거나 총살해 버려도 된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최소한 흐루쇼프를 그럴 것까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