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화
소련군은 실제 역사나 통념과는 다르게 독일군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잘 보급을 받고 있었다.
배후에는 여러 요인들이 개입해 있었다.
먼저, 서기장은 친히 보급 문제를 굽어살피며 군대는 잘 먹어야 진군한다며 보급에 충실할 것을 명령했다.
서슬 퍼런 명령 앞에 일선 실무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말단의 부대들까지 보급물자들이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뭐, 명령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리야 직속의 엔카베데 요원들은 수시로 일선의 부대를 급습해 혹시나 장교들이 보급품을 횡령하여 병사들이 못 먹고 못 입고 다니는 사례가 있는지를 점검했다.
“이 자는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를 사보타주하려 한 악질 반동분자다! 끌고 가!”
“으아아악! 살려 주십시오!”
그 과정에서 꽤나 많은 장교들이 발각되었고, 당연히 이들은 죄질에 따라 다양한 형벌을 받았다. 주로 내려지는 처벌은 형벌부대에 소총수로 배속되는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최전선에 세우라는 지시를 특별히 내렸다.
죄질이 심각할 경우에는 부대의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을 했다.
처형은 근대적 방식과 전근대적 방식이 있었는데, 근대적 방식은 근대의 산물인 총화기, 그중에서도 기관총이나 대공포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전근대적 방식은? 전근대적이라기에는 역시 근대의 산물인 자동차가 무려 다섯 대씩이나 이용되는 방법이었는데… 꽤나 뒷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았고, 병사들은 잔인한 환호나 충격적인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 뒷마무리를 해야 하는 병사들은 주로 후자였다.
그리고 범죄자가 형벌부대로 가든 즉결처형당하든 이들의 가족들은 붉은 군대를 사보타주하려 한 스파이 혐의자의 가족이었기에 똑같은 스파이 혐의를 적용받아 시베리아의 가장 혹독한 굴라그로 보내졌다.
이러한 사례들이 대략 이삼백 건 정도, 처형당한 인원으로는 대략 1천 명 정도가 쌓이자 장교들은 알아서 기는 듯했다.
해먹은 놈들을 모조리 잡아낼 수는 없겠지만, 모조리 잡아낸다면 군대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으니 악랄한 베리야와 엔카베데마저도 모든 사례를 잡아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미국이 도와주는 게 제일 큰 효과를 나타냈다.
* * *
“와! 오늘 무슨 날인가?”
“에라이, 오늘이 새해 첫날이잖아!”
병사들은 급식소 앞에 우글우글거리며 오늘 뭐가 나오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고소하고 향긋한 고기 굽는 냄새가 진지 안에 온통 진동했다. 평소라면 비스듬히 누워 이등병에게 오늘 뭐 나오는지 가서 보고 오라고 시켰을 고참병들도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대체 무엇이 이리도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지 보기 위해 어슬렁대며 모여들었다.
평소에 이들이 못 먹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곧 벌어질 최전선이라면 모를까, 최일선 뒤편에서는 최대한 병사들을 잘 먹이기 위해 소련 군부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수백만 명이 먹을 짬밥을 충분히 보급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역사였지만 어쨌든 군바리는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법.
태평양을 건너고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온 미제 깡통 식품과 보존식들, 그리고 소련 인민의 노력이 곁들여져 병사들은 꽤 잘 먹고 있었다. 2010년대의 한국군보다도 통계적인 육류 섭취량이나 칼로리 면에서 우월할 정도로.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법, 항상 더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고 싶어 하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스팸의 짭조름하고 기름진 맛에도 환호하던 병사들은 이제 너무 기름지고 짜다고 물려 하는 이들도 있었고, 초콜릿의 수요는 ―담배로 평가된 거래가격― 대대적인 발치의 폭풍 작전 이후 팍 줄어들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병영은 서기장이 하사한 신문물에 정면 강타당하고 말았다.
“와! 이거….”
“으으음…!”
일찍이 소련 역시 미국의 문물, 햄버거를 겪어 본 후 이를 도입하려 한 적이 있었다.
1936년, 미국과의 경제협력 증진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고참 볼셰비키이자 당시 식품산업부 장관 미코얀은 햄버거를 맛보고 이를 소련에도 들여오고자 시도했다. 사람들은 이를 ‘미코얀 커틀릿’이라고 불렀다.
햄버거 패티의 대량 생산과 조립식 제조는 그야말로 소련의 이상에 딱 들어맞았다.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노동자에게 싸게 공급할 수 있는, 그야말로 조직된 노동의 혁명적인 우수함을 보여 주는 음식이라니!
물론 곧이어 독일과의 전쟁이 터지며 잠시 미루어지기는 했다.
부르주아지를 위해 요리사가 일일이 신경 써 만들어 내는 것보다, 추운 겨울 탓에 기름지고 짜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러시아적 입맛에도 들어맞는 그야말로 소련적인 식품이 바로 햄버거였다.
서기장은 이를 밀어주면서 “소련과 노동계급을 위해 좋은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적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반동이다!”라고 교시했다.
햄버거가 미국에서 왔던지, 혹은 소련에서 만들었던지, 그런 것은 상관없고 병사들이 먹고 열심히 전투에 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다!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이듯, 음식이 맛있고, 싸고, 쉽게 공급이 가능하다면 좋다!
그래서 소련의 관료들은 소련 인민과 병사들의 좋은 전우인 스팸을 만들어 준 호멜 사와 계약을 맺고, 햄버거에 필요한 패티를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한 수단을 확보했다.
그 성과는 조국을 수호하는 위대한 전쟁이 새해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모든 병사들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서기장의 엄명에 의해 재빨리 전군에 전달되었다.
* * *
햄버거를 처음 본 병사들은 어리둥절했다.
“뭐지? 이건 뭘 하라는 거지?”
물론 도시 출신이거나, 이전의 ‘미코얀 커틀렛’을 겪어 본 이들은 손쉽게 주어진 빵과 패티, 피클 및 치즈를 조립하는 데 성공했고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기에 순식간에 이 방법은 전군으로 퍼져 나갔다.
“으으음…!”
니콜라이 역시 약삭빠르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분대원, 이반에게 배운 방법대로 이 햄… 뭐시기,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서기장님 커틀릿’을 빵 사이에 끼워 한입 베어 물었다.
터져 나오는 육즙과 씹히는 고기의 맛, 그리고 입 안 가득 퍼지는 마요네즈의 풍미까지!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다. 곧 겪어야 할 재발치를 잠시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위에서는 아무튼 보급을 해 주었기에 그는 다양한 교환의 매개체로 담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어이, 여기 약속한 담배 한 갑 받으라고.”
“오! 흐흐흐흐흐….”
이번에는 병영에서 유명한 골초인 고참 취사병에게 담배 한 갑을 통으로 쥐여주고 서기장님 커틀릿 위에 노르스름한 보급용 마요네즈 한 숟갈을 듬뿍 퍼서 받아올 수 있었다.
‘아아,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그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중대장 동지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서기장 동지께서는 병사들을 사랑하신 나머지 매주에 한 번씩은 이 커틀릿을 먹게 해 주고자 하신다고 했지만… 뭐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엄청난 것을 매주 먹는 것은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심한 사치 같았다.
이곳은 전장인데 당연히 형편없어야 할 식사가 집에서 먹는 것보다 좋다는 것은 뭔가 불합리한 것 같았다.
“분대장 동지! 분대장 동지!”
“으음?”
다시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약간이라도 더 풍미를 음미하기 위해 우물거리던 니콜라이를 익숙한 목소리가 불렀다.
뭐야 이반, 무슨 일인데? 하는 눈치로 보자 눈치 빠른 이반은 바로 용건을 알려 주었다.
“중대장님이 부르십니다!”
“으으….”
아… 일단 장교가 부르면 빨리 가야 했다.
훈장을 수훈한 영웅적 병사라 할지라도 그는 아직 병장, 중대장은 물대위라 해도 대위. 단 일 초라도 커틀릿의 맛을 더 음미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아, 서기장님, 제발 저희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위대한 서기장님의 이름으로, 아ㅁ… 음… 소비에트 우라!’
우라! 우라! 우라!
마지막 커틀릿 한 입을 뱃속으로 넘기며 그는 서기장의 만수무강과 작전의 성공을 기원했다.
“후….”
중대장의 막사 앞에 도착하자 벌써 입에 남은 마요네즈의 농후하고 진한 뒷맛이 그를 아쉽게 했지만, 아무튼 무슨 대단하신 일인지 들어나 보고 싶어 그는 슬그머니 들어갔다.
“어! 왔는가!”
“옙, 병장 니콜라이 페트로프!”
중대장은 실실 웃고 있었다. 어… 좋은 건가? 화난 것보다는 나았지만 아무튼 조금 불길했다. 아니, 애초에 병사와 장교는 엮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장교와 같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자네, 읽기, 쓰기랑 산수는 어느 정도 할 줄 아는가?”
“예? 음… 조금은 할 줄 압니다.”
“그래?”
‘엥? 대체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거지?’
아마 농촌 출신 병사들 중에서는 그래도 꽤 잘하는 편에 들어갈 것이고 아무래도 도시에서 교육받은 병사들만큼은 못 할 것 같다.
한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어설프게나마 읽기와 쓰기, 산수를 배워 놓기는 했지만 굳어 버린 그의 머리에는 이 복잡한 내용들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 간신히 어물어물 글을 읽어내려갈 줄 아는 정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복잡한 단어들은 한 자 한 자 떼어 읽어야 했다.
“나는 자네를 장교 교육과정에 추천하고 싶은데. 어떤가?”
니콜라이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 저 말입니까?”
“그럼! 자네처럼 우수하고 용맹한 병사는 더 높은 위치에서 남들을 통솔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저는….”
“뭐, 글하고 산수는 열심히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네! 자넨 이미 훈장을 받은 게 있어서 꽤나 가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정 안 되겠으면 몇 달 정도 시간을 두고 지원해도 되네.”
…장교?
아마 시간이 지나면 하사나 중사 정도로 진급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초급 장교들만큼이나 일선의 부사관들 역시 빠르게 소모되었고, 그 자리는 병사들 중 전쟁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자들로 채워졌다.
병장을 단 것이 남의 전공을 가로채 특진을 한 것이기에 병장이나 분대장으로서 자질이 있기나 할까, 그 스스로도 의심했고 지금도 어찌어찌 따라가고나 있었는데 장교라니?
“생각해 보게. 글과 산수를 배우는 것은 결국 유익할 테니.”
“옙! 감사합니다!”
중대장은 그에게 배급 필기구와 손때 묻은 책 두어 권을 집어 주고 다시 내보냈다.
얼떨떨한 채로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니콜라이는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가 장교가 될 수 있을까?’
그가 봐 온 장교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형편없는 자들이었다. 병사를 사지로 밀어 넣을 권력은 있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들과 같이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자들. 정치위원? 이제 어디 갔는지 모를 세묜을 제외하면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현재 중대장은 그래도 꽤나 좋은 사람이었다. 능력 있는 ―그렇게 사람들이 믿는― 병사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 주었고, 이런 기회까지 제공해 주었다. 니콜라이 그 자신이 중대장이나 다른 병사들이 믿는 만큼 능력이 있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장교, 장교가 된다면… 무슨 장교가 되어야 하지?’
아직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했는데 벌써 니콜라이는 이것저것을 생각해 보았다. 제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장교 계급장을 뽐내는 그 자신의 모습을.
하지만 영 어울리지는 않았다.
물론 죽고 싶지 않았다. 죽지 않고 몸 성히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장교가 되면 죽을 확률이 낮아지지 않을까? 니콜라이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기 대신 죽으라고 다른 병사들을 내모는 그 빌어먹을 장교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는 분대원들이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언제쯤 다시 서기장님 커틀릿을 먹을 수 있을지 토론하던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니콜라이를 환영했다.
“와! 분대장 동지!”
“빨리 와서 다음에는 언제 이게 나올지 내기 걸어요!”
그는 헛웃음이 나왔다. 당장 내일 포탄이 떨어지고 돌격하다 기관총에 어육이 될 수 있는 판에. 그렇다고 즐겁고 희망찬 내일에 눈을 감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 그런데 니콜라이 동지는 내일모레 발치하는 것 아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