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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71화 (71/300)

# 71

71화

결코 지나갈 것 같지 않… 다기보단 애초에 올 줄도 몰랐던 한 해가 지났다.

1941년의 마지막 날, 그리고 곧 올 1942년의 첫날을 기념하여 열린 조촐한 연회에서 우리는 지난 한 해를 결산했다.

“승리를 위하여!”

“위하여!”

결산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해 보이고, 그냥 그동안 일하느라 못 먹은 술 지금 핑계 있을 때 많이 처먹고 죽자! 였다.

‘나’는 혹시나 모를 뇌출혈을 대비해서 술을 최소한도로 줄인 상태였지만, 부하들이 공손히 바치는 술 ―주로 40도정도는 가볍게 넘기는 보드카!― 을 퍼먹다 보니 얼근히 취기가 올라왔다.

‘어우야… 이걸 이렇게 퍼먹으니 러시아가 개판이 나지.’

내가 적잖이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오늘은 마시고 죽어도 괜찮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부어라 마셔라 달리고 있었다.

“자, 자, 잠시….”

“와아아아!”

꼰대 같지만… 이때 또 한마디 해야겠지.

잠시 목을 고르는 동안 좌중은 술기운 반 아첨 반으로 열렬히 환호했다.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항상 이런 식으로 추켜세워 주는 것이 뒤따랐다.

모두 내 말이 옳다고 말했고, 틀렸다 감히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틀렸다는 결과가 나타났어도 그걸 숨기기 바빴고, 내 잘못이 아니라 다른 하급자들의 책임으로 책임 소재를 돌려 엉뚱한 사람이 처벌받게 하기도 했다.

난 솔직히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뿐… 진짜 스탈린과는 거리가 멀었고, 항상 뻔한 아첨에 넘어가지 말자 다짐했어도 기분이 좋아지고 혹하기도 했다.

“여러분… 당과 정부의 여러 동지들. 한 해 동안 함께 달려온 우리 형제들. 모두 수고들 많으셨소.”

“우라! 우라!”

그래. 진짜 다들 열심히 일했다.

이건 입에 발린 말이나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짜였다. 참모들, 비서들, 부관들 모두 눈에 다크서클이 생기고 가끔은 코피가 터지도록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하게 만든 것은 나였지만 뭐 어쩔 재간이 있나? 이럴 때 미리미리 사과해 둬야지. 아무튼 다들 치하를 받고 나니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렇다고 뭐 며칠씩 휴일을 주는 건 안 되고 내일 지각하는 것까지는 봐줄 수 있다.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오. 저 간악한 파시스트 무리는 어머니 조국의 대지를 기습하여 짓밟고, 우리 국민들과 영토를 유린하였소! 너무 많은 아픔을 겪고 있을 인민들을 기억하시오. 항상!”

“예! 서기장 동지!”

“우리는 인민을 위해 이 자리에서 일하고 있소. 여러분 하나, 하나마다! 다 인민의 의지를 대행하고 있는 것이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익이 아니라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을 위해 헌신해 주기를 바라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지만 아무튼, 연설이 길어질수록 좋지 않다. 적당히 교훈적이고 좋은 내용으로 끝마치고 건배를 한 순배 돌리고 나니 훅 피곤이 몰려왔다.

연회에 초대받은 관료들은 다들 기분이 좋은지 옆 사람들과 떠들며 만찬을 즐기고 있었고, 나도 상석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양념된 돼지갈비 조각들을 쿡 찍어서 우물우물 삼켰다.

저 관료들은 내 한 마디, 손짓 한 번에도 날아가 버릴 수 있지만 그 자신들 역시 일선의 병사들을 그렇게 괴롭힐 수도 있었다. 저들이 사익을 위해 횡령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사보타주한다면 그 피해는 모두 군인들이 피를 흘려 갚아야 했다.

‘웃고 떠들고 있어도… 크나큰 사고를 저질러 버릴 수 있는 자들.’

진짜 스탈린은 저런 관료조직 내부의 파벌주의와 보신주의를 엄벌과 능력에 따른 승진으로 통제해 기강을 잡고 제2의 열강인 소련을 건설했다.

하지만 나 따위가, 일개 대학생일 뿐이었던 내가 스탈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런 게 가능할까?

가끔은 스탈린의 기억과… 그의 인격에 침식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나는 베리야를 끔찍한 페도필리아, 잔인한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아마 충성스러운 부하 내지는 심복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뭐라 해야 할까… 융합? 침식? 그 비슷한 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방금 관료에 대한 생각도 스탈린의 기억에서 떠오른 것과 더 비슷했다. 한국의 대학생이었던 나라면 아마 ‘관료’라고 하면 동사무소의 아저씨 아줌마들을 생각하거나 행정고시, 공무원 시험, 이런 게 떠올랐겠지 관료를 숙청하고 통제하는 것이 떠올랐을까? 글쎄….

솔직히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은 분명 스탈린의 몸, 잘 서지도 않는 60대의 몸이었다. 지금 조금 마셨다고 피로해서 얼른이라도 들어가 자고 싶은. 기억은…? 인격은? ‘나’인가, 스탈린인가.

그리고 스탈린의 몸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내 원래 기억대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대체 어떻게 될까?

‘젠장, 빌어먹을… 뭐… 그때 가 봐야 알겠지.’

최소한 나치 독일에 잡혀 처형당하고 나니 그냥 죽어 버렸다 같은 엔딩보다는 승리자로서 잘 먹고 잘살다가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비록 세우지도 못하고 뭘 먹자니 바로 다음 날 속이 더부룩하고 잘 산다기에는 너무 많은 일에 치이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는 그게 제일 궁금했다.

역사를 내 손으로 새로 써 가는 입장에서 과연 미래의 세계는 좀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을까? 단 6개월 만에 실제 역사의 흐름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세계는 흘러와 버렸다. 꼭 내 탓뿐만은 아니지만 히틀러로 추측되는 저쪽의… 누군가 역시 개입했고.

서유럽은 모조리 독일의 손아귀에 넘어가 버렸고, 영국은 결국 무너지고 독일군은 그들의 최후 저항까지 분쇄하고 전 브리튼섬을 장악했다.

아직 저항군들이 테러 활동을 저지르고 있다지만 그건 뭐 6주 만에 ‘엘랑’, 항복한 프랑스나 다를 바 없었고… 미국은 파나마에 한방, 진주만에 한방을 얻어맞은 후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치고 나오는 일본군에게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하나 내주고 있었다. 괌, 웨이크섬, 말레이반도와 필리핀까지.

“서기장 동지! 꼭 내년에는 파시스트들을 어머니 조국의 대지에서 몰아내겠습니다!”

“음, 음, 각오는 좋군.”

주코프가 얼근히 취한 채 저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연합국 중 우리 소련만은 선전하고 있었다.

현재 전선을 평가하자면 영토로만 보면 43~44년 수준의 전선까지 도달해 있었다.

남부에선 루마니아가 항복하고 헝가리군이 전선에서 본국 수비를 위해 완전히 이탈해야 할 상황이 되었으니 44년의 전황 정도로 평가할 만했고, 북부는 레닌그라드가 위협받지 않고 있으니 역시 레닌그라드 해방 이후인 44년?

중부는 스몰렌스크, 비텝스크, 고멜 등 랜드마크가 되는 도시들이 독일군 손에 있으니 43년 정도.

실제 역사라면 독일군이 승승장구하며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로 진격했을 42년이 아직 밝기도 전에 이 정도의 전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후… 미국에서 엄청나게 도움을 받기는 했어도, 꽤 잘한 것 같았다.

“주코프, 자네가 잘 해 주었지.”

“감사합니다! 서기장 동지!”

베리야는 아쉬운 듯 나를 흘끗거렸다. 베리야는 잔혹한 것만 빼면 정말 유능하고 좋은데 그 잔혹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주코프를 싫어하는 그는 애써 그를 폄하하려는 듯 큰 소리로 주절주절 떠들었다.

“이게 다 서기장 동지가 만들어 내신 신무기 덕분 아니겠습니까? 저는 서기장 동지의 그 놀라운 재능에 감탄할 뿐입니다!”

“됐네. 이런 자리에까지 와서 금칠은 무슨… 허허.”

뭐, 사실 테크도 엄청 빨리, 잘 올렸다.

나치 독일이 배치한 5호 전차 판터에 맞선 신형 중전차, 원래 세계였으면 스탈린 전차였고 이 세계에서는 부됸늬 전차인 그 중전차가 시험배치 단계에 들어왔다.

실제 스탈린 전차의 단점들을 미리 몇 가지 개선해 IS―3의 설계와 비슷해진 부됸늬―1, 줄여서 SB―1 전차는 아직 많은 실전을 겪지는 못했으나 일단 실험해본 결과 꽤나 호평을 받았다.

소련 전차의 고질적인 문제들, 신뢰성이나 내부 공간활용 등은 미국에서 초빙되어 온 기술자들과 설계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어 해결할 수 있었다. 생산성? 확정 명령만 내려오면 한 달에 150대 정도는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역사랑 비교했을 때, 그리고 42년 초라는 시점을 고려했을 때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신형 전투기, 미국 썬더볼트의 디자인에서 착안한 ‘몰니야’(번개) 전투기도 개발 중이었고, 고고도에서도 제 성능을 낼 수 있게 해주는 과급기, 터보슈퍼차져를 자체생산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 중이었다.

조종사들도 미국이 2차대전 당시 그랬던 것처럼 만 단위로 교육 중이고. 심지어 독일이 사용했던 V1 미사일을 베껴와 오히려 독일에 쏟아붓고 있으니 이 정도면 늘 털리기만 했던 소련 공군도 어느 정도 제 몫을 하게 될 것이라 기대해 볼 만했다.

보병 수준에 이르면, 무장만큼은 AK와 RPG로 무장한 50년대식이니 한 10년은 빠르다고 보면 된다!

괜스레 뿌듯했다. 야, 내가 그래도 이만큼이나 해냈구나! 물론 나야 개념과 몇 가지 도안만 던져 주고 실제로 개발해 온 건 특수 굴라그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엔지니어들과 과학자들이겠지만….

아무튼. 음음. 전쟁이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보상을 해 주면 되겠지.

하도 술 한 잔씩 바쳐 댄 아랫사람들 덕분에 보드카를 몇 잔이나 먹었던 터라 술기가 확 오르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아부를 들어서 그런가?

“난 이만 가 보도록 하겠네. 아니, 쉿! 괜히 좋은 분위기들 나 때문에 깰 것은 없고….”

자고 싶었다. 으으… 경영 시뮬레이션이나 전략시뮬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 실시간으로 하고 있으려니 몸이 남아나질 않는 것 같았다.

사실 본질적으로 나는 이걸 소련이라는 국가의 서기장 일이 아니라, 전략 시뮬 멀티로 인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싱글 플레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독일에 누가 있어서 멀티게임이 되어 버린….

문제는 저 새끼가 상상 이상의 또라이라는 데 있었다.

대체… 유태인 여자들을 종군위안부로 딸려 보내고, 런던을 그냥 싸그리 불태워 버리는 게 정상인일까?

수십만 명이 있는 도시를 봉쇄해 굶겨 죽이면서 백기를 들고 나가려 하는 시민들을 인정하지 않고 쏴죽일 것을 명령하는 새끼가 있고, 그 새끼가 하필 세상에서 제일 또라이 같았던 나라의 지도자가 되다니.

이겨야 했다. 그 새끼가 이기면 대체 세계에 뭔 짓을 저지를지 두려웠다.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으려면, 그리고 기왕에 하는 김에 우리나라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려면 이겨야 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일단 좀 자고 내일 또 일해야지… 후, 눈물 난다.

“스탈린 동지 우라! 우라!”

“와아아아아! 만세!”

“이봐, 그런 것 좀 하지 말라니까?”

참… 이런 개인 숭배는 좀 어떻게 해야 하는데. 괜스레 날 향해 과장된 칭송과 환호를 날리는 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자리를 떴다. 내가 누리는 이 호사가 화려할수록, 한데서 일하는 인민들이 더 고달파진다.

‘오늘 논 것을 보충하려면 내일 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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