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화
남부집단군은 모델 원수의 영웅적인 지휘에도 불구하고 결국 퇴각하고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에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 끌고 갈 수 없는 중장비들을 버려 둔 채 서쪽으로, 서쪽으로. 온 길을 되돌아가는 독일군들은 분루를 흘렸다.
“개돼지만도 못한 유태―볼셰비키 놈들….”
“언제쯤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정복해야 할 게르만 민족의 ‘생활공간’, 레벤스라움은 아직도 한참 멀리 남아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너무 많았고, 혹독하기로 유명한 러시아의 겨울은 매섭게 독일군의 얇은 옷가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와들와들 떨리던 팔은 이제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고, 발가락에는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 위대한 나폴레옹마저도 러시아를 끝내 무너트리지 못하고 패퇴하지 않았던가? 역사학에 조예가 있는 몇몇은 탄식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주장을 쉬이 반박했다.
“나폴레옹은 끝까지 영국을 무너트리지 못했잖아.”
“총통 각하의 이끎으로 러시아를 빼고 나머지 유럽을 전부 정복했는데? 그러면 나폴레옹보다 총통 각하가 더 위대한 것 아닌가?”
여기에 모델 원수의 방어전은 빛을 발했다. 전차와 야포를 버리고 왔을지언정, 상당한 수의 독일 병사들은 결국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동상으로, 혹은 다른 부상으로 어디 한 곳을 자르고, 몸 성히 돌아가지는 못했을지언정 어쨌든 저들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병사들은 이야기했다. 뭘 넣어 만든 것인지 모를 허접한 수프를 얼어붙어 감각이 없는 손으로 떠먹으면서도.
“위대한 도이치 민족은 승리할 것이다!”
영국이 굴복했고, 저 광대한 땅이 온통 독일인의 손에 들어왔다. 지중해에 면한 지브롤터부터, 북극해의 노르웨이까지! 야만적인 러시아 스키타이들만 남았다. 도이치 민족의 승리까지 남은 것은 단 하나.
병사들은 승리의 꿈을 꾸었다.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난다면 집으로 돌아가, 게르만의 지배하에 하나 된 유럽의 일등 신민이 되는 꿈을. 드넓게 펼쳐진 저 광야는 땀 흘려 일하는 아리안족의 농토가 되리라!
얼어붙은 동토를 걸어 퇴각하면서도 그들은 달콤한 꿈을 꾸었다.
* * *
독일군들이 꿈을 꾸는 동안 소련은 차근차근 대계를 실현에 옮겨 가고 있었다.
먼저, 독일군의 예봉이 무뎌졌기에 발생한 잉여 전력은 장기적으로 독일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투입되었다.
“터키의 이뇌뉘 정부는 우리가 보낸 최후통첩을 거부했소. 작전 시작을 지시하시오.”
“예! 서기장 동지!”
루즈벨트 행정부는 소련의 터키 침공을 묵인하기로 결정했다. 터키는 명백히 친독 성향을 내비쳤으며, 독일의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크롬을 공급하고 있었다. 판로가 끊기는 것을 막아 주려고 소련이 ‘독점 수매’를 제시했으나 터키 정부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우리 합중국 정부는 터키가 추축국에 합류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소련의 ‘예방 조치’를 우리 정부는 지지합니다.”
연이은 뒤통수에 눈이 벌게진 미국은 이를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소련이 터키를 침공해 독일의 전쟁수행을 방해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지난 대전에서도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은 독일의 편에 서지 않았던가!
그 사유야 어떻건, 이제 많은 국가들은 줄을 잘 서야 했다. 추축이건, 연합이건.
역내의 주요국 중 하나인 이란 역시 이런 상황을 보고 소련의 터키 침공을 묵인하기로 결정했다.
이란과 터키 사이 국경은 양국이 페르시아와 오스만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안정되어 있었고, 양국 간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팔레비 샤는 타국의 안위를 위해 자기네 나라 국민의 피를 흘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당장 대서양에서 미국과 독일 간의 전쟁이 시작된바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으로 독일의 해상 세력이 진출하는 데에는 아마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소련을 적대한다면? 항상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미국이 묵인한 터키 침공을 괜히 딴지 걸었다가 안 당해도 될 꼴을 당할 정도로 팔레비 샤가 멍청하진 않았다. 당연히 국민감정은 끓어오르겠지만….
소련은 여기에 이란이 들고 침묵할 당근 하나를 던져 주기로 했다.
소련 외교부는 미국과 영국에게는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란 외교부에 몇 가지 협상안들을 타진했다.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시아파 초승달 지대의 패권. 당연히 레반트 지역이나 예멘, 페르시아만 등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영국은 크게 반발하겠지만 결국 그들이 세계 패권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고 소련은 이란의 협조가 필요했다.
“…소련은 영국과 동맹국인데 중동의 영국 식민지들을 몰아내는데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당장은 나치의 위협 때문에 함께 싸우는 형편이지만 우리 소련은 항상 피지배, 피억압 민족의 자결을 위해 싸워 왔소이다. 이 전쟁이 끝난다면 영국은 자기네들의 식민지를 다시 착취하려 하겠지만 우리 소련은 그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을 후원할 것이오!”
이란은 소련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파트너라 할 수 있었다. 그레이트 게임 시절부터 대양으로 진출하려던 러시아를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막아섰고, 가장 격렬하게 충돌했던 곳 중 하나가 바로 현재 이란―구 페르시아 지역이었다.
이제 영국의 영향력이 본국의 몰락 앞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소련이 중동에 파트너를 두고자 한다면 그레이트 게임 당시 입맛만 다셔야 했던 이란이 가장 적절했다.
또한, 이란이 소련 편에 붙으면서 페르시아만 인근 시아파 우세 지역들을 연합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소련은 거대한 팻감 하나를 손에 쥐게 되는 것이었다.
바로 석유!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은 세계 산유량의 1/4가량을 생산할 만큼 이 지역은 석유 매장량이 풍부했고, 이 석유가 해외로 나가는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이란―소련이 손에 쥔다면 그야말로 세계 석유의 절반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지역을 직접적으로 식민지배하는 영국이 퇴출된다면, 이란 입장에서는 가까이 있는 소련보다는 멀리 있는 미국이 더 좋은 파트너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영국은 일대의 온갖 요충지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들을 쳐내고 ‘대 페르시아’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다른 열강의 협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미국은 인근 수니파 왕정, 사우디아라비아를 후원하고 있었으며 그 지역에서 유전 탐사에 들어갔다. 이란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껄끄러운 상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영국의 자리를 대신할 뿐인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로서.
이때 소련의 제안은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지금처럼 소련이 터키를 두들겨 팰 때 침묵할 정도의 매력은.
* * *
오데사에서 출항한 파리쥐스카야 코뮤나를 위시한 소련 흑해함대는 바다를 유유히 항주했다.
전함은 한 척뿐이고 순양함 몇 척에 대부분이 구축함인 빈약한 전력이었으나, 이 정도로도 흑해를 위진시킬 수는 있었다.
목표는? 이스탄불! 아니, 콘스탄티노플!
수병들은 신나 있었다. 그 역사적인 도시, 투르크인들이 장악한 정교회의 성지를 향해 항해하게 되다니!
소련 당국은 정교회 신앙을 탄압했지만 많은 소련인들은 여전히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을 위해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교회 신앙을 이용할 법도 했지만 서기장은 그런 시도를 단호히 배척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오! 민족이라는 이름의 마약은 차라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인민의 의식을 고취하는 데 쓰일 수는 있지만, 종교는 그마저도 못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병들이 신나 하는 것을 상부에서는 용납했다. 오데사에 틀어박혀 접근해 오는 독일군에게 함포나 쏴대고 육전 훈련 같은 것을 하는 것보다는 바다를 질주하는 게 뱃사람들의 성미에는 더 맞는 것이었다.
흑해함대의 병사들은 아마 그런 생각 역시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끝이 장렬한 함대결전과 위대한 승리라기보단 속된 말로 ‘끕’도 안 맞는 터키 함대를 두들겨 패고 이스탄불을 봉쇄해 버리는 것은 아직 그다지 병사들에게 크게 다가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늘에서는 소련 공군의 전투기들이 함대에 인사를 보내듯 힘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 * *
사실 터키를 공격하는 주공은 육군이었다. 트라키아 평원을 질주해 오는 발칸 전선군과 아나톨리아 북부 해안지대를 파죽지세로 돌파하는 카프카스 전선군의 소식은 실시간으로 함 내에 전해지고 있었다
“에디르네 항복! 발칸 전선군은 이스탄불로 곧장 직진 중이라고 합니다. 터키군의 저항은 미미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음… 알겠네. 이거, 우리가 너무 늦게 출발한 게 아닌가 모르겠군? 하하하하!”
소련군은 불가리아와 비밀 협약하에 불가리아 영토를 고속으로 통과해 국경 도시 에디르네를 순식간에 지나치듯 점령했다.
에디르네에서 이스탄불까지는 끽해야 250km. 기계화부대라면 저항이 있더라도 며칠 안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오히려 오데사에서 이스탄불까지 흑해를 가로질러 800km가량이었으니 발칸 전선군이 터키 육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순간에도 아직 흑해함대가 이스탄불 앞바다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강구트급 전함의 최고속도라고 해봐야 24노트(44km/h). 더 구식인 함들도 아직 흑해함대에 남아 있었기에 오데사에서 출발한 이들은 최소 20시간이 걸려야 이스탄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프카스 전선군은 어떻다던가?”
“예, 아직 목표인 앙카라까지는 한참 남았다고 합니다만… 터키군의 저항은 미미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여차하면 명령에 따라 레반트 쪽으로 진격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동안 고조된 긴장으로 인해 터키 정부는 빈약하나마 군대의 대다수를 대소 접경에 배치해 두었다.
그러나 실전경험도, 훈련도도, 장비도 모두 부족하고 인원수도 부족한 터키군은 그야말로 박살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깨지고 있었다.
항공기는 모조리 동원해 봐야 400여 대, 기계화부대는 일개 여단밖에 없는 데다 소총마저도 모자라 1차대전 시기의 마우저나 리―엔필드 소총으로 무장한 군대가 소련군의 정예 기계화부대 앞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소련 공군은 뛰어나다는 수식어를 붙여 주기에는 조금 많이 모자란 처지였지만… 대부분의 비행장이 개전 몇 시간 만에 폭격으로 보유 중인 기체 거의 모두를 잃은 터키 공군을 상대로는 선전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당한 기습을 터키군에게 똑같이 써먹고 있었다. 그리고 양군의 전력 차는 훨씬 거대했다.
독일군에 비해서 소련군의 기계화도는 전혀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다만 기습을 당했고, 교리와 장교진의 숙련도, 병사들의 병기 이해도 등이 부족했을 뿐.
그러나 몇 달의 혈전을 통해서 소련군은 다시 탄생하는 데 성공했다.
그 증거로서 터키군은 처절하게 패퇴했다. 소련군의 사상자는 전무한 수준.
승전보, 승전보, 승전보만이 모스크바에 전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