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64화 (64/300)

# 64

64화

“잽스에게 죽음을!”

냉철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루즈벨트마저 이렇게 부르짖었다.

일본인들은 비겁했다. 비겁한 수작을 사용해 독일에 얻어맞아 얼얼한 미국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겨 버렸다.

한때 세계를 놓고 패권을 다투던 열강, 독일이라면 인정할 만한 적수다. 하지만 열등한 황인종들이 감히 위대한 미국에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안 그래도 성이 나 있는 미국의 자존심에 거하게 타격을 입혔다.

“어젯밤 일본군은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일본군은 괌과 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 일본군은 웨이크섬과 말라야를 공격했습니다. 일본은 고의적으로 미합중국 정부를 기만하여 평화를 원하는 것처럼 선언하였으나, 공격이 가해지기 단 30분 전! 선전포고문을 전달하였습니다!”

독일이 써먹은 수작을 일본 역시 똑같이 사용했다. 헐 국무장관은 진주만에 공습이 가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극히 모호하게 적힌 일본의 14개 항의 선전포고문을 읽어 내려가야 했다.

이것이 선전포고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인 특유의 돌려 말하는 문체로 적힌 그 글을 읽으며 국무성은 잠시 일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공습을 가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루즈벨트는 자신이 마치 처칠이 된 것처럼 우렁차게 연설을 이어나갔다.

“이 비열한 기습에 대한 반격이 얼마나 오래갈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합중국 시민들은 정의로운 힘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중상이 다시는 미국에게 가해지지 못하도록! 우리는 반드시 국토와 국민을 지켜낼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의회의 표결은 전쟁을 지지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의회는 만장일치로 전쟁을 선언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 미국 만세! 신이여 아메리카를 지키소서!”

의원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전쟁을 위한 예산 증액은 손쉽게 통과되었다. 각 의원들은 장군들에게 앞다투어 자신들도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자원했다.

“나도 참전할 수 있소이다! 이래 봬도 몇 번의 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란 말이오!”

“의원님, 미합중국 육군과 해군은 의원님이 한 명의 군인으로 참전하시기보다는 의회에서 저희를 위한 예산을 할당해 주시는 것을 더 필요로 합니다. 부디….”

백발이 성성한 70대의 노의원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자신 역시 장교로 싸울 수 있다고 외쳤다. 지난 대전 수준이 아니라 지난 세기의 전쟁, 1898년의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다시 군대에 가겠다는 늙은 의원을 말리느라 장군들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물론 의회가 모두 열렬히 전쟁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즈벨트의 오랜 숙적이자 공화당의 거물 로버트 태프트는 이례적으로 루즈벨트를 지지하면서도 행정부의 무능을 규탄했다.

“미국인의 피를 흐르게 한 데에 대하여 일본은 책임을 질 것이오! 그리고… 이 책임으로부터 행정부는 자유로울 수 없소! 미국인의 피를 헛되이 흐르게 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오!”

루즈벨트와 그가 임명한 외교관들은 일본이 공격할 것이라는 징조를 눈치채지 못하고 전격적인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가 임명한 장군들은 경계에 실패해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두 번이나!

여기에 더해 강경 보수 성향의 맥아더가 올리고 있는 ‘전공’이 영향을 미쳤다. 루즈벨트의 똘마니들은 다 일제히 패퇴했지만 맥아더만큼은 필리핀을 사수 중이다!

공화당은 이 전쟁을 통해 빼앗긴 정권을 되찾고 싶어했다. FDR은 바로 작년, 사상 최초로 대통령 3선에 도전하였으며 공화당은 루즈벨트의 파격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루즈벨트가 이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 낸다면? 공화당은 아마 10년, 혹은 20년은 백악관을 민주당에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전쟁에 반대할 정도로 눈치 없는 자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민주당의 완승이 되기를 바라는 공화당원은 별로 없었다.

“또한, 현 행정부가 주장한 소련과의 교류―동맹 정책 역시 작금의 참사를 초래한 데 기여했다고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 * *

“아, 물론 대소련 정책이 작금의 참사를 유발하기는 했지.”

의회의 공화당원들에게 한참을 물리고 뜯긴 후 내각회의로 돌아온 루즈벨트는 그렇게 한탄했다.

소련은 밀서와 특사를 통해 일본의 기습을 계속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부는 이것이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지 의심하며 경계태세를 상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조 삼촌’은… 빠르기도 하시구만.”

“그렇습니다. 소련은 작금의 사태에 대해 미국에 깊은 조의를 표하며 유럽의 전선이 정리되는 대로 아시아에서 파시즘의 확산을 막기 위한 협력을 제의했습니다.”

스탈린은 즉각 이 사태에 대해 미국에 밀서를 보내어 유감을 표시했다. 그동안 그들을 믿지 않은 루즈벨트 행정부가 민망해질 정도로.

그리고 이제 실질적으로 남은 동맹국은 소련뿐인바 미국은 소련이 말뿐인 조치를 취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

프랑스는 완전히 몰락했다. 영국 역시 런던을 상실하고 몰락 직전에 몰려 있었다. 미국이 가장 경계해 온 것은 대서양과 태평양의 양면 전쟁이었고, 그것이 눈앞에 다가온 이상 유럽 방면에서 독일을 막아내는 방벽인 소련은 파트너로서 더없이 중요했다.

“소련 없이 우리는 두 개의 전선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대소전선에서 싸우고 죽어 가야 할 수백만 독일군이 대서양 방면으로 쏟아져 온다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영국은 와장창 무너질 것이고, 그 이후에는 바로 미국 동부해안의 핵심 도시들이 해상봉쇄나 공격에 노출될 것이다.

일본이 소련과 동맹하여, 불가침조약 이후에도 소련을 경계하여 만주에 주둔시킨 관동군이 중국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간다면? 5억 인구를 이끄는 장개석 총통 역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당연하게도 소련의 지령에 따라 일본과 협력할 것이고, 중국 대륙이 일본의 손에 들어간다면 미국은 일본에 대한 우위 ―국가의 동원력 측면에서― 를 상실하고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양쪽 전선이 모두 무너진다면 미국 입장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인도 아대륙 역시 추축국의 손아귀에 넘어갈 것이다.

몰로토프는 이를 ‘도미노 효과’라고 표현했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공포에 부르르 몸서리쳤다.

서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이란과 인도, 인도차이나와 필리핀까지… 몽땅 저 전체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미국이 치켜든 자유와 민주주의의 불빛은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즈음 미국 정부가 결정한 노선은 명료했다. <유럽 우선>.

태평양이 앞으로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이 간간히 있긴 했어도 아직 세계의 중심은 미국 동부와 서유럽이 한데 엮여 있는 대서양이었다.

그리고 대서양의 크기는 태평양보다 훨씬 작았기에, 서유럽이 전부 추축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면 당장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와 뉴욕, 대서양함대의 모항인 버지니아의 노퍽 등이 위험했다.

오대호 연안의 공업도시들에서 나오는 막대한 물자들이 세인트 로렌스 만(캐나다 앞바다) 안에 봉쇄당한다면 미국의 산업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따라서, 미국은 반드시 추축의 세력을 저 유럽 대륙 안에 어떻게든 붙들어 놓아야 했다. 그래서 더더욱, 루즈벨트와 미국은 소련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물주는 엄연히 미국이었지만.

* * *

“채무자가 없으면 채권자가 파산하는 법이지. 안 그런가? 하하하하하!”

“서기장 동지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하하!”

진주만의 개전으로 소련의 지위는 180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90도 정도는 달라졌다.

독일의 파나마 기습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전까지 미국은 방관자, 잘해야 물주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여론은 ‘유럽의 전쟁’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루즈벨트는 이 덕에 발이 묶여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함대를 흡수한 독일과, 영국의 몰락으로 세계 해군력 순위 2위로 올라선 일본과의 양면전쟁은 미국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막강한 태평양함대가 말 그대로 산산조각났고, 영국의 동방 식민지들도 하나하나 차근차근 짓밟히고 있었으니.

그렇기에 일본의 통수를 후려갈겨 줄 수 있는 ‘친구’인 소련이 더없이 중요해진 것이다.

“역시… 주코프, 자네는 왜 마르크스 동지가 위대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는지 아나?”

“예? 아… 저는 잘….”

뜬금없는 농담에 주코프는 당황한 것 같았다.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엥겔스 동지 같은 부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나! 하하하하하!”

미국은 통이 컸다.

소―일 전면 개전은 독일군과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는 소련에게는 무리임을 주장하며, 유럽 전선을 정리한 이후로 미루겠다고 하는 것에 합의를 해 준 것이다.

어쩌면 미국 입장에서도 이게 옳을지 몰랐다. 만약 지금 소련의 선전포고로 소―일 불가침조약이 깨진다면 태평양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는 렌드리스 물자들은 북태평양의 차가운 바닷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미국 입장에선 태평양에서 도움을 얻어 보려다 오히려 유럽 방면이 무너지는 대참사가 터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자 친구분은 ‘친구’를 돕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루즈벨트는 기존 렌드리스 항로에서 물자를 실어 나르던 미국 선적의 선박들을 전부 소련 선적으로 넘겨주었다.

일본은 ‘소련 선박’이 비―군수 물자를 실어나른다는 전제하에 물자의 이동을 용인해 주었고, 미국은 그에 맞서 소련을 동맹으로 유지하기 위해 수송선들을 그냥 넘겨준다는 강수를 두었다.

또한, 군수 물자의 수송만을 금했기에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설비들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미국은 아예 자국의 구형 군수물자 생산 설비들을 뜯어서 보내 주기 시작했다.

그 뜯어낸 자리엔 어마무시한 투자를 통해 새로 만든 신형 생산설비들이 들어올 테고. 우리 소련에게 주어진 것은 끽해야 2류 수준의 장비들이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아니,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미국의 2류라 해도 소련에게는 1류, 혹은 그 이상이었다.

내가 그렇게 진주만 이야기를 해 줬는데도 그걸 처맞냐? 라고 이죽대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고마웠다. 불필요하게 일본의 어그로를 끌지 않기 위해, 미국의 참사를 애도하는 내 ‘진심’은 철저히 외교적인 비밀로 붙여졌지만….

아무튼 미국은 이제 제대로 전쟁에 돌입하려 하는 것 같았다. 잠자던 거인이 그 거구를 일으킨 것이다. 과연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급팽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특히, 우리한테도 이미 두들겨 맞고 있으면서 미국한테까지 시비를 건 독일은.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독일군 참모부의 표정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으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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