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62화
“황국의 운명은 모든 신민이 얼마나 직무에 헌신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사령장관의 훈시가 전 함대에 울려 퍼졌다. 함대의 모든 장교와 병사들은 근엄한 표정을 하고 야마모토 제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령장관의 목소리는 마치 피를 토하듯 절절했다.
아직 전쟁은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벌써 최후의 결전이 다가온 것처럼, 그리고 그 결전을 준비하는 사무라이처럼 사령장관의 목소리에는 비장한 결의가 들어 있었다. 그 결의 앞에 모든 이들은 마치 전염되듯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황국의 신성한 전쟁을 억누르고 훼방 놓아온 저 귀축 영미를 응징할 기회가 온다!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저들의 함대를 모조리 태평양 바닷속에 수장시키고 동아의 공영을 쟁취하여 황상 폐하의 은덕에 피로써 보답하라!”
“와아아아아아!!!”
피로써 보답하라! 덴노 헤이카 반자이!!! 각 함의 갑판에 도열한 장병들은 환호했다. 상층 구조물을 물 위로 내민 채 함에게 인양되는 저 잠수함들에서도 몇몇 병사들이 몸을 내밀고 사령장관의 연설을 경청했다.
“우리에겐 세계 최고의 전함이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정예한 병사들도 있다! 황상 폐하께서 내려 주신 무기들 한 점마다 은혜가 서려 있으며 우리 신민들의 피땀도 서려 있다! 우리에게 패배란 없으니, 장병들이여! 목숨을 아끼지 말라!”
배운 것이 짧은 장병들은 고색창연한 문자를 쓰는 사령장관의 훈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전함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함대를 이끄는 사령장관의 총기함은 원래 연합함대의 기함이던 나가토가 아니었다. 그들조차도 알지 못했던 거함이 선두에 우뚝 서서 기함을 상징하는 사령관기를 나부끼고 있었다.
히노마루와 욱일승천기, 사령관기 세 개가 거함의 마스트에서 바람에 휘날려 펄럭였다. 수병들은 수군댔다. 저 배는 대체 무엇인가?
“연합함대에서 사령장관, 총기함 선두는 도고 헤이하치로 각하 이래로의 아름다운 전통! 본관이 탄 야마토가 선두를 맡는다. 모든 장병 각자 맡은 직에 일심, 충심을 다하여 승리하도록 한다. 알겠는가?”
“만세! 만세! 만세!”
거대한 함성이 함대를 뒤흔들었다. 모든 장병들은 근 몇 년간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과 오족협화 등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주입받아 왔다.
지나 대륙에 진출함은 미개한 중국인들을 황국 동방의 빛으로 교화하고 협동하여 백인 세력의 침공으로부터 방어를 위함이요, 남방으로 진출함은 흰코쟁이 식민주의자들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함이라!
물론 상부의 의중은 그런 아름다운 선전과 거리가 멀었으나, 직접 일본군과 싸울 일이 없었던 이들은 이런 프로파간다를 믿었다. 일본군 스스로조차도.
이제 가장 거대한 적인 미국을 상대할 일대 결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다면 황국의 영웅이요, 죽어서는 호국의 영령이라! 병사들의 기세는 마치 하늘을 꿰뚫어 뒤집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설을 통해 병사들을 자극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 자신은 가장 침울해 있었다.
“후… 이런 식으로까지 해서… 승리할 수나 있겠나?”
연합함대 총사령부의 참모들은 사령장관의 저 걱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이 말한 대로,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로 약해빠진 미군 하나라도 더 죽이고 산화한다면 대일본제국의 연합함대가 과연 전함들이 세 척이나 빠져나가 전력이 토막 난 미국의 일개 함대 따위를 어찌하지 못할까?
일본제국은 기습의 묘에 더하여 승리를 위한 필살의 병기까지 준비하였다. 미국의 거함이라 할지언정 단 한 번에 박살 내버릴 수 있을 필살 병기.
그러나 사령장관은 진지했고, 참모들 중 대놓고 내심을 말해 사령장관을 노엽게 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이는 없었다.
“우리가 미국 함대를 전멸시킨다고 하지. 그렇다고 당장 없는 육전대를 만들어 내어 하와이섬을 점령할 수가 있겠는가? 아니면 아예 섬을 때려 부술 수나 있겠는가. 하와이섬이 떨어진다 한들 저만치 멀리에 미국 본토가 남아 있고 결국….”
“각하! 점감요격작전으로 저들의 함대를 격파하고 남방으로 진출하여 석유를 얻는다면 일전을 겨루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야마모토는 그 발언을 한 장교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아마 전쟁대학 출신의 고위 참모일 것이다. 얼굴은 햇볕에 타지 않아 흰 편이었고, 해군 정복을 각까지 세워 잘 차려입고 있었다.
그다지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벌써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으니, 그의 출세가 빠른 편임을 알 수 있었다.
똑똑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시야가 좁아.
“남방으로 진출하여 석유를 얻는다 하면 그제서야 미국이 가진 여러 무기 중 하나를 대등하게 갖출 뿐이지. 영국 놈들이 동양에서 활개 치고 다닐 정도로 대서양의 전황이 여유롭지는 않으니, 남방은 손쉽게 얻고 손쉽게 지킬 것일세. 그러나 우리가 미국의 함대를 침몰시킬지언정 함대가 뽑혀 나오는 건선거까지 어찌한 건 아니지 않은가?”
참모들은 갸웃거렸다. 이들은 아직 미국의 그 어마어마한 힘을 모르고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의 거대한 산업단지를 보고 그 생산량을 마주친 그로서는 이들의 좁은 시야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라 군 상층부와 내각의 인사들 역시.
그들은 일본이 얼마나 놀랍도록 발전했는지, 그 급속한 성장의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봐 온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초라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보다 더 초라했던 상태, 강제로 흑선개항을 당했던 설욕에서 벗어나 이제 당당한 열강의 자리에 들어왔다.
일본에게 굴욕을 주었던 영국과 미국은 불의의 일격을 두들겨 맞고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어질어질해 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열강임을 증명하고 역사의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서 미국을 박살 내야 했고, 상부는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다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낙관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결정된바, 따르는 것은 군인의 책무였다. 전장에서 죽는 것은 무사의 도리나 다름없었기에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두려운 것은… 패배였다.
‘패배한다면 과연 일본은 국체와 신민들을 보전할 수 있을까?’
상부는 미국이 함대 전력을 모조리 상실한다면 협상장으로 나와 지나 정벌과 남방에 대한 패권을 인정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약골, 정신력도 부족한 약골이라 떠들어댈지언정 영국은 지금 본토가 짓밟힌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정복자라는 롬멜 원수가 20만 대군을 끌고 짓쳐 들어가도 그들은 손을 들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영국인들도 그러할진대 더 대국이라는 미국은 과연 순순히 항복할까? 아니면 대일본제국 연합함대를 모조리 태평양에 수장해 버릴 때까지 분노에 불타 덤빌까.
‘그도 아니라면 일본 열도 자체를 모조리 불태워 버릴지도 모르지.’
일본이 재정난에 허덕여 가며 야마토급 전함 몇 척을 건조하는 동안 미국은 이만한 거함은 아니지만 충분히 강력한 군함들을 훨씬 많이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전함을 잡으려면 같은 전함을 가져와 포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했지만… 항공주병론자로서 야마모토는 잘 알고 있었다. 꼭 전함이 아니라 비행기여도 좋다. 어뢰도 있다.
대일본제국은 야마토를 잃고 무사시를 잃으면 결코 이 전력을 단시일 내에 회복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도 그러할까? 태평양함대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모조리 잃는다 쳐도 그걸 다시 회복하는데 얼마쯤 시간이 걸릴까?
그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점감요격, 그 점감요격은 일본이 승리한 이후라도 미국이 일본에게 써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까?
지금 ‘무적 황군’이 가진 것은 기책(奇策)일 뿐이었다. 결코 전력의 우위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수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허락한 상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동맹 독일제국의 주재무관으로 와 일본해군의 전략에 대해 조언자 노릇을 했던 귄터 프린, 그 젊은 장교는 일본이 낸 책략에 대해 기가 막힌 듯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노려보는 그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났다.
“귀관들은 전투 준비에 임하게. 대계를 고민하는 것은 사령관과 대신의 역할! 그대들은 닥쳐오는 전투를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게나.”
“예! 사령장관 각하!”
진주만까지는… 앞으로 여덟 시간. 도착하는 즈음에는 아스라이 새벽이 밝아 올 것이다.
그 순간에 일본제국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승리냐, 패배냐?”
* * *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국 외무성의 관료들이 씩씩대며 날뛰는 헐 국무장관을 애써 뜯어말려야 했다.
비겁한 잽스 놈! 어떻게 그렇게 한 말을 손바닥처럼 뒤집을 수가 있지? 너희 노란 원숭이들을 모조리 바다에 수장해버리겠어!
외교관이라지만 그의 수사는 전혀 외교적이지 않았다. 그러할 만도 했지만.
독일에 기습적인 선전포고를 당한 이후, 미국은 같은 추축동맹의 일원인 일본이 대미 개전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며 캐물었다.
그때마다 일본은 전혀 개전의사가 없는 것처럼 미국을 기만했고, 인제 와서 기습적으로 선전포고문을 미국 국무성으로 보내 왔다.
새벽에 곤히 자던 국무장관은 집으로 긴급히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뛰어나와야 했고, 제대로 눈곱조차 떼지 못한 채 미군들이 에워싼 대사관으로 와 대사를 만나야 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국무장관 각하. 저희 정부에서는….”
“빌어먹을, 변명하려거든 얼마든지 하시오. 미국은 물러서지 않소이다!”
“예. 그 점은 저희도 주지하고 있습니다.”
키치사부로는 펄펄 날뛰는 미국 헐 장관의 불타는 눈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물론 헐이 그런 제스처에 겁을 먹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분노해서 고함을 치고 날뛸 뿐.
‘무례한 코쟁이 종자 같으니라고….’
키치사부로는 속으로 뇌까렸다. 일본 대사관은 중무장한 경찰과 미군에게 포위당해 있었고, 아마 대사관 직원들은 이제 모조리 추방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전장에 나가 싸울 병사들이 감당해야 할 일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우방국 독일제국이 해낸 일에 비하면 역시 또 작았다. 키치사부로는 개인적으로 독일의 업적에 크나큰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세계의 바다를 지배해 온 저 열강 영국을 기어이 몰락시키는 데 성공하다니!
독일군은 아직 브리튼섬에서 고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대사는 불굴의 정신으로 판단했다. 지난 대전에서 패배해 가혹한 처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칼을 갈고 닦아 원수의 목을 치는, 마치 사무라이 정신과도 같지 않은가?
적이 아무리 강해도 무사는 굴하지 않는다. 오직 한목숨 바쳐 초개같이 사라져 갈 뿐!
“짐을 싸라! 다시 돌아올 때는… 승리자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