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화
남부전선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로 요약 가능했다.
‘전선보다 구멍이 더 많다.’
루마니아군의 탈주와 독일군 습격에 대해, 독일군은 무장해제 요구로 대응했다. 일부 루마니아군은 무장해제 요구에 순응하여 가지고 있던 병기와 보급물자를 넘기고 후방의 점령지로 퇴각했다. 이는 주로 독일군이 훨씬 인적으로 우세했던 남서전선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남부전선에서는 루마니아인들이 훨씬 많았던바, 다양한 반응이 돌아왔다.
“뭐? 우리들도 그 병사처럼 고문하려고? 아니면 학살이냐? 할 테면 해 봐라!”
많은 루마니아인들은 독일인들을 이제 불신했다. 충성하던 정권은 붕괴했고, 같이 싸우던 전우라는 전우애는 부족해져 가는 보급과 인종주의적 대립 속에 녹아내렸다.
대다수는 독일군의 민간인 학살을 목격했고, 이들이 ‘포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개중 과격한 일부는 독일군의 무장해제 요구에 총격으로 답했고, 그들이 예측했던 운명을 스스로 실현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항하는 자들은 사살해도 좋다. 그러나 투항자들에게는 최대한의 관용과 자비를 베풀도록! 그들은 한때 우리 전우였으며, 언제든 다시 소련에 대항하는 대오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와 그들의 명예를 위하여 신사적으로 행동하라.”
모델 원수는 엄명을 내렸고, 병사들은 최소한 명령의 앞부분만은 충실히 지켰다. 반항하는 이들은 잔혹하게 사살당했고, 겁먹어서 투항한 자들은 최소한 사지만은 온전히 후방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후방에서 보급물자를 실어 오고, 전방에서 대부분의 공간을 비워 둔 채 소수의 후송자만을 실어가던 열차는 루마니아인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격렬한 전투가 있었건, 혹은 충돌 없는 무장해제건, 전선의 많은 부분에는 공백이 생겼고 소련군의 공세는 이 지점을 노리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인들은 항복하라! 더 이상 압제자 독일을 위해 싸우지 말라!”
“항복하는 자는 땅바닥에 엎드려라! 소련은 그대들의 안전을 보장한다!”
공세의 선두에는 항상 쩌렁쩌렁한 루마니아어 방송이 있었다.
일부 단위 부대장들은 병력이 극히 부족했던바, 루마니아인 부대장과의 간단한 면담을 통해 소수의 ‘믿을 수 있는’ 루마니아 병사들을 전장에 독일군과 함께 투입했다.
이미 소련 측에 투항했던 병사들도 내부의 프락치로 의심을 받아 강제로 무장해제당했다 다시 전장에 총 한 자루만 잡은 채 끌려 나왔다. 이들의 꽤 많은 수가 투항을 선택했다.
“항복! 항복합니ㄷ… 으아악!”
“살려줘!”
그리고 독일군들은 적극적으로 이들을 사살했다. ‘반항하는 자들은 사살해도 좋다’는 모델 원수의 명령은 이들의 학살을 정당화했다.
보고를 받은 사령관 본인조차 차마 이들을 처벌하지 못할 정도로. 당장 한 명의 병사라도 더 끌어모아 기동방어를 위한 예비대로 편성해야 되는 차에 독일인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원들을 마구 처벌할 수는 없었다.
“단 사흘! 단 사흘의 시간만 벌어 오시오! 남부집단군이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수 각하!”
소련의 추계 공세에서 건져온 기갑차량들은 소련군의 전 전선에 걸친 공세를 격퇴하기 위해 끝없이 투입되었다.
초기 150대를 지원받았던 신형 판터 전차들은 격전 끝에 단 56대밖에 남지 않게 되었으나, 긴급히 도착한 45대를 신규로 수령해 모델 원수의 가장 귀중한 예비대가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남서전선군의 키르포노스 대장은 10:1이라는 엄청난 교환비에 놀랐었기에 소련군의 풍부한 인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게 제한적인 공세만을 펼치고 있었다.
그마저도 독일군이 구축했던 단단한 방어선에 두 개가 돈좌되고, 나머지 둘은 모델 원수의 주특기인 기동방어 앞에 압살당해 버리자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산발적인 포격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 * *
남부 전면, 즉 루마니아 방면은 아예 전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남서전선군 전면은 그나마 독일이나 헝가리인 병력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남부 방면에서는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루마니아 군대가 대다수였다.
‘전차와 야포는 새로 생산할 수 있지만, 숙련병은 쉬이 다시 양성하기 어렵다.’
특히 지금 같은 전면전에서는. 어떻게든 한 명의 병사라도 더 빼내 와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웠다. 전선에서 한 부대가 후퇴하면 아예 연쇄적으로 전선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다. 누가 충성파인지, 누가 반대파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저 전장에서 베테랑 병사 하나가 죽는다면 그 자리는 신병으로 메워야 한다. 평화 시라면 신병은 철저한 훈련을 받고 몇 년이 지나 베테랑으로 거듭나겠지만, 이 지옥 같은 전쟁 속에서 신병은 보통 베테랑이 되기 전에 죽었다.
그 자리는 더 질이 떨어지는 신병으로 메우고, 또 메우고… 그러고 나면 군대와 국가에는 폭삭 주저앉기 직전까지 허약해져 버린다.
지난 대전의 지옥을 위관 장교로서 맛보기라도 본 모델은 그것을 잘 알았기에 최대한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했다.
“부쿠레슈티, 앞으로 30킬로미터!”
휘릭 휘릭 끼요오오옷!!!
부됸늬 원수는 군도를 휘둘렀다. 기병들은 그의 함성에 열광적인 환호로 응답했다.
“붉은 군대 만세!! 부됸늬 원수 만세!!!”
무너진 전선을 파고들며 소련군이 질주했다.
선봉에는 늘 그랬듯 제1근위기병군.
부됸늬 원수와 근위기병군의 군기를 휘두르는 병사들은 말을 타고 다뉴브강까지 한달음에 이를 속도로 질주했다.
부쿠레슈티는 이미 국왕파가 장악했기에 부쿠레슈티에 입성한 소련군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던 이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어쩐지 어색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우리 루마니아가 꿈꿔 온 판도를 돌려주기로 했소. 독일인들은 독재자를 세우고 괴뢰 정부를 세워 우리를 조종하려 했지만, 소련은 루마니아를 해방시켰지요. 이에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
부됸늬 원수의 가슴팍에 또 하나의 훈장을 달아 주는 젊은 미하이 국왕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비록 남의 손을 빌렸다 하나,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언제 남의 손에 조종당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제 독재자 안토네스쿠는 없었다. 근위사단이라는 무력을 손에 쥐고, 국경 수비군의 충성을 받아내었으며 소련의 지지까지 받는 미하이 국왕은 처음으로 본인이 가졌던 원대한 꿈을 펼칠 기회를 얻어낸 것이다.
국민들 역시 국왕을 지지했다. 영토를 돌려받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좋다. 독일인들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데려가 총알받이로 만들었을지언정 땅 한 뙈기조차 돌려주지 않았다. 헝가리와 불가리아는 같은 추축국으로 참전하였기에 그들에게 땅을 돌려받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안토네스쿠의 총칼 아래서 충성하는 척했을 뿐. 소련인들을 싫어하는 이는 있었을지언정, 대다수는 소련보다 독일을 훨씬 더 증오했다.
“불가리아 역시 항복의사를 타진해왔습니다. 같은 슬라브인들을 적대하지 않고 단지 독일의 압력에 못 이겨 전쟁수행에만 협력했을 뿐이라며 갖은 변명을….”
“좋소. 좋소. 카프카스 전선군은 준비되었는가?”
전황은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북부와 중부에서는 소모전을 유도하면서, 남부전구에서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줄을 거의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추가적으로 추축국의 본토에 제작한 위폐를 막대한 양으로 투입하는 것까지.
벌써 1차로 투입한 위폐 5백만 마르크의 절반가량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또 나머지 절반은 세계 어디서나 쓸 수 있는 금이 되어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아무 쓸모없는 위폐들은 황금으로 탈바꿈해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소련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스팸과 허쉬 초콜릿, 비행기 엔진과 연료, 트럭으로 또 한 번의 변신을 거친 후.
미국이 보내 주는 물자의 양에 비하면야 위폐를 통해 벌어들인 금은 얼마 안 됐지만, 아무튼 체면치레 비슷한 걸 할 정도는 되었다. 시끄러운 미 재무성의 관료들이 조금은 목소리를 낮추도록.
미국도 수 척의 전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계획이 의회를 통과했기에 그다지 재정에 여유가 없을 테지만 루즈벨트는 작심하고 독일을 짓밟으려 하는 것 같았다.
태평양을 건너,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렌드리스는 매일 도착했고 우리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예, 서기장 동지. 언제라도 명령하신다면 즉각 출동 가능합니다.”
아직 추축국의 연합함대는 영불해협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마 지금 대서양을 최고 속도로 항주 중일 미국의 전함들, 그래도 몇 척은 남아 있는 영국 함대로부터 영국 원정군의 보급망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말은 지중해에는 극히 적은 해군 전력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흑해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루마니아군의 빈약하지만 아무튼 존재는 하는 해군 전력을 접수한 소련 해군은 이제 흑해에서 마음껏 날뛸 수 있게 되었다.
터키는 루마니아의 항복은 전해 들었을지언정 불가리아의 항복은 아직 모르고 있었기에 마음 놓고 있었을 테고… 순식간에 세 측면의 공세에 노출될 처지였다.
한 방향은 불가리아를 가로질러 오는 소련 남부전구 휘하 2개 야전군 전력이었다. 말리놉스키 상장 휘하에서 발칸 전선군으로 개칭된 이들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럽 방면을 장악하고, 이스탄불을 포위해 터키의 목줄을 조를 것이었다.
이후, 강제 점령에 반발하는 그리스, 알바니아의 파르티잔들과 연계하여 이탈리아군을 축출하고 발칸에서 추축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또 한 방향은 조지아의 해안가에서 출발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쪽, 흑해 연안의 항구 삼순을 거쳐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 달려갈 카프카스 전선군이었다. 터키군의 대부분은 소련을 경계하여 소련 국경 방면에 집중되어 있는바, 가장 먼 거리를 가장 많은 충돌을 감수하며 진군해야 했지만 그만큼 잘 기계화된 전력을 쥐여 주었다.
1근위전차군과 2근위전차군, 그리고 1개 기계화군단까지 배속받아 소련군에서 유일하게 100% 기계화된 전선군이 된 카프카스 전선군은 자신이 넘쳤다. 상장으로 진급해 전선군 사령관직을 맡은 톨부힌은 늘 그렇듯 침착하게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흑해를 가로질러 발칸 전선군과 협력할 소련 함대는 이제 오데사에서 출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뢰 수만 개를 적재한 흑해함대는 발칸 전선군이 이스탄불을 함락시키는 즉시 마르마라해의 입구인 다르다넬스 해협에 기뢰를 부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해협의 양안, 차낙칼레와 갈리폴리 반도가 소련군에게 장악당한다면 추축군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이상 결코 흑해로 진출할 수 없었다. 1차 대전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갈리폴리 상륙전을 치르든가, 아니면 양안에서 포화를 뒤집어쓰며 기뢰를 소해하든가.
터키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기뢰가 깔리는 곳이 이스탄불의 가운데를 흐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될 뿐이었다.
“터키는 우리의 요구안을 거부했습니다. 명령하시는 대로 터키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최후통첩은 이렇게….”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요 크롬광산을 소련과 합작해 만든 광물회사에 넘기고 터키군 20만의 통제권을 이양할 것. 주요 항구들의 이용권과 해협 통제권까지?
아마 내가 이뇌뉘였다면, 그리고 독일군이 지중해에 전력을 할양할 수 있는 처지였다면 당장 이 제안을 집어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독일이 패배하리라 예측한다 쳐도 그때 노예가 되느냐, 지금 노예가 되느냐의 차이일 뿐이니 희박한 확률에라도 도박을 걸어 볼 수도 있다.
물론 지금 추축국은 지중해에서 연합군 세력을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대서양에 그 모든 전력을 집중시킨 채였다. 그리고 대서양 저편에서는 분노한 미국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고.
소련이 라스푸티차에 묶여 있을 때 독일이 영국을 짓밟았다면… 브리튼 섬에 너희들이 묶여 있을 때 발칸과 아나톨리아를 손아귀에 쥐면 그만이다!
이로써 1대 1인가? 미국을 참전시켰다는 것을 생각하면 10대 1도 부족하지만. 낄낄낄낄.
스타브카의 각 지휘관들은 이제 남부집단군을 아예 박살 낼 작전을 만들고 있었다. 이봐, 좀 조심하지 그래…?
“서기장 동지! 급보입니다!”
“뭐? 급보라니? 대체 뭔가?”
다들 희망찬 미래에 대한 계획에 빠져 있을 때, 연락장교 하나가 회의실로 쿠당탕 들어왔다.
뭐지? 레닌그라드라도 함락당했나? 아니면 영국?
“일…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