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화
처칠은 결코 좋은 수상은 아니었다.
그는 완고했고, 타협하지 않았다. 처칠의 그런 성품은 수많은 정치적 적대자들과, 그보다 더 많은 인간적 적대자들을 만들어 냈다. 고집으로 인해 수많은 실패를 겪기도 했고 ―특히 갈리폴리와 프랑스에서― 영국은 그로 인해 패배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비겁한 평화를 거부하고 끝까지 결사 항전을 주장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저는 결코 도망치지 않습니다! 제가 죽는다면 나치는 제 시체를 다우닝가 10번지의 집무실 의자에서 끌어 내려야 할 것입니다! 영국에게 약속된 미래는 오직 승리,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 승리뿐입니다. 저는 그 승리를 위해 먼저 간 대영제국의 아들들처럼 제 목숨조차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내각은 런던의 코앞까지 진군해 온 추축군을 막기 위해 글래스고로 피난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처칠은 끝까지 런던을 사수할 것을 고집했다.
“수상 각하가 없다면 우리 내각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처칠은 장관들을 특유의 뚱한 눈초리로 노려보다 피식 웃었다. 늙은 사자는 이빨이 빠졌어도 무릎을 꿇기를 거부했다.
“나 같은 고집쟁이 늙은이가 필요하다고 입에 발린 말을 할 것 없소. 내 고집으로 인해 이 유서 깊은 도시는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고, 국민들은 분열되고 있소. 다 내 잘못이오. 내 잘못.”
아무도 그의 결연한 태도 앞에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 같은 패배자는 패배를 껴안고 가라앉는 수밖에 없소.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 내가 비겁하게 이 자리에서 도망쳐 수상이라는 알량한 직함을 고수하려 든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인정하겠소? 국민조차도 우릴 버릴 것이오.”
“수상 각하!”
“선장은 배와 함께 가라앉는 법! 미안하오, 애틀리, 이든. 그대들에게 너무 막중한 짐만을 떠넘기는구려. 날 원망하지 말아 주시오, 염치없지만.”
빌어먹을! 그걸 알면 제발 대피하란 말입니다. 애틀리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저 늙은이의 옹고집은 이제 결코 꺾을 수 없는 무엇이 되어 있었다. 아니면 차라리 보수당의 이든에게 임시 수상직을 넘기든지….
‘왜 나란 말인가? 왜!’
나치에게 영국의 산업기반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산업의 근간이 되는 공장들과 조선소를 파괴하라는 명령에 사인한 처칠은 껄껄껄 웃었다.
“그래도 가장 어려운 명령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사인하겠소. 자, 얼른, 얼른 가시오. 저놈들은 더럽게도 큰 폭탄을 쓴단 말이지?”
런던에는 이제 공습이 가해지고 있었다. 나치 놈들은 영국의 산업기반을 욕심내는 게 분명해 보였다. 조선소에서 아직 건조 중인 전함과 항공모함들, 비행기와 각종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들. 이 모든 것들을 다 파괴해야 한다니.
이것을 잃은 이후엔 세계 최고의 열강인 대영제국으로서의 미래는 더 이상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나치에게 이것들을 고스란히 넘겨줄 수도 없었다.
수많은 시민들의 대피행렬이 이어졌다. 북으로, 북으로. 독일군은 남부 해안에 상륙해 런던을 향한 최단거리로 진격하고 있었고, 런던을 사수하기 위한 병력들이 북에서 시시각각 남하하는 동안 시민들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미국군이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상륙하려면 최소한 1주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상 각하, 런던을 그때까지 사수하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사수해야 한다면. 어떻게든 사수해 보이겠소.”
독일과의 상호 선전포고 이후 미국은 이제 본격적인 파병에 나섰다. 아직 지상군이 제대로 소집되지는 않았으나 즉각 소집한 2개 사단이 완편에 들어갔고, 20개 사단이 추가적으로 편성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미 육군 병력은 서부와 남부 멕시코 국경에 있었으며 동부 해안가에는 연대급 규모의 주방위군, 혹은 해병대 병력밖에 주둔하고 있지 않아 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처칠은 미국의 막강한 잠재력을 믿었다. 그리고 소련을 믿었다. 비록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스파이질이나 하는 빌어먹을 동맹국님이시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독일에 100만이 넘는 피해를 입혔다.
스스로 유럽 최고의 육군 강국이라 자랑하던 프랑스는 영국의 전적인 지원을 받고서도 6주밖에 못 버텼지만, 소련은 6주가 아니라 6달이 가까워지도록 독일과 비등하게, 일부 우세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제 미국인들이 도착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런던을 사수하라!
“와아아아아! 대영제국 만세! 고향을 사수하라!”
소집된 병력은 일부 근위연대나 지역 경찰들을 제외하고는 마지막으로 총을 만져 본 것이 지난 대전기인 중늙은이들로 구성된 홈가드가 대부분이었다.
완편 기갑사단을 네 개나 상륙시켜 밀고 들어오는 추축군을 상대할 기갑병력은 전무보다 조금 나은 수준. 공장에서 막 만들어지고 있던 발렌타인 전차를 급히 마감해 꺼내와 배치해야 했다.
발렌타인과 마틸다 전차로 이루어진 2개 연대급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것은 남은 지휘관들, 즉 덩케르크와 아프리카에서 포로가 되지 않은 이들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장군, 망명 자유 프랑스의 수반 샤를 드 골이었다.
“제군들! 영국인들 앞에서 프랑스에 불명예를 안길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우리의 고향은 나치 독일의 군홧발 아래 짓밟혔으며, 위대한 프랑스의 명예는 시궁창에 처박혔다. 이제 비시 정부 아래 있는 저 나라는 프랑스가 아니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기에!”
자유 프랑스 역시 영국과 함께 싸워 왔지만 독일에게 연전연패를 겪어야 했다.
프랑스의 ‘대육군’은 단 6주 만에 독일에게 항복하고 페탱 원수를 수반으로 하는 비시의 괴뢰정부가 세워졌다.
메르 엘 케비르 항구에서 독일은 프랑스 함대 전력의 대다수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고, 간신히 탈출해 아프리카의 식민지에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던 조르주 망델 전 장관은 배반한 프랑스령 모로코 총독에 의해 독일 어딘가의 수용소로 끌려가 버렸다.
대육군의 주력은 전부 비시 프랑스의 손에 장악당했고, 극히 일부만이 영국이나 아프리카로 망명하여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정부에 합류했다. 단 한 대의 전차도, 곡사포도 없이 시작한 자유 프랑스군은 영국군에 합류하여 끝없는 격전을 치렀지만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했고, 식민지들마저 모조리 비시 프랑스 지지로 선회해 버렸다.
유일하게 자유 프랑스를 지지한 차드 총독 펠릭스 에부에는 비시 프랑스 지지자에게 암살당했고, 그가 설득해 넘어오려 했던 콩고, 카메룬 등 적도아프리카 식민지들은 모조리 비시 프랑스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는 식민지는 이제 단 한 곳도 없었다. 협상해 보려 했던 식민지의 반프랑스 불순분자들마저 자유 프랑스가 무슨 힘이 있냐고 철저히 무시했고, 어떤 이들은 자유 프랑스의 밀사들을 나치와 비시에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남은 것은 그를 따라 망명해온 옛 기갑사단장 시절의 부하들뿐.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떨어질 곳도 없었다.
“로렌의 십자가에 맹세코! 우리는 파리로 다시 향할 것이다! 살아서 돌아오라, 그대들은 여기서 죽기에는 너무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프랑스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자유 프랑스 만세!”
전차의 엔진음이 굉음이 되어 울려 퍼졌고 프랑스인들은 만세를 외쳤다. 함께하는 영국인들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따라 만세를 불렀다. 프랑스 만세! 자유 프랑스 만세! 나치를 몰아내자!
나치군은 광신적인 충성심으로 무장한 소년병들을 앞세워 런던 교외까지 진격해 있었다. 전 전력이 런던 방면으로 집중된바, 런던이 저들의 공세를 며칠만 저지할 수 있으면 미국은 얼마든지 지원군을 보내 줄 수 있었다.
독일군은 제한된 병력과 보급역량의 한계로 웨일스 방면의 카디프나 브리스돌, 리버풀 같은 주요 항구들에는 전혀 공격을 가하지 않았고, 오직 런던 한쪽만을 보고 진격해 왔다. 런던이 공습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어도 미군이 올 수 있는 항구만 있다면…!
* * *
“준비는 되었나?”
“예, 사령관님. 모든 비행대, 폭격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언제 이렇게 많은 폭격기들을 찍어낸 거지? 롬멜은 의외의 전력들에 놀라고 있었다. 괴링 원수는 동부전선에서의 대공습 이후 소련의 눈 폭풍 속으로 독일군의 소중한 항공기들을 던져넣을 수 없다는 이유로 소련을 억제할 최소한만을 남겨 두고 대부분의 전력을 서부로 돌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정도 규모라니? 육군에 투자할 돈을 해군과 공군에 엄청나게 빼돌렸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가, 공만 세우면 그만이다 껄껄. 언제 이렇게 압도적인 지원들을 받아보겠는가?
초거대 불꽃놀이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공군의 정찰비행단은 혹시 상공에서 보고 싶지 않으시냐면서 육군의 고급 지휘부에게 특등석을 제공할 의향이 있음을 알려 왔지만 혹시나 모를 영국 공군의 반격작전을 우려하여 롬멜은 정중한 사양을 알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가 잿더미가 되고 불타오르는 것을 저희가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크하하하하하!! 쌓아 올리는 데에는 수천 년이 걸렸을지언정 무너져 내리는 데에는 수십 시간이면 충분하지요.”
‘하늘의 학살자’ 리히트호펜은 이번엔 서부전선에 나타나 런던 대공습을 지휘하기로 했다고 한다. 수십 발의 그로서 융에 폭탄과 수천 발의 소이폭탄. 그는 이 엄청난 규모의 불장난이 너무나도 즐거운 듯했다.
비록 그가 좋아하는 민간인 상대로의 무차별 폭격은 민간인들이 대부분 대피한바,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 즐거움은 유서 깊은 이 고도를 때려 부수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려는 듯했다.
영국 공군의 대부분은 수도 런던의 방어가 아니라 민간인들의 피난행렬을 독일 지상공격기의 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차출되었다고 한다. 리히트호펜은 슈투카를 수시로 날려 보내 민간인들의 대피행렬에 공습을 가했다.
“민간인들에게 조준사격이라니! 자네 제정신인가?”
“그들은 분명히 위장한 군인들이었단 말입니다!”
박박 우기는 그를 총통은 직접 명령을 통해 비호했다. ‘공군 사령관의 판단을 존중할 것’. 하지만 롬멜은 리히트호펜의 판단력을 존중할 수가 없었다.
런던은 최대한 남은 대공전력을 끌어모아 조밀한 대공포 화망을 설치하고 공습으로부터 도시를 사수하려 하고 있었지만 대공포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리히트호펜은 대공포가 아무리 지키고 있어도 기관포와 대구경 대공포 화망 사이의 사각지대인 2천 미터 고도에서 밀집대형을 이루고 폭격을 한다면 최대 폭장량과 최고 명중률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그 전략은 동부전선에서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 저희는 또 하나의 새로운 폭격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기존의 고폭탄 폭격은 도시에 피해를 입히는 데 한계가 있었던 반면, 소이탄 위주의 폭격은 도시에서도 엄청난 살상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 이렇게….”
그가 보여 주는 폭격 계획은 실로 기상천외했다. 일반적인 작전이라면 몇 달 동안 주구장창 퍼부을 수 있는 소이탄을 단 사흘 만에 런던 위로 쏟아붓는, 그야말로 쏟아붓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전이었다.
천 톤 단위의 소이탄을 실은 독일 공군이 런던에 배달하듯 소이탄을 퍼붓고 돌아와 다시 적재하고 날아가 다시 또 쏟아붓고… 왔다 갔다 하면서 하루에 만 톤 단위의 소이탄을 쏟아붓는다. 이를 위해 제한된 보급선의 많은 부분이 소이탄으로 채워졌다.
그야말로 간단하지만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이었다.
이탈리아군의 한 장군이 민간인에 대한 부수적 피해 문제는 없느냐고 질문하자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그야말로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장군님. 나의 선량하고 친절한 장군님. 민간인이라고 물으셨습니까? 민간인?”
“그… 그렇습니다만….”
“이 전쟁에서 무고한 민간인은 없습니다! 우리 선량한 장군님. 저기 저 영국의 시민들은 전쟁광 처칠을 지지하고 수상 자리에 올린 범죄자이며 영국 정부와 함께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입니다.
저들은 우리 독일과 이탈리아의 아들들을 죽여 대는 무기를 생산하고 총을 잡고 우리에게 총질을 하고 있지요. 우리는 무장한 적군들과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저들의 생산력과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군들은 입을 다물었다. 생산력과의 전쟁. 나름의 통찰이 담겨 있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저 광인이 제시한 ‘통찰’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롬멜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총통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가? 영국을 점령해 조종하려는 게 아니었나? 이렇게 잔혹하게 때려 부순다면 과연 우리가 세울 영국의 괴뢰정부는 우리를 지지할 수 있을까? 성난 군중에 의해 순식간에 끌어내려지지는 않을까….
물론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게 여론에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 요 얼마 전까지 독일군은 영국인들의 대피를 종용하는 삐라를 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가드’라는 명칭의 지역 방위병력과 그 가족들, 그리고 런던을 떠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토박이들은 남아 있다고 정찰대는 보고했다.
처칠 역시 런던을 떠나지 않고 결사 항전을 천명했다는 그 말에 몇몇은 탄식했다.
우리가 영국을 점령할 수는 있어도… 지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