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57화 (57/300)

# 57

57화

“역시 나만 때리고 저쪽은 손도 못 쓰는 게 제일 즐겁지!”

소련 내의 독일 스파이들은 애초에 존재하기조차 어려웠다. 소련군 내부에서 독일과 인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대숙청 기간 동안 형장의 이슬이나 굴라그의 흙 한 줌이 되어 사라졌다.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심심찮게 있었던 서유럽 유학파 인텔리겐치아나 부르주아지 계급 출신의 혁명가는 스탈린이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모조리 뒤로 밀려났다.

예컨대, 스탈린의 최고 정적이던 트로츠키는 부농 출신의 독일계 유태인으로 독일 학교에 다녔고, 고참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던 카메네프나 지노비에프 역시 유태계 인텔리였다. 이런 이들은 ‘조국이 없다’는 이유로 주류에서 밀려나고 숙청당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비드비젠치’(발탁자)들. 러시아의 노동자, 빈농계급 출신으로 자신들을 출세시켜 준 체제에 무한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이들 사이로 스파이가 파고들 틈은 극히 적었다.

결론적으로 독일과 소련이 첩보전을 벌인다면? 소련은 이념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스파이들과 동조자들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가져다 바치지만, 독일은 힘겹게 힘겹게 한 명씩 집어넣어야 했고 그마저도 조직 내의 숙청에 휘말려 증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소련은 또 하나의 엄청난 무기를 손에 넣었다.

“자! 이걸 다들 보게나!”

“오….”

보로실로프는 낄낄 웃으며 자기가 계획한 작전 두 번째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무려 베리야와의 합동 계획.

‘둘이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더니 의외로 좋은가?’

아니면 보로실로프가 무서워하면서 쫄아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아무튼 정보국을 거느린 베리야와 다수의 특수요원을 손에 쥔 보로실로프는 꽤 재미있는 합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 이름하여… <위폐 작전>.

실제 역사에서 나치 독일은 영국의 경제를 교란하기 위해 40년부터 베른하르트 작전이라는 이름하에 위조 영국 파운드 화폐를 찍어내는 작전에 돌입했다.

물론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고 내부의 권력 싸움에 휘말려 자원과 여력만 낭비하고 끝나 버렸지만. 순수한 권력 싸움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독일의 중앙은행 총재 발터 풍크가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한 것도 있었으니 조금 미안한가?

실제 실행되었다면 영국 경제를 아예 몰락시켰을 수도 있는 이 작전은 이제 보로실로프와 베리야의 합작에 의해 기획되고 실행 단계까지 와 있었다.

보로실로프는 창고에 가득 쌓인 독일제국마르크화를 우리에게 보여 주며 다들 만져보고 들여다보라고 자랑하며 자기의 계획을 소개했다.

“이제 우리는 추축의 본토와 연결되는 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카르파티아 산맥지대를 지나 헝가리로, 유고의 파르티잔과 연계해 이탈리아와 독일 안까지 우리는 이 위조된 제국 마르크화를 뿌려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진짜와 흡사한지는 잘 몰랐는데… 원본이 된 진짜 제국마르크라고 보여 준 것과 최소한 생김새와 질감은 놀랍도록 흡사했다. 물론 당연히 위조방지장치까지 내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었으니 전문가가 보면 구별할 수 있겠지만 나 같은 일반인은 딱 봐서는 전혀 모를 정도로.

이번에는 각국의 첩보망과 연결된 베리야의 차례였다.

“먼저, 나치 독일은 대략 연간 5억 마르크가량의 지폐를 발행합니다. 파쇼 독일의 제국마르크는 저들이 점령한 국가나 동맹 국가들의 화폐와 고정 환율로 연동되기에 사실상 저들의 영향권 안에서 마르크는 공용 화폐나 다름없습니다.”

호오 그랬군…. 이 한가득 쌓인 마르크 뭉치들, 100마르크와 1천 마르크짜리 화폐들을 독일의 동맹국 안의 우리 요원들에게 화끈하게 뿌려 버린다면? 잡기는 더 어려우면서 각국에서 우리 요원들이나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활동을 돕는 현지 레지스탕스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더불어, 독일의 경제를 인플레이션을 통해 교란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저들은 화폐의 금태환을 고수하고 있으며 4.2마르크가 1 미국 달러와 동등한 가치를 지닙니다. 계획은 이렇습니다. 파쇼 점령하 내지는 동맹국인 여러 나라들을 거치며 위조화폐를 세탁해 금, 혹은 달러로 환전하고 아직까지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통해 미국으로 반출합니다.”

물론 이 작전에도 돈이 들었지만, 미국의 렌드리스에 뭔가 대가를 치러야 했던 소련의 입장에서 금과 달러를 수급할 수 있다는 것은 막대한 가치를 지닌다. 이거 보로실로프한테 키스라도 해 주고 싶은데?

이 작전은 일석삼조나 다름없었다. 우리에겐 돈이 되고, 저들은 경제가 교란당한다. 각국의 레지스탕스, 파르티잔 세력을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어 소련을 지도적 위치로 올려놓는 효과까지!

“단지 유럽뿐만 아니라… 극동을 통해서도 작전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머나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일과 활발한 거래를 하고 있고, 일본에 위조 마르크화를 풀어 서기장 동지께서 말씀하셨던 ‘태평양의 전쟁’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마음에 든다. 독일 본토, 혹은 유럽에서 위조 화폐를 쓰는 것은 당연히 위험 부담이 있다. 이것이 위조 화폐라는 게 들통날 경우 우리 첩보망 자체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굳이 현지의 레지스탕스들과 연계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반면 멀리 가서 검증이 어려워질수록 위폐를 사용하는 것은 쉬워진다. 일본은 ‘아직’ 미국과 전쟁에 돌입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일본에서 마르크 → 엔 → 달러로 교환해서 또 달러를 당겨올 수도 있고….

“하나 굳이 더 집자면 서기장께서 지원하기를 바라셨던 극동의 조선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 베리야의 말에 따르면 대략 5마르크가 4엔. 이렇게 가득 쌓인 1천 마르크짜리들이 조선인 임금노동자의 1년 치 연봉에 가까운 돈이다.

동포들이 월급을 아껴 한 푼 한 푼 모은 돈으로 사업을 해야 하는 우리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숨통이 트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당연히 군자금이 있어야 병력을 모으고 조직을 세우는 법. 지난번 주었던 금 가지고는 모자랄지도 모른다.

“아, 보로실로프. 그리고 자네가 만들기로 했던 조선인 군단은…?”

“예? 아, 지금 자원병들이 속속 극동에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극동군구에서 기계화를 위한 기초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고 연락을 보내 왔습니다.”

나를 만난 김원봉은 명목상 조선의용대의 대장이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대원의 대부분이 장개석을 따라 그저 도망만 다니는 임시정부에 실망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합류하러 갔기에 이 시점에는 그다지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소련이 전폭적인 지원을 천명했고 중국 공산당과도 협상을 통해 양해를 구했기에 조선의용대, 팔로군 출신의 숙련된 병력이 산서의 해방구에서 몽골을 통해 소련령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만주와 연해주에 있는 조선인들 역시 조국의 해방을 위한 무력투쟁에 동참하기 위해 소련 극동으로 향했다. 최고의 무기와 최고의 교관들을 제공하리라! 나는 조선인들 앞에서 그렇게 천명했다.

그리고 이들을 이루는 중요한 세력 하나 더.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고향 땅을 떠나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의 집단농장에서도 근면히 일하며 독소전쟁에 참전하여 싸우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출신 병사들 역시 스스로 조선계라고 하는 사람들은 차출하여 극동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인 전투 경험이 있어 신편 부대의 기간병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우수한 자원들입니다. 특히 감투정신이 굉장히 높고….”

그래. 강제로 떠나 와야 했던 부모님과 친지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소련에 남고자 하면 남아도 좋다. 가고자 하면 가도 좋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그대들의 선택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

내부의 민족주의적 책동을 강경히 탄압해 왔던 소련 정부가 태도를 바꾸어 이렇게 나오는 것이 얼떨떨했겠지만 내가 감히 할 수 있는 사죄라고 하자.

“그분은… 어디 계신가?”

“예? 그분이라 하면… 아! 모스크바에 초청하여 며칠 전 도착하였습니다.”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1868년생이시니 이제 일흔셋. 자유시 참변에 휘말리고 독립군에서 소련군이 되어 중앙아시아로 끌려와 이제 인생의 황혼을 앞에 둔 조선 독립군의 지도자 홍범도.

나는 그를 반드시 찾아오라고 명령했고, 카자흐스탄에서 극장의 수위로 살고 있던 그분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내 기억대로라면 독소전쟁 중 노환으로 돌아가시니, 꿈에도 그리는 조국 독립을 보실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만나시겠습니까?”

“그럼! 그럼!”

생각에 잠겨 있던 터라 너무 목소리가 크게 나와 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또 서기장의 친 조선 기벽이 도진 것이겠거니 하고 마는 듯했다. 애초에 조선 반도는 차르 시절에도 얻어내려 했던 땅이기도 했고, 향후 극동의 위성국으로 삼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원래 민족주의는 반동으로 취급하던 서기장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사람들이 보기에 서기장이 차라리 이런 문제에나 고집을 부리는 것은 고마운 듯했다.

훨씬 중요한 사안들에서는 원래보다 훨씬 유해졌으니.

반대로 내 관점에선 지금 이 작업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한국 독립운동이 연합군에 소속되어 실제로 피를 흘리고 전공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을 하지 못했던 실제 역사의 우리 민족은 결국 분단을 받아들여야 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조선인 군대에 인구에 회자될 만한, 빛나는 전공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 * *

한때 내가 본 사진에서 멋지게 길렀던 콧수염은 이제 세월이 내려앉아 하얗게 세어 있었다. 많이 쇠약해진 듯한 노장군은 내가 들어서자 손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 경례를 했다.

나 역시 최대한의 존경을 담아 경례를 붙였다. 마디마디 거친 손에서 그가 져야 했던 고난의 무게가 전해져 오는 듯했다.

“홍 장군, 말씀은 많이 들었소이다. 앉으시지요.”

“예, 서기장 동지.”

대체 어디서 들었는가? 아니 애초에 장군도 아니었지만 감히 서기장에 말에 태클을 걸 수는 없고 그는 의문을 속으로 삭이는 듯했다.

이제 스무 살이나 되었나? 그의 손녀 역시 무려 서기장이 이렇게 공손한 데에 할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의아한 듯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면 왜 저기 깡촌의 극장에서 수위 노릇이나 하고 있었지?

다 ‘내’ 잘못이란다. 나는 미안해서 손녀의 눈을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홍 장군, 우리는 이제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군단을 창설하기로 했소. 대략 8천 명가량의 조선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와 이르쿠츠크에서 극동군구 산하로 편입되었고 42년 독립 조선 기계화군단으로의 편성을 위해 훈련을 받고 있소이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꺼져 가는 눈에서 빛이 다시 반짝였다. 눈물이 맺히는 듯했다. 누가 이 강인한 노장을 감히 눈물 흘리게 하는가.

독립, 독립. 아 그 꿈에도 그리던 이름이여! 나는 약속했다. 조선 땅을 가장 먼저 밟고 그 땅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킬 자는 조선인들일 것이라고.

“나는 조선의 독립을 절대적으로 보장할 것이오! 그 누구도, 우리 소련도 조선의 독립과 자주에 손대지 않겠소. 내 말을 믿어도 좋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그는 이제 통곡하기 시작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영원하라 나의 조국! 그가 말하는 우리말을 나는 애써 알아듣지 못하는 척을 해야 했다. 할아버지의 격한 반응에 놀랐는지 손녀는 할아버지를 부둥켜안았다.

“그… 그런데 그걸 왜 저희에게…?”

“들어오게!”

손녀가 내게 묻자, 나는 밖에 있던 사람을 불렀다. 엔카베데 출신의 경호원은 조심히 안으로 들어와 장군의 예복을 한 벌 탁자 위에 내려놓고 총총 나가 버렸다. 장군의 정복 칼라와 어깨에는 별 두 개가 붙어 있었다.

“홍 장군을 독립 조선 기계화군단의 명예 사령관으로 임명하오. 계급은 부족하지만 소장 계급이오. 나이가 들어 실제 지휘를 맡기는 어렵다는 우리의 판단에 따라 명예 계급을 수여했으니… 이해해 주기를 바라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감격에 통곡하는 저 노인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