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화
"원자로 건설에는 성공했나?"
"예,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광산에서는 이제 우라늄을 가공하여 원자로 건설 및 플루토늄 생산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플루토늄 생산과 정제에도 시간이 필요하기에..."
우랄 산맥의 비밀 도시들에는 베리야의 지휘 하에 핵개발을 진행할 연구도시 겸 생산공장이 건설되고 있었다. 통칭 ‘아톰그라드’ 들에서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모여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했다.
우리가 개발을 목표로 하는, 이 시대에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는 대충 두 종류가 있었다. 우라늄-235를 이용하는 ‘리틀 보이’ 식 핵폭탄과 플루토늄을 이용하는 ‘팻 맨’ 식 핵폭탄.
우라늄-235는 핵무기나 발전에 이용될 수는 있었으나 정제 효율이 낮았다. 미세한 질량의 차이를 이용해 1%도 안되는 우라늄-235를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라늄-238로부터 분리해 농축하는 데에도 시설과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플루토늄은 어쨌든 화학적 성질이 달라 정제가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자연 우라늄 원광 안에 극소량밖에 없는 우라늄-235를 핵반응시켜 우라늄-238에서 핵연료를 생산하는 공정을 통해 더 많은 양의 플루토늄을 만들 수 있어 효율이 높았다.
물론 개발에는 난항이 따랐다.
‘미국도 아직 여기까지는 못 왔을텐데···’
핵반응이 시작되는 임계질량을 원자로에서 실험적으로 테스트하고, 또 자칫하면 터질 수 있는 핵반응을 제어하여 조심조심 필요한 원료를 생산하고··· 과정 하나하나마다 넘어야 할 난관이 많았다. 플루토늄의 정제에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알려줄 수 있지만.
"이 종이를 쿠르차토프 박사에게 전달해주게. 플루토늄 정제에 관한 내용일세."
베리야는 내가 넘겨준 쪽지를 공손히 받아 접어 품 속에 집어넣었다.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에 개발되었던 방식이니 아직 이 세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지식이지만... 원리는 간단했다.
사용한 핵연료 안에는 우라늄과 플루토늄, 그리고 다른 잡스런 방사성 원소가 남게 된다. 이걸 정제하기 위해서는 연료를 산처리하고 유기용제에 녹여서 뽑아내고... 아무튼 그런 내용을 대충 정리해 놓았다.
베리야는 핵개발의 실무 책임자인 이고르 쿠르차토프에게 내가 전달해주는 단편적인 내용-기체확산법을 이용한 우라늄 농축, 원자로 제작, 플루토늄의 정제, 팻 맨의 설계-을 알려주고 쿠르차토프는 빠르게 핵개발을 하고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들어 있는 우리 간첩 클라우스 푹스, 소련에 동정적인 과학자들이 은근슬쩍 알려주는 정보들, 그리고 영국을 거쳐 독일까지 선이 닿아 있는 우리 스파이들까지. 온갖 곳에서 쏟아지는 정보는 우리의 핵개발 속도를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오히려 이걸 투발할 수단이 더 문제가 될 정도로.
"바실렙스키 장군, 신형 전투기와 폭격기 양산은 얼마나 남았소?"
"그것이... 전투기는 6개월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폭격기 양산은 아직 짐작도 하기 어렵습니다"
"빌어먹을 돼지같은 미국 기술자들한테 여자든 황금이든 원하는 것을 모두 던져주어도 되네!"
온갖 수단을 동원해 데려온 미국 기술자들에게는 막대한 몸값과 호화로운 대우가 주어졌다. P-47 썬더볼트와 같은 지상공격기 겸 전투기는 일단 설계도를 어찌어찌 구해내는 데 성공했기에 카피와 양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상대적으로 미국인들이 덜 필요했다.
물론 기반 산업분야-제강, 비철금속, 정제유-등이 부족했기에 미국에 의존하기는 해야 했지만.
"알루미늄 생산은 여전히 미진한가?"
"그··· 그렇습니다. 원광 공급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전력이 부족합니다."
으음. 이것은 곧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핵개발이 궤도에 오르고 원자력 발전이 가능해지면 값싼 전기를 알루미늄 생산을 위해 공급할 수 있다. 제철, 제강, 비철금속 생산처럼 에너지를 그야말로 마구 잡아먹는 분야들이 조금이나마 감당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핵 개발에는 최대한 박차를 가해야겠군."
"제 몸과 마음을 바쳐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베리야는 과장되게 경례하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하는 짓마다 역겹고 거부감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튼 핵개발을 이렇게 끌고나가는 것을 보면 유능한 것은 확실하여 버릴 수도 없고··· 내심 한숨을 쉬었다.
또, 무리하다 싶이 시키는 일들도 척척 해내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였다.
"그분들과 접선하는 것은 성공했소?"
"예. 서기장 동지의 서한은 분명히 전달되었습니다."
독일이나 미국이 핵을 늦게 가질수록, 내가 그나마 컨트롤 가능한 소련 역시 핵을 안 쓰고 숨기고 있을테니 세계가 핵이라는 위험한 물건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지 않을까?
그는 파이프를 한 모금 피워물었다. 탁자에는 곱게 손글씨로 쓰인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결코 상상해본 적 없는 곳에서 받은 이 편지는... 그가 생각해본 적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핵무기를 손에 넣어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핵무기를 최대한 빨리 개발해야 할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제는 그것이 후회되었다.
나치 독일은 패망해야 했다. 저들이 핵무기를 손에 넣어서도 안되었다.
‘그러나 핵무기의 사용은 어떤 후과를 불러올 것인가?’
편지는 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간단한 한 문장으로.
세계 3차 대전에서 쓰일 무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4차 대전에서는 아마 돌멩이와 나무막대기를 쓸 것입니다. 혹은 4차 대전마저 없을지도 모르지요.
아직까지 이 시대는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라듐을 탄 물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겨 팔기도 했고, 장난감이나 초콜릿에 방사능 물질을 넣은 것이 '웰빙' 식품으로 유행을 타기도 했다.
몇몇 사례들로 인해 방사능이 인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지만 아무도 그 기전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직 인류는 유전이며 암의 비밀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끽해야 좋지 못한 환경이 기여할 수 있다는 정도? 스탈린 서기장이 너무나 당연하게 서술한 DNA와 유전의 관계는 아인슈타인 그 자신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선배 과학자이자 그가 존경해왔던 마리 퀴리 박사는 재생불량성 빈혈로 죽었다.
방사능 물질에서 나오는 방사선이나 X선이 다 고에너지 전자기파의 일종이며... 라는 설명은 세계 최고의 과학자 중 한 사람인 그에게는 필요없는 사족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인체를 교란시켜 암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개념은 나름의 일리 있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내용도 있었다. 이 편지에 따르면 핵무기는 수많은 민간인들을 그렇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유전을 통해 몇 대를 거듭하는 비극! 핵이 떨어진 자리에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까지 병에 걸려 앓게 만들 수도 있다니? ‘낙진’ 이라는 단어는 스탈린 서기장이 직접 만들었는지 주석처럼 해설도 달려 있었다.
또, 몇 가지 핵분열 공식들이 예시처럼 적혀 있었고, 그에 대한 주석 역시 달려 있었다. 핵무기가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스트론튬은 칼슘처럼 뼈에 침착해 인체 내에서 몇 년간의 반감기를 거치며 내부 피폭을 가할 수 있습니다. 내부 피폭의 결과 혈액세포들이 암성 변환을 거치는 백혈병과 그 유사 질병들을 유발합니다. 아이오딘은 갑상선에 흡수되어 갑상선의 종양을 발생시킵니다.’
‘핵무기에서 방출되는 대부분의 방사능 핵종들은 인체에 흡수되어 기형을 유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아직 세상의 빛을 보고 단 하나의 죄도 저지르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도시 단위로 폐허가 생겨날 것이며, 그 영향은 수십 년간 우리의 후세 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구는 우리를 버릴 수 있지만, 우리는 지구를 버리고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박사님의 결단을 기다리겠습니다.’
편지에서 당연한 듯 이야기하는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놀라웠다. 어디서 이걸 알아냈을까? 편지에 달려 있는 서명이 어느 정도 납득을 가능하게 했다.
-모스크바에서, 박사님께 무한한 존경과 경의를 보냅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은 편지 속에서 어떻게 저러한 인체 영향 결과를 알아냈는 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 서기장에 따르면 소련은 오직 국가의 방위를 위해서만 핵무기를 보유하고, 결코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에도 비슷한 편지를 보냈다고 휘갈긴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미국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우방국에게 내정간섭을 가할 수 없어 손댈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소련은 깨어 있는 학자들의 조직된 힘에 의지하고자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세계 평화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스탈린은 편지에 그렇게 적고 있었다.
독일에는 누가 있지? 아인슈타인은 잠시 고민했다. 필립 레너드? 요하네스 스타크? 듣도 보도 못한 '독일식 물리학' 이라며 그가 주장했던 상대성 이론을 논박했던 개자식들이 '유태 물리학'에 기반한 핵무기를 연구하고 있다니 그는 어쩐지 고소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아마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면 소련은 핵물리학에 이미 상당한 연구결과를 축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독일을 마지막에는 저지할 수 있겠지만... 나치의 광기를 편지 한 장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어쩐지 회의적이었다.
"나는 내 역할을 해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이와 펜을 집어들었다.
그는 이론물리학자였으며, 실험물리학이나 엔지니어링과는 거리가 꽤 있었다. 나이도 있었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회주의자라는 주류 사회의 낙인까지 찍여 있어 이런 최고 기밀 프로젝트를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핵실험을 통해 뭔가를 만들어내는것은 실험물리학을 전문으로 하는 후배들이 담당할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몇 명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오랜 학술적 동반자이자 존경하는 후배 닐스 보어, 그처럼 망명해온 엔리코 페르미, 아니면 로렌스나... 요새는 기라성 같은 젊은 후배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쓸 편지가 많았다.
그나저나 대체 이해할 수 없는 추신이 두 개 달려 있었다. 아니, 사실 하나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스탈린 서기장이 이것에 대해 뭘 안다고? 싶은 반감이 살짝 들었다.
P.S. 1. 신은-우리 소련인들은 신을 인정하지 않지만-주사위 놀이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박사님의 명예를 위해.
P.S. 2. DDT는 인체와 여러 생물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박사님이시라면 이것을 공론화해주실 적절한 방법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DDT는 최초 살포된 자연계 환경에서는 적은 농도를 가지나 생물의 지방에 녹아 '축적' 되기에 포식자로 갈 수록 높은 농도를 가지게 됩니다. 특히, 조류의 알 껍질을 얇게 해 번식을 저해하고 자연을 교란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걸 왜 나한테..? 아인슈타인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 몸이 유명한 탓인 것을. 하하하하. 어쩐지 어깨가 우쭐했다. 인류의 파멸을 막아서기 위해서 고민하는 천재 과학자! 그것도 세계 최고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 인정한 천재인 것이다!
"이정도로 스탈린 서기장이 날 존경하는 줄 알았더라면 소련으로 망명할 것 그랬나?"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