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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53화 (53/300)

# 53

53화

모델 원수는 관자놀이를 짚은 채, 책상을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군. 항상 부하들 앞에선 강인하고 명랑한 사령관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사색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작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사색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소련군은 그저 많이 몰려와서 계속 많이 몰려오고 있었다.

모델은 6군, 17군, 1기갑사단의 전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며 압도적인 교환비로 계속 싸워왔으나 소련군은 계속 증원되고 있었다. 대략 10:1에 가까운 놀라운 교전비에도 불구하고 추정되는 병력 비율은 그다지 달라질 줄은 몰랐다.

‘다른 전역은 이 정도까지는 아닐 텐데···’

남부집단군 사령관이라지만 그는 전 전선에서 올라오는 동향에 대해서도 보고받고 있었다.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 앞에는 이렇게 많은 소련군이 바글바글대고 있지는 않았다.

여기에 그가 가진 전력들의 질이 제일 낮았다. 수도의 쿠데타에 불안해하는 낮은 사기의 루마니아군. 전통적으로 루마니아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으르렁대는 헝가리군. 마찬가지로 낮은 의욕을 자랑하는 슬로바키아와 이탈리아군까지.

최소한 이 인원이 독일군이기만 해도 훨씬 나았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가혹했다.

"중포전력은 계속 증원되고 있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사령관 각하."

제기랄. 답이 보이질 않았다.

소련군 포병의 숙련도는 솔직히 말하여 허접한 수준이었다. 대포병사격, 관측, 사격통제 등 대부분의 요인에서 독일군에 비해 소련군은 열등했다.

하지만 저들은 이 열등함을 월등히 많은 숫자로 극복해 나갔다. 쏘다 보면 맞는다. 포대 하나가 파괴되면 그 자리에 두 개를 밀어 넣는다. 독일군은 최대한 반격에서 오는 피해를 경감시키기 위해 일제사격 후 이탈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소련군은 묵묵히 그 포격을 다 얻어맞으면서 헛손질을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런 교환은 대승으로 이어지겠지만, 기본적인 머릿수가 차이가 나는 바 독일군은 월등한 교환비를 내면서도 한 발짝씩 물러서야 했다.

"결국 줄행랑이라도 쳐야겠군."

"예?"

전선은 결국 재편되어야 했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오지도 않았다. 러시아를 지켜온 명장 동장군에게 모델은 감히 싸움을 걸고 싶지 않았다.

지금 피해를 입혔다 한들 겨울이 오면 보급은 더 나빠지고 증원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영국으로 간 롬멜 원수의 군대가 이쪽으로 왔다면 더 좋아질텐데···’

서부전선에 너무 많은 역량을 투입했다. 동부전선에서는 구멍이 뻥뻥 뚫려가고 있었고 그걸 메우기 위한 전략적, 전술적 예비대가 모두 부족했다.

양면전선을 피하기 위해 영국을 먼저 끝장낸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지만··· 대체 미국에게 왜 싸움을 거는가? 막대한 투자를 받은 공군과 해군은 그저 좋다고 허허 웃었지만 육군은 휘청이고 있었다.

소련이라는 막대한 체급을 가진 거인에게 치명타를 입혀 쓰러트린다는 애초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더 날카로운 무기, ‘신무기’를 쥐어주며 이거면 됐지? 라는 식으로 총통과 전쟁성은 나오고 있었지만···

고작 그런 걸 가지고 대국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지휘관들을 소집하게."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총통은 그에게 증원을 약속했다. 물론 다음 해의 봄, 혹은 여름에.

‘서부를 정리하고 나면 증원을 보내도록 하지.’

영국을 굴복시킨 이후에는 항공전력의 대다수를 동부전선으로 돌려줄 수는 있으나 어차피 눈폭풍이 불어닥치는 소련의 겨울에서 항공전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필요한 것은 보병과 포병. 총통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비시 프랑스에서 병력을 징집해줄 것을 약속했다.

총통이 말한 규모는 최대 200만에 이르는 거대한 증원이었다.

물론 당장 오는 증원은 찔끔찔끔, 발트나 알자스-로트링겐 출신의 의용병 연대들 정도였지만.

지금 이 겨울을 나기 위한 지원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20주면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다던 애초의 낙관적이기 짝이 없는 작전구상 때문에 방한장비는 이제서야 부랴부랴 생산되고 있었고, 인력과 예산은 해군과 공군이라는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현재의 정예병들이 모조리 죽어 없어진 이후에 증원을 보내주면 무엇 하는가?

총통은 그렇기에 더더욱 공세의 교두보로서 키예프 방향으로 돌출된 이 지역을 수비할 것을 원하고 있었다. 훈련도가 낮은 병력으로 다시 한번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면 막대한 피해가 날 것이 자명했으니.

"모델 원수, 당신이라면 저 지역을 지켜내어 반격을 위해 활용할 것이라고 믿소!"

하지만 모델 스스로가 저곳을 지켜야 할 지가 의문이 들었다. 저 쓸모없는 땅덩이 몇 치를 지키자고 수만 정예병, 대독일의 아들들을 강철의 파도 앞에 내던져야 하는가? 맨손으로 피륙으로 쇳덩이를 막아내야 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취한다 한들, 그러면 거기는 지킬 수 있는가?

‘이제야 우크라이나를 반쯤 가로지른 것이건만···’

소련은 넓었다. 지독하게도 넓었다. 이 드넓은 대지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인데, 차지하는 것은 둘째치고 진군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소련군은 집요하게 보급로를 노렸다. 저들은 아군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철도망의 개궤는 기상과 지표면의 문제로 여름보다 느리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북부 발트 일부만은 독일과 호환되었기에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지만, 남부에서 보급은 결국 차량과 말에 일정 이상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련군-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파르티잔들과 가끔 나타나는 슈투르모빅들, 그리고 끔찍한 소음을 내뿜는 신형 ‘로켓병기’는 계속 이 지점을 타격했다.

파르티잔들은 야간에 날아오는 수송기를 통해 각종 물자를 전달받았다. 이들은 휴대가능한 소형 로켓포와, 기관총으로 집요하게 독일군의 물자보급차량을 공격했다. 로켓포의 명중률은 그닥 높지는 않았지만, 맞추기만 하면 트럭 정도는 가볍게 격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트럭에 실린 물자에 따라 대폭발이 일어날 지, 아니면 격파 정도로 끝날 지가 결정되었다.

하필 소련군 파르티잔이 맞춘 것이 유류나 탄약이 가득 실린 트럭이었다면? 유폭한 유류와 탄약 덕분에 근처에 있는 트럭들까지 폭발에 휩쓸릴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상태가 영 좋지 못한 도로까지 망가지는 것은 덤이라고 해도 좋았다.

남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한 로브노 근처에서는 아예 탄약이 가득 실린 트럭 몇 대가 한꺼번에 펑펑 터지는 바람에 15cm 야포탄의 보급이 한동안 차질을 빚은 적도 있었다.

‘이 근처에서 파르티잔들이 설친다는 것 부터가 곤란하지만···’

또, 슈투카의 나팔에서 착안했는지 저들이 발사하는 2톤 정도 되는 로켓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기괴하게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독일군의 진지와 물자 보급창을 타격했다. 소련군은 특히 야밤에 어디에선가 로켓을 실어와 몇 발씩을 융단폭격처럼 뿌렸고, 정찰기와 야간전투기들이 발진해 이들에게 보복하려 해도 곧 도망가 버렸다. 장병들은 노이로제를 호소했다.

"언제, 어디서 저것이 날아올 지 모르겠는데 잠을 편히 잘 수 있겠습니까?"

명중률 자체는 형편없었지만, 아무튼 한번 떨어지면 그 주위는 박살이 났다. 옆 진지에서 숙영하던 아군 부대원들이 갑자기 떨어진 1톤에 가까운 폭탄에 의해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겁에 질렸고, 나팔 소리가 들려오면 우왕좌왕하며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악랄한 소련군들은 각종 기만전술 역시 도입했다. 가끔은 나팔을 장착하고 탄두를 매우 가볍게 줄였는지 훨씬 먼 거리를 날아가는 로켓이 날아와 넓은 범위의 아군을 괴롭혔다.

또 어떤 때에는 나팔을 장착하지 않고, 야밤에 조용히 날아와 휴식하는 아군 위에 쏟아졌다. 대부분이 나팔을 장착하고 있었기에 소음을 통해 방공 대비가 된 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는지 나팔이 없는 로켓을 수시로 섞어 아군의 방공망을 교란하곤 했다.

"원수 각하, 장병들의 피로도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나도 잘 알고 있네."

모델 원수는 그의 직권을 사용해 병사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강제로 끌려온 민간인 여성들을 다 석방시키고 특별 조치를 통해 보호하고 있었다. 남부집단군 전역에서 거의 수천 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발견되었고, 모델 원수는 유태인에게 덜 적대적인 헝가리군, 이탈리아군과 밀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가족들은 대부분 강제 노동수용소로 끌려갔고 그동안 겪었던 참담한 상황에 여성들은 대부분 삶의 의지를 잃은 상태였으나, 아무튼 이 지옥 밖에서의 삶은 그들을 바꿔 놓을 수 있을것이라고 모델은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병사들이었다. 제공되는 '위안' 이 사라진데다가 소련군의 심리전-로켓과 나팔, 그리고 수시로 날아오는 삐라들-에 지치고 전투에 떠는 이들은 점점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전임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룬트슈테트, 그 미친 늙은이는 사령관 재임 당시 민간인 학살을 지시한 바 있었다.

많은 병사들은 민간인 학살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제가 죽인 그 사람들이··· 계속 꿈에서 나옵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야전 병원은 이런 환자들로 미어넘쳤다. 쉘 쇼크로 미쳐가는 병사, 자기가 죽인 민간인들이 꿈에 나온다며 시뻘개진 눈으로 악을 쓰는 병사, 전투에서 자기 스스로를 쏴 버리고 도망치는 병사···

전임 사령관과 그 예하 장교들은 이런 병사들에게 학살을 명령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병사들은 그 잔혹한 명령에 복종했다.

<제가 죽이지 않으면 제 전우가 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야 합니다.>

수십 명을 학살한 병사를 취조한 진술서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 젊은 병사들을 학살로 이끈 동기는 놀랍게도... 전우애였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 옆의 전우가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한다. 그러니 나 역시 도망치지 않겠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악몽과 죄책감과 망상에 시달려 병사들은 부서져 갔다. 어디선가 구해온 술을 마시고 취해버리는 이들, 폭력적으로 변한 이들, 그리고 일부는 아예 광기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인가!"

어떤 중대는 교전 이후 부대가 포로로 잡은 소련군을 후송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학살당한 소련군 병사들은 다들 소련군 군복을 찢어 만든 끈으로 손발이 묶여 있었고, 후두부에 권총탄 한 발씩이 박혀 있었다. 확인사살을 위해 경동맥을 대검으로 찔러버린 흔적 역시 모든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열등 인종에게 도이치 민족을 위해서도 부족한 자원을 나누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입니다!"

변명은 간단했다. 열등인종들에게 아군의 부족한 보급을 나누어줄 수 없다. 보급 소요를 최소화하기 위해 권총탄 한 발씩만을 사용했으며, 대검을 이용해 확인사살했다.

자신들의 행위-보급을 아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 젊은 대위의 눈에는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약식 군사재판을 통해 총살형을 선고받은 그는 지극히 답답한 것 같았다. 이 간단한 것을, 이 간단한 것을 수뇌부는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 대위는 결국 자살했다. 자살에 쓰인 권총을 빌려 준 간수는 대위가 남긴 말을 전달했다.

"총살하는 데 귀중한 소총탄을 낭비하고, 전우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입히느니 자살하겠습니다. 권총 한 정만 빌려주십시오."

대위는 수뇌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하고 또 분노했지만, 모델은 자신의 참모들과 예하 지휘관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 광기,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피를 손에 묻힌 자들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전우애로 정당화시키고,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덮어둘지언정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지극히 그동안 쌓아왔던 가치관을 파괴시키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아들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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