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우리가 적 12개 사단을 섬멸하면, 적은 그냥 12개 사단을 편성한다>
<우리 정보국은 소련에 160개 사단과 3천대의 전차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400개 사단과 2만 대의 전차를 파괴했으나, 앞에는 500개 사단과 3만 대의 전차가 있다.>
실제 역사의 동부전선에 대한 독일군 최고위층의 인식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소련군은 결코 프랑스처럼 쉽게 항복해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전투 의지를 불태워나갔다. 그리고 저 말들을 지금 상황에 맞추어 조금 바꾸어 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12개 사단을 섬멸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저들은 12개 사단을 새로 편성했다.>
<소련에는 400개 사단과 2만 대의 전차가 있었고, 이제는 600개 사단과 3만 대의 전차가 있다>
독소전쟁의 규모는 독일이 치뤄냈던 다른 전선의 전쟁들보다 0 하나를 더 붙여야 할 정도로 거대했다.
실제 역사의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추축군이 합계 4만 명 가량이 전사하고 30만 명이 포로로-대부분은 이탈리아군-잡히는 정도였다.
그것도 40년부터 43년까지 3년간. 저 히틀러가 사용한 '천재적인 전략'으로 인해 아프리카 전선을 조기 종결시켜버리고 영국을 갈아버려서 줄인 추축군의 손실은 끽해야 30만?
이 정도의 손실은 실제 역사의 동부전선과 비교한다면 41년 반 년간의 손실과 맞먹고, 44년이나 45년에 각각 150만 이상씩 '사망' 한 것에 비추어 본다면 패망을 한두달 정도 뒤로 미룬 것밖에 되지 못했다.
지금은? 우리 첩보국과 군사정보국이 빼온 자료와 잠정적으로 집계한 바를 종합해 보면 이미 저들은 120만에 가까운 완전 손실을 입었다. 정보국은 2.5대 1이라는 교환비에 경악했고 나도 경악했다.
‘이것 밖에 안 죽었다고..?’
소련군의 포로는 실제 역사보다 확 줄었고 이는 완전 손실률의 하락, 즉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거나 군수공장으로 갈 수 있는 인원이 훨씬 증가한 것을 의미했다.
또한 개전 전부터 복무하던 숙련된 장교들과 장병들이 60%씩 증발하는 대참사 역시 아예 일어나지 않았기에 소련군의 총체적 전투력은 곱의 곱으로 증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배치된 우리 군대는 450만 명. 여기에 분기당 최소 100만 명 이상을 추가로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도 부차적인 전선이 열릴 수 있기는 하지만... 그정도를 감당하지 못할까.
그리고 독일은 최악의 수를 두었다. 아니, 저새끼는 그냥 미래를 보고 온 히틀러인가? 미래인이 아니라? 어떻게 미국한테 저 지랄을 할 생각을 하지?
"현재 미국의 자산인 파나마 운하에 대한 기습 공격을 한 독일은 공격이 가해지기 30분 전에 선전포고문을 주미 독일대사를 통하여 미국 국무부에 전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뻔뻔한 태도에 분노한 미국 의회는 전쟁 참여를 의결하였으며..."
"그놈들 미친거 아니오?"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미국의 막대한 생산력으로부터 직접적인 수혜를 겪어본 이들이라면 더더욱. 전선지휘를 키르포노스와 톨부힌, 말리놉스키에게 맡겨두고 잠시 모스크바로 올라온 주코프는 콜라를 홀짝홀짝 마시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사실 미쳤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아마 나처럼 실제 역사에서 미국의 생산량을 봤으면 너희들도 내 심정을 이해할걸?
독일이 가지고 있는 전함 함대만큼을 미국은 2년, 혹은 3년이면 찍어낼 수 있었다. 독일이 아무리 전 서유럽의 공업력을 장악했다 하더라도-지금은 그러지도 못했고-그걸 따라가려면 동부전선이 뚫린다.
편의상 미국과의 대서양 전선을 서부전선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렇게 떡상한 독일이래도 내가 보기엔 동부 혹은 서부, 둘 중 하나 정도만을 감당할 수 있었다. 특히 소련의 전력을 전쟁 극초반에 기습적으로 제거하지 못했으니.
와글와글하며 좌중이 독일의 전략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를 논의하고 있는 와중, 내 생각은 저쪽 반대편을 향해 있었다.
"일본은... 왜 미국과 개전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들 하시오?"
"예?"
내 입장에서 일본은 당연히 미국과 개전을 해야 맞았다. 이번 겨울 중 진주만을 기습할 줄 알고 미국에게 열심히 뻐꾸기를 날렸는데 독일이 뜬금없이 파나마를 공격하는 바람에 나만 바보가 된 꼴이 되었다.
미국에 가서 열심히 떠들던 몰로토프가 바보된 것인가? 아무튼, 미국인들은 약간씩 우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12월에 일본이 공격할 수 있다고 알린 것이기에... 아직 12월이 안 됐으니 열심히 우겨볼 만도 하지만 일본은 미국에 대해 저자세로 나가며 추축 동맹의 일원으로서 참전은 없다고 선언했다.
어딘가 골때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서기장 동지, 지금까지 계속 말씀하셨지만... 일본이 반드시 미국과 개전하겠습니까? 당장 중일전쟁에서 저들이 허우적대고 있는 판에 새로운 전선을 연다는 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옳을 지.."
"아니 그.... 하..."
그래 씨발 당연히 니들이 맞거든? 근데 그새끼들이 그렇게 논리적인 것들이 아냐! 아오...
그동안은 스타브카의 구성원들에게 내 권위와 권력을 이용해 일본이 대미 기습 공격 및 개전을 할 것이란 전제 하에 작전을 짜도록 했다.
그런데 까보니 뭔가? 일본은 전혀 안 그럴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조차 기만전술의 일환이 아닐까 의심이 들긴 했지만 그걸 저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혹은 제한적인 동남아-인도양에서의 충돌은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영국처럼 식민지에 대한 패권을 유지할 능력을 상실한 열강들을 공격하고 미국은 대서양 방향이 급해진 이상 이를 묵인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러겠습니까? 대서양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영국과 협력해야 하는데, 한쪽에서는 영국이 공격받는 것을 묵인하고, 한쪽에서는 돕고. 이럴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것 역시... 좋은 지적이지만 영국이 과연 이 지경까지 이르러 식민지를 붙들고 있겠습니까?"
"반대로, 식민지를 붙들고 있으려다 이 꼴이 났다면 지금에 와서 식민지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온갖 예측이 튀어나오며, 의견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주로 내가 이끌어가고 필요한 것만을 질문하던 기존의 분위기와 달라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 같아 기쁘기도 했지만... 아저씨들 어쩐지 헛다리 짚고 계신것같은데?
먼저 내 예측은 철저하게 후대의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처칠은 결코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던 완고한 제국주의자였고, 일본 제국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하부 조직들이 서로 따로 노는 개판이었다.
육군과 해군이 따로 싸우고 육군의 일개 집단군인 관동군과 해군의 일개 함대인 연합함대가 총참모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타국과의 교전에 나서는건 개판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걸 모르는 이들에게 일본놈들은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론에 입각해 미국을 들이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면 서기장이 미쳤나 할 것이다.
세상에 그런 미친 놈이 어디 있냐고 하겠지. 있다는게 문제였지만...
소련은 아무튼 유물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였기에... 일본식 정신론을 들으면 다들 코웃음밖에 안 칠 것이고, 솔직히 나도 그렇긴 한데 쟤들이 그런걸 어쩌라고!
"토론하시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오, 베리야가 등판했다. 그는 요즈음 종종 보이는 심각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뭔가 알아온 것인가? 리하르트 조르게는 아직 우리 스파이로 일본에 잠입해 독일, 일본을 상대로 진짜 정보와 역정보를 아주 가지가지 뿌리고 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을 물어온 것처럼... 진주만 공습도..?
"서기장 동지께서 말씀하시는 일본의 대미 기습의 징조가 있다고 합니다. 나치 독일은 일본에 잠수함대의 영웅을 파견했다고 하며..."
????
잠수함?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대체 누가 간 거지?
"...연합함대의 전함, 항공모함, 잠수함 전력을 총동원하는 기습작전을 계획 중이라고 합니다. 시기는 아직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어..? 이거 성공은 하려나?
실제 역사의 진주만 공습은 항공기를 사용한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영국의 타란토 공습이 대성공을 거둔 것을 본 일본 수뇌부는 자기네들의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 태평양 함대를 타란토 공습을 따라 조져 버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은 타란토 공습이 대실패로 끝나버렸네..? 설마 그래서?
"잠수함... 잠수함이라니.."
그러나 우리 장성들은 상당히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항공모함의 작전적 가치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한 대공방어를 갖춘 타란토 항에 들이받다 꼴아박은 사례만은 남아있다. 그런 만큼 전함과 잠수함이 더 두려울 수 있다.
크릭스마리네는 결국 정통적인 수상함대 간의 결전을 통해 영국 지중해 함대를 몰락시켰고, 잠수함을 통해 브리튼 섬의 목을 죄었다.
이 드넓은 태평양에서 저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는 미국의 목을 잠수함으로 조일 수는 없겠지만... 만약 진주만으로 함대를 끌고 가서, 대놓고 함포를 쏘고 공습을 가하다가 태평양 함대의 군함들이 나오면 잠수함으로 어뢰를 쏜다?
이 정도면 남들이 듣기에 말이 되는 시나리오같았다. 물론 내 입장에선 그다지...
실제 역사에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철저한 쫄보라서 항공모함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주제에 자기는 후방에서 '쓸모없는', 안전한 전함에 타고 항모 전력은 막 쓰고 돌렸다.
과연 일본 놈들이 자기네 함대결전을 위해 아껴두려 했던 야마토를 그렇게 일선으로 내몰 수 있을까? 야마토급 전함에 대한 첩보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있다기보단 그냥 내가 알려준 것이지만. 미국에 전달되기도 했는데 저쪽이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대서양과 태평양은 근본적으로 다르네. 그 크기부터가 태평양이 훨씬 넓고, 일본은 잠수함을 활용할 수 있는 중간 기지가 부족하네. 독일인들은 보급 잠수함을 개발해 작전반경을 넓히는 것으로 대서양 전역을 커버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그것이 불가능해."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태평양에서 잠수함이 가지는 이점 역시 있었다. 너무 넓은 나머지 일일이 다 찾아다닐 수도 없고, 대서양은 중간에 섬이 거의 없지만 태평양은 징검다리처럼 섬이 있었다.
그 중 한두개만 장악해도 중간기지는 얼마든지 설치할 수 있었다. 일본의 수송 역량으로 그걸 감당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우리 문제에 집중하세나. 발칸의 정세는 어떠한가?"
"예, 국왕 미하이 1세는 본인의 친정을 선언하고 전선의 루마니아군에게 우리 측으로 투항할 것을 요청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포로로 잡아두었던 루마니아군 중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한 3만여명을 부쿠레슈티로 보내어 부대를 편성 중입니다."
아주 좋아. 이로서 추축군 완전 손실에 50만 추가. 전투력이 보잘것 없더라도 머릿수를 채워주던 루마니아군이 이쪽으로 아예 돌아선 것은 무게추를 뒤집을 수 있는 한방이나 다름없었다.
추축국의 방어 전면이 헝가리 남부 국경 전체로 늘어날 것이다. 또 하나의 추축국인 불가리아가 아래에 고립되는 것은 덤이고.
"불가리아의 보리스 3세는 아직 항복에까지 마음이 미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같은 슬라브인의 국가로서 대소 적대정책을 펴지 않았으며 나치 파시스트들의 협박에 의해 추축국에 들어가기는 했어도 참전하지 않는 것을 이해해 달라며.."
"그러나 우리는 불가리아가 필요하지. 터키를 공격하기 위해서. 나치 정권이 불가리아가 중립을 선언한다 한들 가만히 두겠는가? 독일의 침공 앞에서 우리의 지원이라도 받으려 한다면 소련과 동맹을 선언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지 않겠는가?"
몰로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리아까지 연합국 편을 들게 되면 추축국들은 기가 찰 것이다. 소련 침공까지 미루어가며 획득한 발칸 점령지들을 순식간에 상실해버리다니? 루마니아군 50만, 불가리아군 10만,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15만 군대가 추가적으로 손에 들어오는 것은 덤이었다.
이제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독일군은 발칸 촌구석탱이에 몇 명이나 되는 군대를 배치해야 할까?
"터키는... 어떤 반응인가? 하하하."
"민심이 끓어 넘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 모두 우리 측의 제안에 경악하고 있으며, 일부는 선전포고를 하고 카프카스를 넘어 진격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역 역시 터키의 정당한 영토라며..."
어휴. 아르메니아인 학살 해놓고도 아직 그런 태도가 나오나? 물론 우리가 요구한 것이 좀 많기는 했다. 쿠르드족을 위한 구역을 떼어서 독립국가로 만들고 합작 광물 개발 회사를 설립하는 것.
뭐, 광물 개발이라봐야 터키에 있는 광물자원 중 가치가 있는 것은 크롬 정도이니 터키에 있는 크롬을 독일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우리가 독점해버리겠다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오스만 제국 시절 가지고 있었던 석유가 나는 땅들은 아랍인들이나 이란인들이 싸그리 가져가버렸고 남은 것은 아나톨리아 반도뿐인데 여기까지 '외세'가 손을 뻗치겠다고 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스위치가 눌렸는지 터키인들은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했다.
"터키의 지도를 보면... 아나톨리아 북부의 해안선을 따라 평야지대가 분포해 있고 내륙은 상대적으로 낙후한 고산지대입니다. 주요 크롬 광산은 남부에 있는 저 하나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부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 군은 첫째, 불가리아 방향에서 기동해 이스탄불을 압박하고 둘째, 조지아 방향에서 북부 해안선을 따라 기동..."
크롬광산을 모조리 끊어버리지 못할 수는 있어도 일단 수급 자체를 어렵게 해버리는 것도 나름의 의의가 있었다.
"좋소! 작전은 장군들에게 맡겨 두지! 독일 놈들의 표정이 궁금해지는군! 하하하하하!!"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