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51화 (51/300)

# 51

51화

"저희 일본은 추축 동맹의 일원이지만 유럽의 전쟁과는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독일 제국의 군사적 확장 야욕은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사상한 미국인에 대해 통석의 염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추축동맹은 일원이 선제 공격을 받았을 경우 합동 선전포고를 하기로 약조하였으나, 이것은 독일의 미국에 대한 선제 개전이기에 저희 일본 외무성 및 정부는 일본이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의무가 없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주미 일본대사 노무라 키치사부로는 대독 선전포고를 한 이후 찾아온 미국 국무장관 헐 앞에서 지극히 저자세로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통석의 염... 은 대체 무슨 말인가?

통역사의 어물어물하는 번역을 들으며 헐은 고민했지만 아무튼 유감이라는 것 같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은 중국을 침략중인 일본제국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대한 석유와 철강 금수조치를 영국, 중국, 네덜란드와 함께 걸고 있었다. 이제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하기 앞서 태평양 방면을 정리해두기 위하여 일본 대사와 회담을 가졌고, 일본은 알고 있던 바와 달리 미국에 대해 그다지 적개심은 없는 것 같았다.

"대사의 유감 표명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워 극동아시아의 평화를 깨트리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추축동맹을 따라 미국과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면 추축동맹을 공식적으로 파기할 의사는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 방금 무슨 말씀이신지..."

키치사부로는 눈을 크게 떴다. 일본측 통역사는 천천히 다시 한번 번역한 것을 정확히 들려주었고, 대사의 요청에 의해 헐 국무장관은 미국의 제안을 다시 한번 전달했다.

추축동맹에서의 탈퇴, 만주국의 해체, 그리고 중화민국의 적법한 영토에 대한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점령을 그만둘 것.

감정을 잘 내보이지 않는 일본인들의 습성을, 국무장관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키치사부로 대사는 지금 꽤나... 흔들리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떨리고, 입술을 꽉 깨물며 굴욕을 참는. 그는 일본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일본이 사용하는 석유 중 8할은 미국에서 나왔다. 석유 금수 이후 네덜란드 본토가 추축 동맹국인 독일에 점령당한 틈을 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나는 석유를 노리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결사의 항전을 벌이는 장개석의 중화민국을 상대하는 것도 힘든데 머나먼 동남아까지 내려가 전쟁을 치른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본토가 침공당해 여유가 없고, 중화민국은 함대가 전무하다시피 하니 주축은 미군이 되겠지만 미 태평양 함대와 호주, 뉴질랜드까지 가서 전쟁을 치를 능력이 일본에게는 부재했다.

간단히 말하면? 꼬우면 어쩔 건데?

키치사부로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다시 차분하게,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홀짝 홀짝 들이킨 그는 일본 정부의 요구사항들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번엔 헐이 분노할 차례였다.

"필리핀에서 미국이 물러나라는 것은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곳은 우리 미군이 피를 흘려 점령한 동남아의 미국 영토이며, 우리 미국은 일본을 위해 단 한 치의 영토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알려드리고 싶군요. 키치사부로 대사."

대사의 표정은 차분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스스로 흥분한 것이 부끄러워진 헐은 다시 입을 닫았다. 하긴, 베팅을 하려면 저렇게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키치사부로가 던진 일본의 제안은 상식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중화민국에 대한 항복을 압박할 것, 필리핀의 포기, 석유 금수조치 해제와 '경제협력'-즉 일본에 대한 경제 지원-, 만주국에 대한 승인까지. 자기네들이 독일이라는 동맹국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린 것처럼, 미국 역시 중국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독일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위해 중화민국과 일본을 저울질하다가 일본을 선택하고 주중 고문단을 철수시켰기에 일본은 스스로가 훨씬 더 나은 선택지라고 자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중화민국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한 번 배신한 동맹을 두번은 배신하지 못할까?

일본 제국은 만주를 차지함으로서 2억에 달하는, 미국보다도 거대한 인구 규모를 가지게 되었다.

만주의 개발이 아직은 요원하기에 미국에 필적하는 생산량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한참 미래의 일이겠지만 만주국이 지금과 같은 경제발전을 거쳐 눈부시게 성장하고 중국 대륙마저 일본의 손 안에 들어간다면? 그때에 이르르면 일본은 난적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석유 금수조치만으로 일본을 틀어막을 수 있다. 당장 일본의 요구안도 사실은 석유와 철강 금수조치를 푸는 것이 제 1의 목적일 것이다. 헐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서양의 전쟁에서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석유를 그냥 내어 주고, 중화민국을 버린다면? 일본은 결국 중국 대륙을 다 집어삼키고, 만주를 개발하고, 자체적으로 석유 산지를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 가면 미국은 일본의 대외정책에 개입할 레버리지를 상실하고, 결국 미국 젊은이들의 피로써 개입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의 회담은 서로의 입장을 파악할 수 있다는 데서 유익했습니다만, 그다지 의미있는 결과를 내지는 못할 듯 합니다. 날씨가 날로 추워지는 데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키치사부로 대사."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긴 인삿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헐은 통역에게 손을 내저어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

대사와의 회담장을 나가며 그는 비서에게 지시했다. 일본 대사관에 대한 도/감청 등급을 한 단계 상향하라고. 정보국은 일본 대사관을 오가는 무선 전문의 내용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작금 대사의 태도로 보아서는 미국이 들어주기 어려운 타협안을 우선 내세운 후, 점차 협상할 것을 요구한 듯 싶었다.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들.'

태평양 함대에서 빼내온 세 척의 전함에게도 무슨 명령을 내려야 할 지 상부에 상신해야 했다. 일본의 위협을 상정하고 모항인 진주만으로 귀항할 것인가? 아니면 대서양에서 독일 제국과 추축 연합의 수상함대를 상대할 것인가?

지금 생각으로는 최대한 빨리 2선 전력인 항모들을 진주만에 집결시키는 것으로 일본을 상대하면서, 전함은 가급적 대서양에 유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국무성에서 수집한 정보만으로 본다면 일본은 ‘당장은’ 개전의사가 없어 보였다.

항모 일곱 척 중 셋은 원래 태평양 함대 소속이었으니, 빼내온 전함 세 척을 대신하기 위해 항모 셋을 진주만으로 보내면 되는 건가? 애지중지하던 전함을 저 멀리 보내버린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달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항모 모두를 내 주어도 모자랄 것 같았다.

헐을 내보낸 주미대사 키치사부로는 본국에서 비밀리에 배송된 암호화된 인편을 다시 한번 펴 보았다. 암호문이 전달될 경우 최대한 빨리 미국의 외무장관에게 이 문서를 전달할 것. 총 14개 장으로 된 전문은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본국에서 극비리에 알려온 바, 연합함대와 독일의 소수 잠수함 에이스들까지 참여하는 미 태평양 함대에 대한 전격적 기습이 준비되고 있었다.

미국의 주력함들이 진주만에 모이는 시점을 노려 그들의 주력을 격멸한다면..? 태평양이 황군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 기습시점은 아직 명확히 정해진 바가 없으나, 기습 직전 선전포고를 전달하여 기습을 정당화하여야 했다.

추축동맹에 대한 의무의 해석이 바뀌었다고 입을 싹 씻으면 그만. 키치사부로는 그런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 역시 전쟁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기만 또한 하나의 전술이었다. 미국이 자원과 동맹국들을 끌여들여 황군의 신성한 전쟁을 방해한다면 일본제국은 반격할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석유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한 번의 기동으로 저들을 파멸시키는 기습은 필수적인 법. ‘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이 승리로서 세계 위에 군림할 일본 제국이 초기에 '자그마한' 술수를 썼다 한들 그 누가 비난할 것인가?

"본국에서 오는 전문을 위해 우리 대사관 직원들은 요 며칠간은 당직을 해야겠군."

키치사부로는 그렇게 서기관에게 명령했다. 저들이 당직을 서는 태도를 보고 뭔가를 의심할 수는 있겠지만 기습 선전포고일줄은 모를 것이다. 독일이 이렇게까지 협조하는 이상 이쪽 역시 성의를 보여야겠지.

조지프 케네디는 마치 종말과 패망을 예언하는 예언자인 것 같았다. 그는 영국의 전쟁 수행에 대해 비난으로 일관했다.

그의 말 속에서 처칠은 식민지에 환장한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자였으며-사실 그건 루즈벨트로서도 부인할 수 없었다-영국 정부의 머저리들은 독일의 교섭을 완고히 거부하며 자신들의 무덤을 스스로 판 것이었다.

전 부통령 존 낸스 가너 역시 전 주영대사 조지프 케네디의 그런 주장에 대해 맞장구쳤다.

"미국은 영국의 전쟁에 개입할 필요도 없었고, 사실 지금의 선제공격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대해서는 반박하고 싶소, 부통령. 옆집에 불이 났을 때, 호스를 빌려주지 않는다면 그 불은 우리 집으로 옮겨붙게 마련이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게 그 불을 끄기 위한 지원 아니었소? 그걸 실패했기에 우리 집에 불똥이 튄 것이고!"

"으음.. 불씨를 달고 왔다고 하고 싶습니다만."

루즈벨트는 항상 그가 해왔던 비유를 다시 꺼내왔지만, 여전히 국무위원들은 회의적이었다.

불씨를 달고 왔다, 저 말이 맞군. 하하하. 몇몇은 대통령의 말을 비웃다시피 했다. 호스를 빌려주는게 아니라 껌을 빌려주는 것 같아서, 절대로 그 껌을 돌려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던 공화당 상원의원 로버트 태프트의 반론에 이어 또 하나가 나왔다.

"저들의 선제 공격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소? 육군의 규모 확장에 대한 건은.."

"예, 장관님. 현재 영국, 소련과 합의 하에 지상전역에 대한 미군 파견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소련전선의 경우 아군의 지상군을 파견 이후 자체적인 보급을 유지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영국의 경우... 독일군의 상륙으로 인하여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어물쩍대던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루즈벨트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마셜은 풍성해진 콧수염을 종종 매만지며 군의 급격한 규모 확대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알려왔고, 국무위원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있는 꼬라지를 보자니 그는 가슴이 답답해 왔다.

미국이 대서양 저편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져버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영국과 포르투칼마저 추축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나면 우리는 누구와 함께 유럽 대륙으로 갈 것인가?

중립 비슷한 것을 지키는 포르투칼에 상륙해서 스페인을 지나 피레네를 넘어 비시 프랑스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아르덴과 라인 강을 지나 독일로 가서 베를린을 점령할 것인가?

‘빌어먹을, 더럽게도 멀군.’

대부분은 대체 왜 유럽에 개입하냐부터 묻겠지만 아무튼. 미국이 유럽 대륙에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는 수단은 이미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 가능성의 상실은 미국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루즈벨트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역시 섬이 되어버릴 수 있다.

"우리가 전쟁을 그렇게 대비해야 한다면, 소련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것은 어떻소이까?"

"장관님, 그것은 절대적으로 아니될 일입니다."

마셜은 소련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함을 역설했다. 군인이자 관료로서 그는 사실을 다룰 뿐, 정치적인 의견을 내는 것은 극히 드물었지만 지금은 그가 말하는 것이 루즈벨트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인지 자기 의견을 내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소련에 대한 지원을 끊을 경우, 소련인들은 더 많이 죽고 덜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덜 죽은만큼이 대서양으로 오게 될 것이다.

"물자는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지만 미국인 청년들은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극히 정론이었지만, 그 대상이 소련이었기에 몇몇은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셜의 성향을 의심하는 눈초리와 함께 육군의 차례가 끝나고 해군의 차례가 오자 해군은 기존의 계획에서 변화를 허가할 것을 요청했다.

파나마 운하가 없어진 이상 파나맥스 규격-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군함의 너비 제한-을 당분간 고려할 필요가 없다. 태평양은 일단 뒤로 미루어 놓고, 어차피 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에 대부분의 생산시설이 집중되어 있기에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신형 전함인 몬태나급을 추가로 취역시키자!

"기존의 2대양 해군법에서는 파나맥스 규격을 벗어난 신형 전함, 만재배수량 7만 톤급의 몬태나급 5척을 건조할 것을 의회로부터 허가받았습니다. 그러나... 크릭스마리네의 전함 함대보다 아직 숫적으로 불리하고 이로 인해 통상 파괴전에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몬태나급 전함 계획을 확대하여야 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2대양 해군법은 에식스급 항모 8척, 아이오와급 전함 2척, 몬태나급 전함 5척과 대형순양함 6척 및 다수의 군함, 항공기 생산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중, 몬태나급 전함 5척의 제한을 더 늘려달라는 것이었다.

"몇 척... 아니, 그건 해군에 묻기보단 재무성에 물어봐야겠군. 대서양 함대에만 5척을 모조리 배치할 수는 없고 태평양에도 최소한을 할당해주어야 할텐데, 7만 톤급 전함 최소 두 척을 더? 으음... 당장 항공모함을 다섯 척이나 건조 중인데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겠는가?"

해군 장성은 그저 굽실거릴 뿐이었다. 이 기회를 들어 대서양 함대가 규모를 막대하게 확장할 수 있으니, 어떻게든 이 사업을 따내야 했다.

특히 그의 입장에서 밥맛없는 해군 항공대의 조종사 도련님들이 설치는 항모보다는 정통파 수상함대 장교들이 보직을 얻고 출세할 수 있는 전함이 훨씬 중요했다. 항모? 그거 영국이 굴리다가 다 전함들과의 해전에서 골로 간 것 아닌가. 타란토의 대참사에도 기여한.

차라리 육상 발진하는 중폭격기들이 대승에 기여한 지브롤터를 보면 육군 항공대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나아보였다.

막대한 예산이 주물럭거려지는 가운데 마셜은 어쩐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몰로토프는 그렇게 말했다. 일본은 반드시 대미 개전을 할 것이라고. 그것도 올해 중에! 마셜은 몰로토프의 주장을 꽤 신뢰했다. 독일이 어찌 할 것인지 첩보조직의 미비함으로 기습공격을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일본의 이 침묵이 그는 두려웠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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