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화
영국 공군은 마지막 저항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덩케르크에서 모조리 파괴당한 육군,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패배 끝에 주력함들을 모두 바닷속에 쳐박아 버린 해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 피해는 덜하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영국 공군 역시 지난해부터 누적된 피해로 몰락 직전에 몰려있었다.
시발점은 프랑스 전역이었다. 대지공격기의 지원 하에 초고속으로 진격하는 나치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처칠은 영국이 가지고 있었던 최신형 전투기들을 프랑스에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6주만에 항복했고, 최신형 전투기에 타고 있었으나 다수의 신참 조종사 역시 포함되어 있었던 영국원정군의 공군 병력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실 여기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프랑스의 졸전에 경악하며, 전투기 사령관 휴 다우딩 대장은 최신형 전투기를 아껴둘 것을 주장했지만 처칠은 끝끝내 본인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6주 만에 프랑스가 항복한 것을 두고서도 처칠은 애써 영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5주, 혹은 4주나 그 이하가 되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처칠이 잘못한 게 아니라도 사라진 비행기와 파일럿들, 병사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모두들 침묵했지만.
고립된 영국 육군을 살리기 위해서 치뤄진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도 영국 공군은 다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 다우딩 대장은 아예 반대하지도 못했다. 영국 육군의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와중에, 공군을 보전하겠다고 반대하는 것은 공군의 이기주의로 몰릴수도 있었다.
체념한 채 투입한 전투기들은 또다시 피해를 입고, 영불해협에 수장되어 버렸다. 육군 병사들과 함께.
다우딩 대장은 사임했고, 공군은 점점 몰락했다. 타란토에서, 몰타 항공전에서, 아프리카 전선에서. 전쟁 발발 이전보다 생산성은 늘어났으나 피해는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에이스 조종사들은 숫적으로 압도당한 채 싸워야 했고, 신참 조종사들은 에이스로 거듭날 기회도 없이 죽어나갔다.
지금에 와서는 영국군 조종사들의 평균 격추수는 대략 3대 수준이었다. 수십 대를 격추하고도 살아남은 극소수의 에이스 조종사와, 단 한대도 격추해본 적 없는-아예 실전 자체가 처음이거나-풋내기들 절대 다수.
물론 감투정신만은 살아 있었다. 거의 1천 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본토를 밟은 외국의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에이스들이건 풋내기들이건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위스키 탱고, 빌어먹을... 홀튼 소위!"
목숨을 건다 하여도 독일군의 베테랑들이 만만하게 격추당하지는 않았다. 편대장 터크 소령은 지금까지 스물아홉 기를 격추한 최고의 에이스 중 하나였지만, 지금의 공중전에서는 간신히 한 대를 격추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 서른 대. 그리고 윙맨은... 격추? 전사? 알 수 없었다. 홀튼 소위는 극히 부족해지는 조종사 수로 인해 바로 2주 전 임관하여 조종간을 잡게 된, 아직 피도 안 마른 풋내기였다.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는 건 용감한 놈들이지. 비겁한 놈들이나 살아나는 거고. 터크 소령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겁이 많았다. 위에서 손에 꼽힐 만큼 많은 격추 수를 자랑하는 에이스였기에 종종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받았고, 사인 요청이나 팬레터도 받아 보았지만 그는 그 어느 것에도 응하지 않았다.
가장 용맹한 전우들은 이미 영불해협에서, 조국의 하늘 위에서, 아니면 아프리카의 사막이나 지중해의 푸른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가장 비겁하게 싸우는 자만이 아직 살아남았다.
"브라보 편대! 브라보 편... 흐어어어억... 치직"
"뭐야! 무슨 일이야!"
제기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델타 편대장 블라이스 대위의 다급한 구원 요청이 무전기에서 터져나왔다가, 바람빠지는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결국 멎어 버렸다. 또 하나 전사.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는 지 알아?’
그의 포커 친구인 한 군의관은 농담처럼 그렇게 이야기했다. 사실 칼에 맞는 것이나, 총에 맞는 것이나, 구멍나는 데는 큰 차이가 없어.
포커 패가 좋지 않게 나오면 항상 그 친구는 온갖 흉흉한 부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베팅에서 관심을 떼게 하려고 하곤 했다. 구멍이 나면 흉곽 내의 압력과 대기압이 같아지기 때문에 공기의 알짜 흐름이 일어날 수 없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뭇자 그 친구는 낄낄 웃었다.
야! 그럼 소리가 어떻게 나겠어! 끽 소리도 못 해보고 죽는단 말이지.
흉강 내의 기관, 식도, 대동맥과 그 분지들... 알아듣기도 어려운 해부학적 용어들을 늘어놓으며 그는 어떻게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지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나도 그렇게 죽는 건가?
"여기는 사령부! 탈출이 가능한 조종사들은 탈출하라!"
이번엔 사령부였다. 대체 지상엔 무슨 상황인가, 비행장 근처까지 육군이 접근한 건가? 포성이 무전기에서 들리는지, 아니면 지상에서 들리는 것인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치라는 것은 알아들었다.
제기랄. 시가가 있으면 시가 한 대만 피우고 싶은데. 또 비겁하게 도망쳐 하루의 삶을 더 살아가라고?
그는 지금까지 늘 살아남아 치욕을 곱씹고 사는 쪽을 선택했다. 무전기에서는 사령부의 간곡한 호소문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하다. 항전을 위해, 지금 무익한 죽음을 선택하지 말고 탈출하여 비상 집결지, 케임브리지로 향하라!
평소의 사령부 통신장교의 목소리에서 누군가 더 나이든 듯한 목소리로 바뀌어 비슷 내용의 무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군들, 나는 공군 소장... 일세... 전세가···]
무전기에 잡음이 섞여 도저히 알아들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쯤 터크 소령은 알 수 있었다. 전장에서 대부분의 아군기가 사라졌다.
방금 또 한 기 격추. 누구의 비행기지? 시커면 연기를 뿜고 활활 불길에 타오르며 전투기는 지상을 향해 급속도로 사라졌다. 낙하산 탈출에도 실패했을 것이다. 했더라도..? 지상은 지금쯤 나치 놈들이 장악했을 것이다.
더 이상의 항전에 의미가 있나? 내가 죽는다고 해도, 비겁자가 아니게 될까? 죽음으로 도망쳐 버린... 비겁자.
그는 자신이 비겁자임을 잘 알았다.
"여기는 브라보 편대, 브라보 편대. 편대장기 알린다."
사령부는 아마 포격이나 공습 때문에 무전을 날리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닐 것이다. 남은 조종사들은 어차피 소수. 그는 어쩐지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탈출하라, 하나씩 탈출하라. 내가 후방을 엄호하겠다. 반복한다. 탈출하라, 탈출하라. 내가 후방을 엄호한다"
"빌 터크!"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무전으로 불렀다. 터크 소령은 무전기의 부름을 코웃음쳐 넘겼다. 야, 싸움은 니들이 하라고.
나는... 도망칠거야. 빌어먹을 놈들아, 난 도망친다고! 하하하하!!
독일 놈들의 전투기는 꽤나 물건이었다. 그가 타고 있는 스핏파이어 전투기보다 이런 중저고도에서는 전혀 뒤떨어지는 게 없었다.
스핏파이어가 우위에 있는 건 끽해야... 선회전?
도그파이팅에서는 그는 영국 공군의 에이스에 걸맞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비등한 성능의 기체로도 얼마든지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군이 너무 많았다.
적의 편대는 윙맨의 엄호 하에 급속도로 접근해서 치고 빠지는, 일격이탈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까짓 거, 개싸움을 걸어 격추시켜 버리겠지만 지금 그러다가는 압도적인 수의 적에게 걸려 역으로 당할 뿐. 한 명씩, 한 명씩, 전투기들이 도망쳤다.
독일 전투기들은 항속거리 자체도 불리했고, 애초에 홈그라운드가 아닌 원정 전투였기에 도망치는 전투기들까지 추격하지는 않았다. 그래, 버텨 보자.
터크 소령은 수시로 캐노피 뚜껑을 여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퍼붓는 기관총탄을 휙 뒤집는 플립 기동으로 피하고, 고도를 콱 높였다가 따라오려는 기체들을 속도를 조절해 태양의 방향에서 접근해 시야를 제한했다.
그 이후... 탈출. 탈출해야지. 비겁자가 되려는 머리와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가슴이 계속 싸우고 있었다. 이제 하늘에 남아 있는 아군기는 자기를 제외하면 한 대. 그 한 대의 탈출을 막기 위해 여섯 대의 독일 전투기들이 달라붙었다.
탈출이냐, 죽음이냐. 둘이 그닥 다르지 않지만.
일격 이탈, 아군기의 꼬리를 잡으려던 적 전투기의 왼쪽 날개에 기관총탄 몇 발을 먹여주자 적 전투기는 싸움을 포기하고 바다 건너 저편을 향하기 시작했다.
아군기를 향한 무전에다 고함을 쳐도 답은 없었다.
"나... 나도 탈출할거야! 탈출해! 뒈지기 전에!"
"...."
수용소냐, 포크스톤(국립묘지)이냐!
불길한 소문들은 타오르는 전쟁의 불길마저도 넘어 바다를 건너왔다. 독일 놈들이 운영하는 포로수용소들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병영에서 넘실대며 돌아다녔다.
6주만에 항복한 프랑스군 포로들은 다 동유럽의 어디론가 끌려가서 학살당했다더라, 해군들만이 참전을 약속하고 살아남았다. 영국인 파일럿들이 대륙 유럽의 어딘가에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면, 그들을 찾는 독일군 수색조가 어떻게든 쫓아가 꼭 사살한다더라.
프랑스인 망명 조종사들은 이런 소문에 치를 떨었다. 그들은 독일이 동포들을 유린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결사의 의지로 독일군과 싸웠다. 저 조종사도 프랑스인인가?
프랑스는 우리의 지원까지 받아놓고 단 6주 만에 항복했다고 몇몇 사려깊지 못한 자들은 뒤에서 그들에게 비난을 날렸다. 터크 소령은 6주를 놓고 만들어지는 갖가지 블랙 유머들에 종종 낄낄대기는 했지만 비난하는 이들의 사려깊지 못함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래에서 폭음이 들렸다. 하. 이젠 진짜 안돼. 슬슬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던 그에게 캐노피를 뚫고 기관총탄이 쏟아져 들어왔다.
총탄과 유리의 파편이 그의 몸을 사납게 햘퀴고, 순식간에 눈 앞이 흐려졌다.
‘잘 있으라고, 친구들. 다시 만나는 날에는... 아니, 나중에 오라고.’
영불해협의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마지막 영국 전투기가 사라지며, 공중전이 끝났다. 독일인들은 이제 브리튼 섬 안으로 냉엄한 진군을 시작했다.
한때 오대양을 벌벌 떨게 만들던 영국 함대는 감히 하나된 추축국의 조직된 힘에 항거할 수 없었다. 해상 보급로를 끊으려는 영국 함대의 시도는 제공권의 처절한 열세로 좌절되었다.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 나는 절대로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대영 제국을 위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최선을 다해 싸웁시다!!]
"미국은? 소련은? 제기랄..."
처칠은 라디오 연설을 마치고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미국과 소련의 동태에 대해 물으려 했다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서부전선으로 독일이 가진 전력을 최대한으로 투사한 만큼 동부전선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150대의 잠수함을 건조하느라 천 대는 되는 전차들을 포기해야 했던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밀리고 있기는 했다.
물론 '동맹국' 소련이 독일을 꺾고 영국까지 오기 전에 모든 일은 끝나 있겠지만. 동부전선에서 허우적대는 독일군의 일부마저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영국 육군은 박살나 있었다. 홈가드들에게 무기를 들려주고 싸우라 내몰려 해도 숙련된 전쟁기계들 앞에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대영제국의 몰락은 코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