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화
수싸움은 지금부터다. 독일은 서부의 위협인 영국을 먼저 제거하고 동부에 전력을 다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주코프와 키르포노스에게 알리게. ‘이간질’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루마니아 병력은 독일 남부집단군의 전 전선에 걸쳐 사단, 여단 단위로 분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쿠레슈티의 쿠데타 소식에 지극히 당황한 듯 했다.
독재자 안토네스쿠는 혁명군에 의해 체포되어 어딘가에 유폐되었고, 무려 4개 사단이나 되는 병력이 국왕 충성파 수도에 웅거하고 그들의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결코 가만히 좌시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독일군이 흔들리는 순간에 총공세를 가해 저들을 패퇴시켜야 하네!’
"예! 서기장 동지!"
독일을 자원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대전략은 여전히 가동중이었다. 군수 생산에는 수많은 자원들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걸 하나하나 끊어가며 독일의 숨통을 죄어들고자 했다.
먼저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 추축국의 석유 생산 중 1/3을 담당하던 플로에슈티 유전은 이제 우리 손에 들어올락 말락 하고 있었다. 플로에슈티를 뺏긴 이상 독일이 가솔린을 새로 생산할 방법은 헝가리에 있는 군소 유전들에서 캐먹거나, 아니면 액화 석탄을 이용하는 것뿐.
어느쪽이나 그닥 효율이 높은 방법은 아니었다.
"플로에슈티는 불타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승리 미사일 수백 발을 떨어트려 정유시설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좋네. 미하이 국왕이 불만을 가진다면 배상을 약속하여 구슬리도록 하게."
독일이 다시 루마니아로 밀고 오더라도 점령할 수 없도록 정유시설과 유전에 아예 폭격을 떨어트렸다. 어차피 카프카스에 한가득 미제 정유시설들을 박아 둔 이상 우리가 기름이 부족하지는 않을테니.
이 시대 세계 최대의 석유 산지인 바쿠를 손에 쥐고 있는데 그까짓 플로에슈티 유전이 부러울까?
그 다음은 발칸 반도의 나머지 국가들이었다.
"유고 파르티잔들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던 터라 그 누구의 도움도 좋다는 입장입니다."
"불가리아는 같은 슬라브 민족 간의 동족상잔만큼은 피하고 싶다며, 항복 의사를 비밀리에 타진했습니다. 특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소련을 침공하기 전 발칸을 자기 손에 넣기 위해 외교와 무력을 동시에 사용했다. 먼저 헝가리와 루마니아, 유고, 불가리아 왕국을 협박하여 추축 동맹에 가입시켰다. 알바니아와 그리스는 군홧발로 짓밟았고, 유고에서 일어난 반추축 쿠데타 역시 총칼로 진압해 발칸을 아예 평정한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라고 소련과의 전쟁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땅 욕심에 불타는 안토네스쿠의 루마니아와, 호르티의 헝가리를 빼고는 참여하는둥 마는둥 미적대는 수준이었다.
불가리아에 이르면 아예 단 한명의 병력도 파견하지 않고 버팅겼고. 이제 루마니아가 친소파의 손에 들어온 이상 발칸에서는 도미노 현상이 슬슬 일어나고 있었다.
"루마니아를 석권한 이후에는 유고 파르티잔들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해 주어야 하네. 발칸에서 저들이 붙들고 있는 독일군이···"
"30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서기장 동지."
티토 영도하의 유고 파르티잔들은 ‘파르티잔’ 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전차와 전투기를 굴리고 독일군과 정면 승부를 벌여볼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드리아 해에 연한 산악지대에서 주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해방구를 만들고 버티는 파르티잔들을 제어하기 위해 독일군은 1개 야전군에 이르는 거대 병력을 ‘후방’ 인 발칸에 박아 두어야 했다.
"그래. 발칸에 발 붙이고 있는 독일군이 한명 더 많아질수록, 우리 어머니 대지를 능욕하는 독일군이 한 명 줄어드는 것이지. 파르티잔들의 투쟁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 주도록 하게. 다음은.."
지도 위에는 각 국가들이 붉은색, 검은색,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검정색은 독일과 그 동맹국들, 붉은색은 우리의 아군들, 회색은 중립국들
루마니아가 붉은색으로 뒤집힘에 따라 소련은 고립을 해소했지만, 여전히 유럽 전선을 그리는 지도는 온통 거무죽죽한 회색 아니면 검정색이었다.
"돌아설 지도 모르는 중립국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인데···"
"...터키의 이뇌뉘는... 터키의 내부 여론은 친독으로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연합국에 협력한다 해도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막힌 이상, 터키가 생존하려면 추축의 협력이 있어야.."
쾅! 내가 탁상을 내리치자 모두들 움찔 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독일은 결국 영국 지중해 함대를 몰락시키고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 추축국의 내해로 만들어버렸다. 비록 수에즈 운하만을 함락시키고, 이라크에 주둔하는 영국군까지 축출하지는 못한 채 브리튼 섬 공방전을 위해 뱃머리를 돌렸지만 지중해는 저들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추축의 손에 들어온 지중해와 전통적으로 접경한 적인 소련 사이에서 터키는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승천하는 기세로 전 유럽을 석권하는 독일이냐? 아니면 그 독일의 침공마저 꿋꿋하게 막아낸 오랜 적 소련이냐?
실제 역사에서도 터키는 끝까지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독일의 패망이 결정난 후에야 연합 측으로 생색내기 식 참전을 했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대책이네! 대책! 터키를 어떻게 묶어둘 수 있겠는가!"
"터키를... 침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샤포슈니코프가 쿨럭거리다가 나직하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터키 침공?
"현재 영국 상륙을 엄호하기 위해 추축 함대가 다 대서양에 있는 이상... 흑해 함대가 추축 지중해 함대에 비해 못할 것은 없습니다. 터키를 적대한다 쳐도 저들의 빈약한 군대로는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올 수 없습니다.
석유 산지인 바쿠에 주둔군 1개 군단만 있어도, 터키군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루마니아 방면에서 불가리아를 압박하고 그리스의 사회주의자들과 연대를..."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그 과실이 상당히 컸다.
터키는 군수물자 생산에 필수적인 광물인 크롬의 산지였다. 독일이 대전기 중 크롬을 구할 수 있던 유일한 통로가 바로 터키였고. 크롬이 없다면 군수물자의 질이 수직 하락할 수 밖에 없는 바, 터키를 침공해 독일의 수입 판로를 끊어버리는 것 역시 괜찮은 작전이었다.
독일이 동부전선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면 우리도 다른데 눈을 돌릴 여지가 없었겠지만, 영국으로 정예병력과 공군이 다수 차출된 바 오만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베리야!"
"명령만 내리십시오, 서기장 동지."
"터키의 정세에 대한 것은 되었고, 터키군에 대한 첩보를 최대한 빨리 수집하게. 마찬가지로.. 이란군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베리야는 다시 돌아온 명랑하고 메스꺼운 미소로 응답했다. 엔카베데 요원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속살거리는 베리야를 내버려 두고 나는 이제 몰로토프를 바라보았다.
"몰로토프."
"예, 서기장 동지!"
"군사 정보의 수집이 들키지 않게 하면서도.. 터키와 이란을 상대로 한 외교 교섭을 시행하시오. 단!"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모두들 날 주목했다. ‘소련의 부드러운 아랫배’인 카프카스 방면에 위치한 터키와 이란에 대해서 뭔가를 해야 하기는 했다. 다만 둘 다 밟아버리기에는 무리가 있을 뿐.
실제 역사의 이란 침공에서 소련군은 41년의 3개 야전군만을 동원하고도 이란을 밟아버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40년에 소총이 없다고 15만 정을 영국에 지원해달라고 한 터키 역시 비슷한 규모 정도로 갈아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둘 다를 건드렸다가 신속하게 개입한 추축국의 원정군이 개입해버려서 전선이 지지부진하게 끌려 버리는거지.
그래서 하나만 골라야 했다. 골라야 한다면...
"터키에게는 얼마든지 완고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해도 되오. 최악의 상황이 된다면 보스포러스 해협과 이스탄불을 기뢰로 봉쇄해버리고, 흑해의 문을 닫아버린 후 카프카스 산맥을 끼고 지연전을 펼치면 되니 터키는 전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협상하시오."
"예! 서기장 동지."
이미 완충지대는 형성되었다. 루마니아와 유고 파르티잔이 육로 수송을 가로막고 있는 이상 독일 육군이 터키로 걸어들어올 수는 없다. 독일의 보급 역량은 제한되어 있다. 트럭도 수송선도 비행기도 다 미국처럼 넘쳐나지는 않는다.
당장 영국에서 작전중이기에 유럽대륙을 빙 돌아 다시 터키와 발칸으로 오려면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다. 이 공백기를 이용해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터키와 이란까지, 모조리 손에 넣는 것이다.
"반대로 이란과의 협상에서는 저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줄 것처럼 태도를 취하시오. 말로는 무엇을 들어줘도 좋소. 단지, 당장 넘기지만 않고 차일피일 시간을 끌어 보시오. 터키가 정리된 이후에는 바로 방향을 틀어 이란을 협박하면 되니."
이란은 전통적으로 영국과 러시아-소련의 압박에 시달려 왔다. 19세기의 그레이트 게임에서부터 이 두 열강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위해 이 지역을 침공했고, 민중의 여론은 친독으로 쏠릴 수 밖에 없다.
실제로는 41년에 영소의 이란 침공을 통해 레자 샤를 몰아내고 어린 팔레비를 괴뢰로 세우지만... 지금은 영국이 너무 쳐 발리는 바람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물밑으로는 모하메드 모사데그를 중심으로 한 이란 민족-사회주의자들과 협상하도록 하시오. 장기적 목표는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고 우리 편인 이들이 정권을 잡는 것이지만 일단은 샤가 독일로 넘어가지만 못하도록 하시오. 저쪽 지역에 너무 오래 끼어들어봐야.. 주 전선에서 손해만 볼 뿐이오."
여기서도 자원 민족주의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저 탐욕스러운 독일의 행태를 보라! 이란과 중동 지역에 바라는 것이 석유밖에 더 있겠는가? 여기서 소련이 몰락한다면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란은 이제 영국인이 아닌 독일인이라는 새로운 굴레를 뒤집어쓸 뿐.
그러나 친소적 중립-최소한 페르시아 만의 렌드리스를 열어주는 정도-을 유지한다면 이란은 두 열강의 사이에서 나름의 레버리지를 발휘할 수 있다. 바로 자원으로.
실제 역사의 51년. 모사데그는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는 쿠데타로 총리에서 사임하게 되고 결국 이때부터 외세의 간섭에 놀아나게 된 이란인들의 분노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반대로 소련은 이란의 대지가 품은 그 풍요로운 자원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도 석유는 충분히 있는데 왜?
대신 비밀리에 협력을 제의할 뿐이다. 언젠가 함께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해 보자고.
독일군이 피흘려 얻어낼 것을 우리는 저들이 여기 없는 공백기를 틈타 총칼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해결하고 있었다. 독일은 외교에서 너무 많은 실책을 저질렀고, 군사력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설치고 다녔다.
사실 우리라고 그다지 다를 것은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독일에 비하면 그랬다.
"다들 나가 보게. 베리야, 자네만 남고."
"예!"
사람들이 나가고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베리야는 그 동그란 눈에 메스꺼운 호기심을 띄우고 있었다.
"서기장 동지,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카틴. 카틴 숲 말일세···"
죄악의 대가를 받을 차례가 왔다. 소련도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수많은 역겨운 학살들을 저질러 왔고,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카틴 숲이었다.
사이좋게 불가침 협정을 맺은 소련과 독일은 공통의 적국이던 폴란드를 공격했다. 폴란드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분할하고, 포로로 잡은 장교들을 끌고 간 소련은 그들을 가둬 두던 수용소에서 끌어내 학살했다.
얼마 전 독일이 점령한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는 그 죄의 ‘증거’들이 남아 있었다. 국제 사회에서 소련의 신뢰도를 독일만큼 날려버릴 것들.
"아? 서기장 동지께서 그런 사소한 일들까지 신경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모두 잘 ‘처리’ 되었습니다. 하하하하하!"
베리야는 웃음을 터트렸다. ‘처리’?
다 죽였다는 소린가?
"NKVD를 시켜 매장지에서 백골이 된 폴란드인 시체들을 파헤쳐 꺼냈습니다. 스몰렌스크 근처에서 대치가 지속되는 동안 처리했죠. 그리고 그 파낸 구덩이에다가는 적아를 가리지 않고 사망자를 매장해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
나 잘했죠? 라는 표정으로 보는 베리야를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잘 보이기 위해 저런 짓을 저지른 나까지도.
죄는 밝혀져 징벌을 받아야 했다. 나치가 그랬고, 일제가 그랬고, 식민제국들과 소련이 그랬고 앞으로도 수많은 국가들이 그럴 것처럼.
하지만 이렇게 숨기고 나면... 과연 우리는 마땅한 벌을 받을 수 있을까?
나가 보라는 나직한 말에 흐흐 웃으며 방을 나서는 베리야의 뒷모습. 나는 내가 싫어졌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