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화
젊은이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서른 명 가량 모인 이들은 모두들 각자가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는 강철같은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국의 미래가 우리가 내놓는 결과물에 달려 있다! 경각에 달린 국운을 어찌 해야 할까?
총력전 연구소라고 이름붙인 조직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하여도, 이들은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반년간의 학습과 토론을 통하여 이들은 어느새 전쟁과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충신들이 되어 있었다.
작금의 상황은 일본 제국에게 지극히 곤란한 상황이라 할 수 밖에 없었다. 쉽게 끝날 것 같던 지나의 전쟁은 끝을 보일 줄 몰랐다.
건드리기만 해도 군벌들 간의 내전으로 폭삭 무너질 것 같았던 국민당 정권의 장개석 총통은 끝없는 항전을 선언하며 수도를 옮겨 도망다니면서도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다. 화북을 석권하고 남경을 초토화시켜도, 상해를 점령하고 무한을 정벌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밀어붙여도 저들은 끝없는 저항을 선언했다.
일본의 무적황군은 전투에서 패배를 몰랐으나, 전쟁을 이기고 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공산 비적들은 섬서에서 자기네들의 해방구를 구축하고 황군을 산발적인 게릴라 전술로 괴롭혔다. 그 옛날 몽고군의 말발굽마저 막아선 장사, 장강 중류의 방어선은 역방향으로 일본의 진출 역시 막아서고 있었다.
일백만 황군은 지나대륙에서 끝없는 사람의 바다 속에 던져진 조약돌 같은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와중, 미국-영국-화란-호주로 이루어진 4개국은 일본을 압박하고 중화민국을 돕기 위해 석유 금수조치를 시행했다.
황군의 물자보급은 점점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함대를 굴릴 연료의 재고는 얼마 안에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연합함대는 출격조차 해 보지 못하고 항구에서 말라죽어갈 뿐. 옥과 같이 한 몸 바쳐 외세를 물리치고 부스러져 가지는 못할지언정 이같은 결말이라니?
"미국과의 전쟁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과의 결전을 위해 전력을 동원하려 모으려 할 수 있어도 그것을 움직일 석유가 없는 한 우리는 비참하게 고사할 뿐입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황군의 발목에 찬 족쇄를 풀기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합니다."
"동의합니다만, 우리가 남방을 침공하여 원유의 산지를 얻는다 하여도 물자를 수송할 역량이 지극히 부족합니다. 현재 아군 함대는 철저히 일회의 결전을 위한 준비에 골몰하는데, 이로 인하여 수송함대에 대한 통상 파괴를 영미의 함대가 시도할 경우... 밑에 구멍이 뚫린 양동이로 물을 옮겨 나르는 꼴이 될 것입니다."
모두들 다시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현장 견학과 각자 가져오는 자료를 둔 토론을 통해 이들은 일본 제국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직시할 수 있었다.
현대의 전쟁은 국가와 국가가 모든 산업적, 인적 역량을 쏟아부어 '총력전' 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국력은 군벌로 갈가리 찢겨 있는 중국조차 제압하지 못하고 헉헉대는 와중에 미국은 실로 막대한 생산력과 국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중 몇은 귀한 미국 방문의 기회를 얻어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한결같이 입을 모아 미국의 거대함을 칭송했다. 미국은 실로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거대한 공장에서 무수히 많은 물건들을 뿜어내는 곳이었다.
일본제철의 사원 출신인 한 연구원은 그렇게 설명했다. 디트로이트라는 일개 도시의 제강공장 하나가, 전 일본의 연간 제철량만큼의 강철을 생산한다고.
철, 양질의 철이 부족해 가마솥과 숟가락을 박박 긁어 모아 총포를 만들기 위해 고로에 털어넣어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 철은 황군의 전차를 짓밟을 미군의 탱크가 되고 황군의 함대를 침몰시키는 전함과 비행기가 되고 황군의 건아를 쏴 죽이는 적의 총포탄이 되는 것인데 군의 고위층들이 그리도 강조하는 '정신력'이 있다면 인간의 말랑말랑한 육신으로도 강철을 깨부술 수 있는 것인가?
석유 또한 그랬다. 미국은 남북미주를 모두 제 손아귀에 틀어쥐고 남미의 인디오들이 사는 정글을 파헤쳐가며 석유를 콸콸 뽑아내고 있었다.
일본은? 만주며 조선이며 대만이며 모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곳이었다. 만주에서 석유가 난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아무리 파헤쳐도 석유는 나오지 않았고 기어이 남방 영국과 화란의 식민지를 쳐서라도 석유를 얻고자 이 지경까지 몰린게 아닌가?
일본과 미국은 근본적인 '체급'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총력전 연구소의 모든 연구원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그러나... 동남아 공격에서 가장 걸림돌이 될 영국의 함대는 사실상 지중해 밑으로 다 침몰해 버린 것이 아닙니까? 동양'함대' 라지만 제대로 된 전함은 몇 척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유일한 외부인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그는 항상 통역의 도움을 받아 토론을 들으면서도 조용히 있는 쪽을 선호했지만 가끔 이렇게 주장을 할 때도 있었다. 모두들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해전이라면, 그리고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통상 파괴전에서 그만한 인물은 몇 없었으니.
영국은 그에게 이를 갈았고, 동맹국 독일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유보트 에이스, 귄터 프린은 만리 떨어진 이국에 와서 총력전 연구소의 자문연구원이 되어 있었다.
그의 경험 앞에서, 나름 경력이 있다는 해군 장교들은 존경을 표했고 일반인인 관료들이나 여타 연구원들은 감탄할 뿐이었다.
"추축 연합함대와의 해전에서 영국 지중해 함대와 H전단은 몰락했습니다. 본국 대사관에서 전달받은 바에 따르면 수에즈 운하는 곧 롬멜 장군과 아프리카 군단에 손 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영국 본국함대와 동양함대가 서로 지원하려면 이제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양함대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적이 아닙니까?"
한 연구원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여기까지 이야기해도 되나? 귄터 프린, 그가 주재무관으로 있는 주일 독일대사관에서는 그에게 엄청난 자료들과 기밀들을 주며 연구소에서 활용하라고 했지만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그는 늘 헷갈렸다.
"일본이 동양함대의 현존 함선들을 격멸한다면 인도양에서 결코 영국과 네덜란드의 함대를 두려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와 협의하여 프랑스의 식민지인 마다가스카르에 유보트 기지를 설치하고, 비공식적이지만 최대... 100척까지의 유보트를 일본의 남방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차출할 것임을 제게 알렸습니다."
좌중이 모두 탄성과 환호성을 내었다. 유보트 함대! 최고의 해양강국 영국을 말려 죽이는 데에는 250척의 유보트가 그야말로 일 순위의 무공을 세웠다.
작년 중순즈음 일본으로 소련을 거쳐 비밀리에 입국한 유보트 기술자들은 일본 기술자들을 훈련시켰고 세계 최고의 독일제 공작기계들도 몇 대나 가져다 주었다. 이것들을 활용해서 일본 연합함대는 적잖은 수의 유보트를 취역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총통이 무려 100척이나 되는 유보트를 지원하겠다고? 그것이 모두 구식 소형 유보트들이라도 상관 없다. 남방의 수많은 작은 섬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영미의 함대를 격침시킬 잠수함들이 있으면 일본은 석유의 수송로를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에또, 이쪽은 해군성에서 들어온 내용인데... 미국이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태평양함대의 전함들을 세 척이나 차출하여 대서양 방면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서양에서는 추축의 함대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또 한번의 작은 환성이 나왔다.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력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일본의 전 함대를 들어다 박치기를 해 봐야 승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그 중핵이 되는 전함이 동맹국인 독일을 제압하기 위해 대서양으로 이동했다면 이쪽에서도 승부를 걸어 보는 것이 도리가 된다. 분할하고 격파하라! 손자병법에서도 항상 많은 아군으로 적은 적을 치라 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함대를 격멸당한다고 협상장에 나서겠습니까?"
"함대를 격멸하고, 일본과 독일이 양쪽에서 미국의 해운을 차단한다면 미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함대 궤멸 이후엔 대동아 공영권의 실행에 방해가 될 열강 세력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제국은 고립된 지나를 섬멸하고 남방을 경영하며 차후의 일전을 결할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부의 기본 의중은 미국의 함대를 격멸해 미국이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협상장으로 나오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그 의견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회의적이었으나, 영국 함대가 몰락한 이후 일본제국의 연합함대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은 미국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협상장으로 안 나오면 어쩔 것인가? 일본 제국을 상대로 그들의 의지를 관철할 무력 투사 수단이 없는데. 끝도 없이 넓은 태평양에서 함대가 격멸당한채로 고립된 개별 함선을 잠수함이나 전함 전력으로 하나하나 사냥하다 보면 해운을 봉쇄당한 미국의 역량은 끝을 보일 것이다!
가장 회의적인 ‘미국 예찬론자’들 일부를 제외하고 총력전 연구소의 대부분 인원들은 이에 동의를 표했다.
"그렇다고 미국 함대가 우리가 원하는 함대 결전에 나서 줄런지요..."
그에 대해서도 프린은 할 말이 있었다. 그가 다시 손을 들자 좌중은 모두 그가 풀어놓을 독일 제국의 기밀 정보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스캐파 플로에서 영국 해군의 로열 오크를 격침시킨 그라면, 광대한 바다 속에 숨거나 강철같이 무장한 진주만에 숨어 있는 함대를 격파할 방법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총통이 비장의 한 수라며 준비한 작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제국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는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서를 흥미롭게 읽고 있었다. 총력전 연구소장인 육군 장군은 그의 앞에서 공손히 시립한 채 총리대신의 하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탁, 탁, 탁. 도조는 손가락 마디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보고서를 한장 한장 넘겨나갔다.
"호오..."
가끔 자기가 바라는 내용이 나왔는지 그는 작은 탄성을 내기도 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에는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관자놀이를 긁적이기도 했다. 보고서의 마지막 장까지 꼼꼼하게 읽은 도조는 연구소장에게 손짓했다.
"그래서, 이게 연구소 모의 내각이 내놓은 의견이란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총리대신 각하!"
"흐으음.."
그가 뜸을 들이자 연구소장은 긴장이 되는지 손을 꿈지럭거렸다. 슬슬 그가 입술을 깨물려 할 때쯤 도조가 다시 물었다.
"우리의 전쟁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패배주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네. 이 성과는 그런 패배주의적 사상을 짙게 깔고 있어."
"송... 송구합니다 각하!"
"아니네. 물론 전쟁에 임함에 있어 적을 알고, 나를 알고자 하는 자세는 중요한 것이지... 헌데..."
그는 다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라는 것을 연구소장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필승의 신념! 그것이 개전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이야. 무적 황군이 어찌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찌든 약골 양키놈들에게 질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하나가 정예한 용사요, 천황 폐하를 결사 옹위하고자 하는 야마토 정신으로 무장한다면 우리에게 패배는 없네!"
"예 각하! 명심하겠습니다!"
"몇 가지 좋은 지적들은 담고 있네. 우리의 맹방인 독일 제국의 잠수함 작전은 필히 우리가 배워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네. 영미가 우리의 수송함대를 견제하여 보급에 차질을 빚게 할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해군에 명령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주재무관의 이 발언들은 확실한가?"
"예, 각하. 독일 대사는 주재무관이 본국 정보부로부터 직통으로 기밀자료들을 받고 있다고 확인하여 주었습니다. 신뢰도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아군의 필승은 의심할 여지가 없네. 히틀러 총통은 실로 하늘이 내린 지도자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영미를 격멸할 신기어린 전략을 낼 수 있다니..."
도조는 부처님께 감사를 표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염불을 외는 듯 했다. 그러더니 눈을 확 뜨고, 배석해 있던 참모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련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소련, 소련 말씀이십니까 각하. 소련은 현재 독일제국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 추축에 가입하는 동맹국들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지중해가 우리 추축 세력의 손에 들어온 이상 터키와 이란, 그리고 영국령 중동 식민지들의 저항세력이 독일군에 합류하여 소련을 정벌하기 위해 협력할 것입니다."
"그래, 아주 좋군.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소련은..?"
"소관의 짧은 생각으로는 소련이 본국과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상 불가침을 고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의 황군은 일당백의 정예지만 지나국민이 워낙 많고 전선이 넓어지며 증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대소 전선을 개전하는 것은..."
참모는 말꼬리를 흐렸지만 도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군으로 차출할 인적 자원은 전적으로 부족하다.
장강부터 만주까지 광대한 지나대륙을 메우려면 일억에 이르는 군대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태평양이 넓다 한들 각 섬마다 육군 병력을 보내 요새화된 것이 아닌 이상 해군의 함대로도 충분히 덮을 수 있다. 그러나 대소 개전은 역시 시기상조다.
"좋다! 내 이 내용을 천황 폐하께 상신하도록 하지. 제군들은 모두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전쟁을 예비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각하!"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