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39화
덩케르크의 대참사는 영국 육군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박살내 놓았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 아니었다. 영국군 총참모부는 부랴부랴 남은 찌끄러기로부터 육군을 재건하기 위해 전국에서 대규모로 징병을 실시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상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검증되지 않은' 이들이 꽤나 많이 들어 있었다.
"저희는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수상 각하. 다만 시간과 인력을 조금만 더 허락해 주신다면···"
MI5 국장은 두 손을 연신 마주 비볐다. 각료들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가 비굴하게 속살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탈린은 대놓고 영국의 최고 기밀까지 알고 있다는 듯, 앨런 튜링이나 블레츨리 파크 같은 내용들을 줄줄 읊어 주었다. 영국의 정보부서는 거기까지 소련의 스파이들이 침투했냐며 발칵 뒤집어졌고, 이제는 군과 정부에 침투한 스파이 색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영국 내부의 ‘불순분자’, 즉 스파이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먼저 수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은 친독파였다. 전직 파시스트당원 출신이나 독일의 놀라운 승전에 감탄하고, 그들과 협력하여 세계를 잘 갈라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이들.
영국 정보부는 암약해 있으리라 생각되는 수십명의 나치 독일 스파이중 단 일곱 명만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남아 있는 이들은... 군의 이 친독파 점조직들과 연계를 성공했다. 그 어떤것도 확신할 수 없기는 했지만.
"다만 이 조직들을 모조리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째서지?"
"그것이··· 워낙 기존의 클럽들과 깊게 얽혀 있어서···"
사실 이 친독파 점조직들은 전혀 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 특유의 지역사회 문화, 혹은 '클럽' 문화는 군 내에서도 다양한 사조직들이 생기는 데에 기여했다.
예컨대, 왕립 스코틀랜드 기마연대 전역자 동호회, 맨체스터 퓨질리어 연대 장교 클럽, 제3372 포병대 부사관 모임 같은 작은 조직들은 영국군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정보부는 이들의 동향을 다 파악할 수도, 관리할 수도, 제약할수도 없었다.
애초에 처칠의 보수당 정권을 지지하는 풀뿌리 조직들이기도 했으니 처칠이 제 손으로 이런 모임들을 싸그리 파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그리고 친독파들이 이 조직의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단 한명의 친독파만이 클럽에 들어와 참석자들이 부주의하게 흘리고 다니는 정보를 물어 자기의 윗선에 가져다 바치기도 했다. 그놈의 입! 입! 처칠은 탁자를 쾅쾅 내리쳤다.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들을 왜 못 잡아족친단 말인가!"
처칠은 또 울그락불그락 하면서 떵떵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애틀리는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씹어 삼키다 못해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솔직히 당신이 다 말아먹은거 아닌가?’
프랑스에서, 덩케르크에서, 대서양에서, 노르웨이에 지브롤터와 알렉산드리아까지! 갈리폴리 같은 옛일은 꺼내지 않더라도 처칠의 전략적 선택은 오판 투성이였다.
그러니 국민들이 어떻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나? 차라리 ‘형제의 나라’ 인 독일과 협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겠지. 그러나 애틀리는 그걸 말하는 것이 영국에 그다지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을 아는 지혜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참을 인내심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쉬었고 정보국장은 어물어물할 뿐이었다.
"모두 다 잡아내기에는 대체 어디서부터가 어디까지가 배신자들이고, 어디까지가 그저 부주의한 머저리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배반자들까지..."
처칠은 다시 한번 책상을 꽝 내리쳤다.
"부주의한 머저리가 누군지 한 명은 알겠구만! 내 눈 앞에 한 사람 있는데?"
‘그리고 내 눈 앞에는 두 사람 있지.’
애틀리는 속으로 그렇게 뇌까렸다. 애써 처칠을 진정시키고, 방첩국장은 다시 보고하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은... 제 5열, 6열, 그리고 7열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합니다."
몇몇 각료들은 한숨을 내쉬며 애틀리처럼 이마를 짚거나 뒷목을 주물렀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이도 있었다. 처칠은 날로 색깔이 변해가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붉다가, 시꺼멓다가, 허옇다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만?
"먼저, 가장 위험한 이들이 말씀드린 친독파 배신자들입니다만... 아일랜드 반란파 민족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 역시 군내에 암약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적대적일 때도 있지만 상호간 반국가적 이데올로기로 공감대가 있어 협력하고 정보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아예 각료들이 다 거무죽죽하게 얼굴이 죽어갔다. 이미 소련의 정보력을 확인한 바 그들이 다른 조직들과 협력한다면 영국에는 기밀 따위가 존재할 수 없었다.
"아일랜드 반란파들은 균질한 집단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가진 조직입니다. 일부는 친독 성향이 강해 나치 놈들과 협력해 아일랜드의 통일 및 독립을 바라는 이들도 있고, 신 페인 빨갱이 놈들은 소련과 자주 협력하곤 합니다. 자치정부 내부 과격파들은 순수하게 반영 정서로만 뭉친 이들이 주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 그들을 어떻게 이용할 수 없나?"
외무장관 이든이 푹푹 한숨을 내쉬다 방첩국장에게 물었다. 군 내부에 숨어 들어온 스파이들하고 협력할-이용할에 가깝겠지만-생각부터 해야 하다니. 이 나라꼴도 참 잘 돌아간다!
"어렵습니다. 친독파는 이념형이기에 포섭도, 설득도, 전향시키도 어렵고 파악한다면 검거하거나 역정보를 흘리는 이중스파이로 활용할 수는 있습니다. 이들이 물어가는 진짜 정보가 가치없다는 전제 하에나 말이지요.
아일랜드 반란군 중 친소세력이나 소련계 스파이들은 당장의 '적'에게 정보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정보부에서도 그다지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차마 말은 못했지만 세번째, 소련계 스파이들. 이들 역시 광범위하게 첩보부를 파고들고 있었다. 첩보부도 멍청이들이 아니기에 '빨간' 전적이 있는 이들은 가급적 군무나 방첩 임무에서 배제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정보력이 블레츨리 파크나 앨런 튜링같은 과학자들까지 낱낱이 알고 있을 지경이라면...
사실 방첩국도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 대학교들에서 맑시스트들이 설치고 다니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인재의 부족으로 이들이 대거 입대하거나 국가를 위해-어느 국가인지는 상상에 맡기지만-일하기 시작했고, 소련으로 정보가 술술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소련계 스파이들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 기관은 몇 개가 있습니다. MI5, MI6, 암호부서 블레츨리 파크, 외무부 대프랑스임무과..."
허, 하는 탄식과 신음소리들이 새어나왔다.
"저거 말고 뭐가 더 있냐? 그냥 온통 소련 스파이들 소굴이라고 하지 그래?"
"아, 단순히 그게 아니라.. 이들이 어떤 경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정보부가 파악했습니다. 이제 이걸.."
"이봐! 지금 그런 놈들을 단 한 놈도 잡지 못하고 있고, 그들은 아예 연계조직까지 만들어가며 설치고 있는데 방첩부는 손가락만 빨고 있다는 말인가? 자네들 대체 하는게 뭐야!"
"송.. 송구합니다.."
생각보다 문제는 심각했다. 이 나라에 애정을 가지고 충성하는 이들이 이렇게 없다는 말인가? 이 나라가 어디가 잘못되었길래? 이 위대한 제국을 어째서 결사 옹위하지는 못할 망정... 처칠은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걸 수상이란 사람이 모르니 이 꼴인게 아닐까?’
갈리폴리의 승리자이자 아랍의 정복자이신 처칠 씨? 인도하고 아프리카에서 식민지인들 쏴 죽이고, 이라크에서 쿠르드인들 독가스로 다 죽여버리자고 하고. 그 와중에 뒈지는 건 노동자들의 자식들이고.
끝까지 전쟁 전쟁 외치는 윗대가리들은 편하게 의자에 앉아서 작전이 대실패해도 아... 죄송합니다.. 이 소리나 하고 있고! 네가 지시해서 프랑스 함대를 뺏어오거나 침몰시키려 했다가, 그들이 모조리 돌아선 거잖아. 그 함대가 우리 함대를 다시 다 지중해 밑바닥에 꼴아박은거고!
애틀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였지만, 도저히 처칠과 그 정부에는 애정을 품을 수 없었다. 그가 지난날 그렇게도 혐오해온 소련은 서기장의 두 아들들이 모두 최전선에 나가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고위 당원들의 자제들은 반드시 전선에 복무해야 했고, 또 그만큼 죽어 나갔다. 소련군의 승리에나, 패배에나, 특권적 위치에 있던 당원들은 그만한 기여를 해냈다.
서른 살인 처칠의 아들은? 보수당 하원의원이었다. 안락한 후방에서 내가 귀족입네 거들먹거리는.
"미국, 미국에서 더 오는 지원은 없는가?"
처칠은 소련을 혐오했고, 그만큼 나머지 동맹국인 미국에 더 의존했다.
루즈벨트는 미국 의회나 국민들의 친독성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영국과 소련을 지원할 것을 주장했고, 그걸 관철시키고 있었다. 그것이 그나마 영국의 숨통을 붙여 주고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을 대서양 방면으로 돌려 브리튼 섬 인근의 방어를 지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미국 하원에서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후우. 다들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당장 대체할 수 없는 전함 전력들의 대규모 공백은 영국이 단 한번도 겪어본 적 없었던 사태를 불러왔다. 역사적으로 영국은 몇백 년간 수상함 전력에서 그 어느 국가에도 밀려본 적 없는 독보적인 1위였고, 이를 바탕으로 오대양 육대주에 걸친 대영제국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제 식민지를 지키는 선단들이나 물자를 나르는 수송선단들은 대서양에서 활개치고 다니기 시작한 나치 유보트나 크릭스마리네 수상함대에 벌벌 떨어야 했다.
‘일곱 바다의 공포’ 비스마르크는 이제 왕립해군의 전함전대를 겁내지 않고 대서양에서 수송선단을 사냥했다. 영국 본국함대는 이제 비스마르크에 낚여 자리를 비웠다가 추축군이 대거 브리튼 섬에 상륙하는 상황을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전함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전함뿐인 바 영국은 그 무엇보다도 더 많은 전함이 필요했다.
"USS 네바다와 USS 테네시, USS 메릴랜드가 이쪽으로 파견온다고 합니다. 대신 미국 역시 태평양의 방어를 위해 대서양의 항공모함 전력을 저쪽으로 차출시켜 가야한다고 합니다."
"그래, 지금 우리 상황이 이 모양인데 저들이 그러겠다는 걸 어쩌겠는가?"
본국함대의 전함들은 대부분 침몰했지만 항공모함들은 몇 척 살아남은 것이 있었다. 대부분 대서양에서 크릭스마리네 전함들과의 직접 교전을 피하며 유보트 사냥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일단 미국이 전함을 세 척이나 지원해준다면 당장 한숨은 돌릴 수 있었다. 1차대전기에 건조된 구형 전함 두 척에 그래도 신형인 한 척. 동양함대에서 전력을 끌어온다면... 일단 최악은 막을 수 있었다.
"인도의 정세는 어떤가?"
"네루와 간디는 최종적으로 협력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최악'은 피했다고 생각됩니다."
인도의 부왕(副王)은 네루와 간디 등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평행선만을 달리고 있었다.
네루는 인도인들의 자체적 선거로 선출된 의회가 주권을 행사할 것을 원했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바로.
영국은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수에즈를 상실한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인도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뤄야 했는데 인도를 그저 뱉어 내라고? 영국의 인도에 대한 수위권을 네루와 간디는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간디는 비폭력 운동의 추종자로 인도인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했고, 네루는 결연한 민주주의자로서-사회주의자이기도 했지만-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 전체주의에 협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소련에 협력하면 모를까?
"어쩌면... 인도를 포기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애틀리가 그렇게 말하자 보수당 각료들은 얼굴이 콱 일그러졌다. 처칠은 턱을 꽉 깨물고 목에 핏대가 서나 했지만, 그를 노려보는 노동당 의원들의 눈치를 본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인도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카드-찬드라 보스-를 쥐고 있었다. 수에즈가 뚫린-그리고 영국에게는 막힌- 이상 찬드라 보스가 인도로 가 반영 무장항쟁을 일으킨다 하여도 영국이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네루나 간디 같은 이들이나 한 줌 영국군이 저지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왜들 그러시나? 이번엔 인도를 거대한 갈리폴리···"
"애틀리! 빌어먹을!"
처칠은 그의 가장 큰 약점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을 애틀리가 언급하자 시뻘겋게 변하며 고함을 쳤다. 평소에 모범생 같은 애틀리가 이렇게 대놓고 갈리폴리를 비꼬는 것은 처음 겪어본 각료들은 다들 당황했다
"나는 그 피투성이 상륙작전을 하는 자리에 직접 있었네. 그 이후로 우리 처칠 수상께서는 노르웨이에 집착하다 함대를 날려 먹질 않나 프랑스에 병력을 밀어넣다가 날려 먹질 않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도까지 붙들고 있자는 것입니까?"
"개소리 집어쳐! 인도가 없는 영국은 더 이상 제국일 수 없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영국의 몰락을 좌시할 순 없어!"
"이러나 저러나 몰락할 거 그냥 제국인 것을 포기하면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나마 둘 사이에서 아직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만이 처칠과 애틀리를 뜯어말릴 수 있었다.
"일단 미국에 지원을 더...."
밖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폭음에 따르는 연발 총성과 또 몇 발의 폭음. 회의실 밖에서 경호대장이 문을 쾅 하고 열었다.
"모두들 이쪽으로 피신하십시오! 밖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이게 무슨!"
"수상 각하! 이 쪽으로!"
각료들은 모두 허둥지둥하며 피신하기 시작했다. 애틀리는 가장 문에서 먼 자리에 있었을 뿐더러 뚱뚱해 둔해진 늙은 처칠을 자기 앞으로 밀어 넣었다. 밖에서는 헌병대가 출동했는지 경적음과 호루라기 소리, 그리고 산발적인 총성이 들렸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