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38화(부분수정)
간만의 왁자지껄한 저녁 와중, 문득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지금 보드카를 원샷하며 머리에 터는 보로실로프는 그때엔 나한테 불만을 품고 있었더랬다.
"코바, 이제... 내 죽음을 필요로 하나?"
"뭐?"
어느 저녁 몇몇 옛 혁명동지들과 저녁 만찬을 즐기던 중, 보로실로프는 뜬금없이 내 눈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혁명 동지들은 얼어붙었다. 숙청당한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보냈던 마지막 편지를 알고 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건 무슨···"
"기왕이면 고통없이 처형해주게. 베리야 놈 휘하에 있는 그 고문기술자 놈들에게 날 보내지 말고. 나는 분명히 장군으로서 능력이 부족할 지는 모르나 한평생 소련을 위해 살았고 사보타주 따위는 생각해본 적이 없네. 코바... 날··· 흐끅"
"아니 클림, 무슨 개소릴 하는거야? 취했나?"
스탈린의 애칭이 코바였던 것처럼 스탈린이나 친한 친구들은 보로실로프를 클림이라고 불렀던 것이 스탈린의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아무튼 보로실로프의 폭탄 발언 앞에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해할 만도 했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외무장관인 몰로토프와 함께 국방장관으로서 권력 서열 2위를 다툴 정도였지만 '내'가 빙의한 이후로는 보로실로프와 거의 개인적인 대화 한 마디조차 나누지 않았으니.
전쟁이 터지고 역시 친분이 있던 쿨리크가 숙청당하는 걸 보고, 또 자신에게는 지휘관이나 참모장조차 맡기지 않는 걸 보면 숙청을 걱정했을 만 하다.
하지만 난 굳이 보로실로프를 숙청할 생각이 없다. 실제 역사처럼 전선에서 똥을 싸지르고 다닌 것도 아니고, 개인적 용맹도 뛰어나고 국민들에게 인기있는 보로실로프를 굳이 왜? 보로실로프를 숙청했다가 사위인 조지프 코틴 같은 애가 사보타주하면 어쩌려고?
"너 지금 내가 지휘관 보직 안 줬다고 삐졌냐?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야, 솔직히 니 겨울전쟁에서 한 짓을 생각해봐라. 니가 양심이 있으면 지금 보직 찾을 때냐?"
보로실로프는 머쓱한지 어물어물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내 반응을 보면서 좀 안도하는 듯 했다. 서기장이 아무리 비인간적인, 강철 인간이라 하더라도 아직 절친까지 마구 숙청할 정도는 아니구나... '난' 스탈린이 아니지만, 아무튼 간에.
"그리고 너 겨울전쟁때 그랬지? 누가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조졌냐고? 그 조져버린 베테랑이 다시 어디서 나왔냐? 아니면 어떻게 독일군은 이렇게 잘 막냐? 이게 그 지휘관차이지 인정?"
"어...어? 어, 인정.."
한때 겨울전쟁에서의 참패를 스탈린이 비난하자 새끼돼지 통구이를 집어던지며 누가 붉은 군대의 베테랑 장교들과 장성들을 다 날려버렸냐고 역으로 스탈린에게 분통을 터트린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소련군이 졸전을 펼치고 있다면 모를까, 프랑스와 폴란드를 작살낸 독일군을 이렇게 잘 막아내고 있었으니 보로실로프가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클림, 내 오랜 친구놈아.니가 숙청당할 거였으면 진작에 당했지. 그리고 베리야?"
베리야의 이름이 나오자 보로실로프는 흠칫 했다. 스탈린의 사망 이후 베리야에게 하도 딸랑대서 남들이 친 베리야파인줄 알았다가 흐루쇼프가 포섭하러 가니 흐루쇼프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벌써부터 숙청당할까봐 한껏 쫄아있는 것을 보니 미안해질 정도였다.
사실 원래 자기가 숙청당할까봐 걱정당하는 애들은 안당한다. 숙청당할줄도 모르고 나대는 애들이 잡혀가는거지.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트모씨라던가, 투모씨라던가···
보로실로프는 그런 점에서 적절하게 처신할 줄 알았다. 적당히 무능하고 적당히 조용해서 굳이 위협이 안 되기 때문에 그냥 어르신 취급하면서 놔두면 되는 그런 사람으로.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보장한다니까?"
"그.. 그래..."
"난 아직도 너랑 은행강도질 하던게 어제같은데.. 언제 이렇게 우리 둘 다 늙었냐? 너 그때 경비가 총 쏘는데 나 밀어서 피하게 해준거 기억나?"
"그랬지... 하하하하"
스탈린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저편에서 떠올라 왔다. 처음 공산당 대회에서 만난 이후로 죽이 맞아 절친이 되었고,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의 자금 마련을 위한 은행강도부터 시작해 적백내전, 소련-폴란드 전쟁 등을 거치며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특히, 트로츠키와 그 일파들이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의 전략적 행동을 비난했을 때 보로실로프는 오랜 절친 스탈린을 위해 적극적으로 그를 변호했다.
그때 스탈린이 당에서 격하되거나... 추방되었다면? 아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트로츠키나 다른 누군가였을 것이다.
"다른 누구라면 몰라도 너는 걱정하지 마라. 정 그렇게 군사쪽에 자리를 원하면... 흐음..."
그때 보로실로프가 일으킨 문제는 그에게 적절한 자리를 하나 만들어 줌으로서 해결되었다. 원래부터 지휘관으론 폐급이었지만, 군정가로서는 나름 능력을 보였던 보로실로프에게 정예 특수부대를 창설하라는 임무를 맡긴 것은 나름 신의 한 수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영 신의 한 수랄 게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어떻게... 어떻게... 오빠들을 그렇게 모두!"
별장에서 내 측근들끼리의 저녁 식사 와중 난입한 것은 바로 ‘내’ 딸. 스베틀라나 주가슈빌리였다.
모종의 경로를 통해, 이 어린 꼬맹이는 내게 전해지는 전선의 보고들 중 제 오빠들에 대한 보고를 알게 되었다. 바실리는 형벌부대 임무 중 격추당했고, 야코프는 스몰렌스크 공방전 와중 실종당했다는.
나는 그걸 굳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 않으려 했다.
괜히 사기가 떨어지거나 내 눈치를 보는 사람이 나올까봐.
그리고 스베틀라나는 내가 자기 아들들마저 숙청해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펑펑 울어서 붉게 부어오른 눈으로 내게 바락바락 악을 쓰는 그녀에게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절대 권력인가? 아무것도 아닌 저 열다섯살 짜리 꼬맹이가 국가 최고지도자 앞에서 난동을 피워도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토록 서슬퍼렇던 엔카베데 출신 경호원들조차 쩔쩔매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스탈린, 너 자식놈들 잘못 키웠나보다.’
첫째 아들은 인간적으론 멀쩡했다지만 둘째 아들은 개망나니 중에 개망나니요, 딸이라는 애는 내가 역사에서도 봤는데 나중에 니 뒷담 졸라게 까고 다녀. 심지어 니가 그렇게 예뻐하던 부하들도 배신때리고.
"스베틀라나. 진정하거라."
"아녜요 아버지,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셔야 해요. 아버지는.."
짝. 사람들의 표정이 싹 굳었다.
나는 빼액빼액 악쓰는 꼴을 보기 싫어 고함치는 딸, 스베틀라나의 뺨을 확 갈겨 버렸다.
"바실리, 그 망나니 놈이 뒈진 걸 가지고 지금 내게 따지는 것이냐? 전쟁 중에 자식 한 명, 혹은 아버지나 남편이 죽지 않은 가정이 이 소련 땅에 있을 것 같기는 하나?"
내가 서기장이고 권력자라는 이유로 망나니 같은 개새끼가 제 전우를 건드리고 동료들에게 총질을 하는데 오냐오냐 해야 하고, 또 안전한 후방에서 꿀이나 빨면서 탱자탱자 놀아야 하나? 스베틀라나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바실리는 제 놈이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 뿐이다. 야코프가 실종되었다지만 군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다 소련을 위해 희생했을 뿐. 일개 대위가 하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서기장이 호들갑을 떨어야 하나? 이제 썩 꺼져라! 경호원!"
썩 끌어내! 경호원들에게 외치자 그들은 저어하면서도 내 눈치를 보더니 표독스런 눈빛으로 날 노려보는 스베틀라나의 양 팔을 조심히 잡고 끌고 나갔다.
나이에 비해 왜소하고 마른 꼬맹이를 곰도 한주먹에 때려잡을 것 같은 거구의 경호원들이 혹여나 생채기라도 날세라 조심조심 끌고 가는 모습은 희극적이었다. 이 상황이 비극일 뿐.
비서들은 나를 두 가지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하나는 경외였다.
소련은 그동안 개인 우상화를 통해 나라는, 스탈린이라는 독재자를 신격화했다. 선전 속에서 스탈린은 항상 인민과 함께 고락을 나누는 철인 정치가였으며 국가를 위해 결단을 내리는 인물로 그려져 왔다.
그 이면에는 항상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결단력 있는 철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냉혈한이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측면마저 국가와 조직을 위해 희생시킬 수 있다면 비정함에 대한 경멸은 꽤 자주 존경으로 뒤바뀌기는 한다. 지금의 '나' 처럼.
스몰렌스크에 대한 독일 공군의 대공습에서 야코프 주가슈빌리가 포함된 포병대대는 전멸했다고 한다. 그들이 대기 중이던 건물 근처에서 터진 항공폭탄은 건물을 허물어트렸고 내부에 있던 사람 중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이곳저곳이 다 허물어진 와중에 아무리 서기장 동지의 큰아드님이 갇혀 있다 하더라도 그곳만 파내고 구출할 수 있을리도 없었다. 내게 보고가 전달되었지만, 나는 명백하게 이야기했다.
"야코프를 우선해서 구출하지 말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먼저 구조하고, 살아 있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이들을 꺼내기 위해 귀중한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하지 말도록!"
장병들은 내 명령에 철저히 복종했다. 그리고 나를 존경했다. 전쟁을 위해, 인민을 위해 제 자식마저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
그러나 또 그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자식마저 저렇게 희생시킨다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세 자식 중 둘이 전장에서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자식이 울부짖는 것도 따귀를 내린 후 내쫓아 보내 버렸다.
그보다 훨씬 덜 중요할 자기들에게는 그렇다면, 어떤 처분까지 내릴 수 있을까? 내 비서들은 스스로가 쓸모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듯 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서류업무는 단 한순간도 멈추어서는 안되고, 이들은 나를 보조할 수 있는 뛰어난 인력들이다. 야코프처럼 군인도 아니고, 바실리같이 내다 버리는게 더 나은 망나니도 아니다.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굳이 알리지는 않으려 했는데··· 이거 원. 동네방네 소문이 나 버리겠군."
"..."
다들 조용해졌다. 한창 분위기 좋던 저녁식사가 물이라도 끼얹은 양 숙연해져서 나는 애써 농담이라도 해서 분위기를 좋게 해 보려 했다.
"으음, 이렇게 된 거, 야코프의 전사를 가지고 선전 영화나 한 편 만들어보는 건 어떤가? 제목은 흐음···"
애써 웃음을 터트리며 건설적인 제안을 해 보려 했지만 고참 볼셰비키들은 손을 덜덜 떠는 것 같았다. 문예선전의 총책임자인 즈다노프는 수첩을 꺼내들고 뭔가를 적는 척 하는 것 같았다. 워낙 떨어서 제대로 글씨가 써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코바, 그러지 않아도 돼···"
"아니, 클림 무슨 자꾸··· 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니, 나는 진짜 하나도 안 슬픈데? 쟤네들이 스탈린 자식이지 내 자식이야..? 전혀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이 자꾸 흘렀다.
눈치없는 보로실로프가 내 눈물을 자꾸 닦아주려 했다.
"나, 나 괜찮다고 이 친구야··· 눈에 뭐가 들어갔나?"
"..."
어쩐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안에서 스탈린이 울고 있었다. 저 인간백정도 울 줄 알았구나.
수천만이 죽고 다친 이 전쟁을 만들어낸 연출가이면서도, 제 자식이 죽고 다치는 것이 슬프기는 했구나. 역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