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화
만슈타인은 리히트호펜을 싫어했다. 국방군이든 무장 친위대 잡것들이든, 그가 싫어하는 자들은 넘치도록 많았지만. 그자는 광인이었다.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마을과 도시를 불태우는 데 희열을 느끼는. 그리고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통틀어 학살에 미친 살인마는 많되, 그만큼 계급이 높은 자는 몇 없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이 종장에 들어선 이제 북아프리카에 배치되었던 항공대는 북부집단군의 공세를 위해 지원되었다. 기존 북부전선군을 지원하던 제4항공군에 더불어 추가적으로 배치된 '전략폭격대'를 통틀어 총괄하게 된 자는 바로 학살자 볼프람 리히트호펜.
총통이 쥐어 준 신무기들에 신나하는 어린아이 같았지만, 그는 어린아이가 가진 순수한 잔혹함 역시 가지고 있었다. 슬라브족 '운터멘셴' 들에게 그는 기꺼이 불벼락과 폭탄과 기총소사를 퍼부으라 명령했고 마치 던진 공을 물어오는 개처럼, 그는 결과물을 들고 와 헥헥대며 자랑스러워 하곤 했다.
"이번 탈린 폭격 작전에서 우리 공군 조종대가 보여준 놀라운 성과입니다! 실로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흐하하핫!!"
공군의 '실험'은 간단했다. 새로 개발된 폭탄들을 적의 도시와 마을에 떨어트리는 것. 어떤 폭탄이 제일 잘 가옥을 파괴하고, 어떤 폭탄이 제일 잘 민간인들을 도륙하는가?
총통은 전쟁을 '총력전' 이라고 이야기하며 도시와 공장과 인간을 때려 부수어 전쟁의 역량과 의지를 박살내는 것이 승전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지름길을 적극적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리히트호펜은 총통이 지시한 '실험'들을 기쁘게 수행하며 병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결과를 집계했다.
그는 장황하고 빠른 어투로 이번 프스코프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신병기들을 소개했다. 어디서 이런 건 또 만들어 오는지. 만슈타인은 반감을 숨기며 담담한 체 하는 얼굴로 광인의 주절거림을 참아내었다.
그가 배운 전쟁은 군대와 군대가 각자 전략과 전술을 이용해 맞부딫히는, 본질적으로 전사와 전사의 대결이었다. 힘없는 민간인들은, 비록 '열등 인종'이라 할 지라도 해치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배워 왔다.
지난 20여년의 군력 속에서 그는 이런 전쟁을 한번도 꿈꿔본 적이 없었다. 리히트호펜은 이런 무기들이 어떻게 대독일의 아들들이 흘릴 피를 줄일 지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그는 차라리 외치고 싶었다. 차라리, 차라리 우리 아들들의 피가 강이 되어 흐르게 하라. 어리석은 저 백성들을 학살하지 말고.
"그래서, 나는 뭘 해주면 되나?"
만슈타인은 리히트호펜의 일장 연설이 끝나가는 듯 하자 심드렁하게 그렇게 물었다. 그래, 그 잘난 공군으로 어디 한번 다 해보라. 리히트호펜은 어쩐지 괴링을 연상케하는 거만한 웃음을 띄었다.
"아! 사령관님. 육군은... 그저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우리 공군이 때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듬뿍 주고 올 테니 말입니다! 하하하하!"
프스코프는 6월 개전부터 지금에 이르는 동안 완전히 요새로 탈바꿈해 있었다. 이곳을 탈취하려는 목적은 철로선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인 만큼, 적군이 기차역으로 진격할 수 있는 경로는 지뢰와 철조망, 기관총과 대전차소총을 장비한 사수들로 꽉꽉 들어찬 토치카 등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비록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라지만, 소련군은 몇 개의 건물을 계획적으로 붕괴시켜 독일군의 기갑-차량화부대가 기동할 수 있는 루트를 극히 제한시켰다. 그리고 열어둔 경로에는 생각없이 기어들어올 독일군을 때려부수기 위한 촘촘한 화망이 구축되었다.
북서전선군의 2개 군단은 고강도의 시가전 훈련을 받으며 군사 기능 이외 다른 모든 것이 반 폐허가 된 도시로 숨어들어 혹시나 진입해 올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동예비대 노릇을 할 전차부대의 핵심 중전차들은 적 북부집단군의 공세역량을 모조리 소진시키며 함께 다 망가져 버렸기에, 겹겹히 쌓인 보병 방어선만이 이들이 의존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고된 사역과 진지구축으로 지치기는 했어도 강철 같은 방어선을 쌓아올렸고 다른 전우들이 전장에서 죽자고 독일군과 싸우던 와중 별다른 전투 없이 대치만을 했기에 전선군 병사들의 사기는 꽤나 괜찮은 편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위이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이잉! 공습이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공습이다!"
"엄폐하라! 엄폐!"
귀청을 때리는 공습경보가 울려퍼졌고 밖에서 작업을 하던 병사들은 허겁지겁 엄폐물이나 진지를 찾아 숨기 시작했다. 얼마간 잘 나타나지도 않던 적 비행기가 뜬금없이 공습을 가하다니? 병사들은 예전의 악몽들을 떠올렸다.
투타타타타타, 투타타타타타! 대공포가 불을 뿜고, 소련 전투기들은 폭격대를 엄호하는 독일 전투기들에 맞서 기관총을 발사했다.
[날개를 맞았다. 퇴각하겠다!]
"빌어먹을··· 적이 너무 많다!"
하지만 소련군 전투기들의 저항은 오래갈 수 없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북부전선의 하늘에서 소련 공군은 압도적 열세에 있었다. 하나하나 소련군 전투기가 격추당하거나 퇴각할 무렵 폭격대는 프스코프의 하늘에 이르렀다.
"전탄 투하! 투하하라!"
"예! 하하하핫, 뜨거운 맛 좀 보라고!"
독일의 폭격기들은 무방비해진 도시의 상공에서 막대한 양의 항공폭탄을 투하하고, 휭 날아가 버렸다. 폭탄들이 지상에서 생 지옥을 만드는 동안 그들은 저만치 멀리 사라져 있었다.
거대한 열폭풍이 불어닥치며 벙커와 무너진 건물 사이로 숨어 있던 소련군들을 소살시켰다. 폭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곳은 건물이 무너지고, 또 누군가는 압력차로 인한 내장 파열로 격심한 고통 속에 죽어갔다.
그들이 수 주에 걸쳐 구축한 방어선들은 도시를 뒤덮듯 뿌려지는 항공폭탄에 의해 붕괴했다.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폭격기들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돌아와 소이탄을 뿌려 댔다.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도시 근처의 비행장으로 퇴각한 소련 전투기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프스코프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첫 번째 폭격에 의해 무너진 건물들 속에서 간신히 탈출해 동료를 구해내고자 했던 이들은 소이탄 폭격 아래서 검은 숯덩이가 되어 죽었다.
북서전선군 사령부는 공습에 대한 경보를 받고 지하 벙커에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령부는 이를 본격적인 공세 시작 전의 예비 폭격으로 판단하고, 준비했던 방어 작전을 예정대로 개시하라는 명령을 무전으로 하달했다.
그러나 지하 벙커의 위에서는 심상찮은 굉음이 들려 왔고, 예하 부대들 중 무선에 정상적으로 응답하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응답하는 극소수 역시 처절한 비명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끄아아아아....ㄱ... 치지지직.."
"2연대! 응답하라! 응답하라!"
시 외곽 최전방 방어선에 주둔중이던 49사단 2연대를 마지막으로, 사령부의 통신이 중단되었다. 통신부대에서 시작된 공황상태가 참모들과 행정병들 사이로 파급되어가는 와중 바투틴 사령관이 탕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당황하지 마라! 정보장교는 연락이 두절된 아군 제대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즉시 총참모부에 보고하라.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다."
항상 당당하던 사령관의 말꼬리가 곧 흐려졌다. 그조차도 당장 이것이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공습이 떨어진 거지?
사령부 소속 참모들은 사령관의 눈치를 보며 대체 뭐가 떨어졌는지 파악하려 했지만 사령관이라고 뾰족하게 더 아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도 총사령부로 가는 무전은 문제없이 전달되고 있었다.
"여기는 북서전선군, 방금 대규모 공습 이후 휘하 부대들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 반복한다, 공습 이후 휘하 부대들과 연락두절 상태이다."
총사령부 역시 혼란에 빠진 듯 했다. 애초의 목표-동계전역까지 프스코프에서 버티며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목을 사수하는것-를 달성하는 것이 코 앞에 와 있었기에 그들은 분명히 승리가 눈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토록 가까이 있어 보였던 승리는 마치 파랑새와 같이, 잡으려고 하니 홀연히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총사령부는 충격적인 소식 하나를 툭 전해주었다.
"스몰렌스크 역시 함락 직전. 1시간 전 스몰렌스크 역시 공습 이후 휘하 부대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을 보고했다. 유사한 항공 폭탄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서전선군은 자체적인 판단 하에 방어선을 고수하거나, 전력이 부족할 경우 철로선을 파괴하고 후퇴하라."
몇몇 참모들은 아예 공황상태에 빠진 듯 했다. 바투틴 사령관은 용케도 장교들을 추슬러 가며, 밖으로 나가 패잔병들을 규합할 것을 명령했다. 그 역시 공황에 빠진 채, 모든 것을 내버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를 꽉 아문 채로 이리저리 명령을 내렸다.
프스코프 열차역에는 도시에 주둔중인 소련군의 보급물자들이 쌓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군용 물자이니만큼 그곳에는 폭발물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공습으로 소실되었다면 열차역과 함께 폭발했을 것이지만 가급적 열차역과 철로는 저들이 이용할 수 없도록 파괴하여야 한다.
"시 인근의 마을에 배치되어 적군의 우회와 철로 절단을 경비하는 경비병력에게 연락하여 미리 매설해둔 폭탄으로 철로선을 파괴하도록 명령하라!"
"알..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거대한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은 일부가 가까스로 보존된 무전기나 통신선을 이용해 사령부로 다시 회신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절규하며 의료 지원, 혹은 구출을 요구하고 있었고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이는 극소수였다.
도시 방어부대는 순식간에 패잔병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친 것인가.’
바투틴은 내심으로 절규했다. 북서전선군의 수만 병력 외에도, 아직 프스코프 시 안에는 시를 떠나길 거부하며 끝끝내 집을 지키는 몇천 명의 민간인들이 남아 있었다.
이외에도 군의 업무를 돕도록 임시적으로 징발한 수천 명의 전시노동자들과 각종 업무를 지원중이던, 군인 아닌 이들이 최소 만 명 단위는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살아남았을까? 이 물음에 바투틴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한 방 제대로 먹었군."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 했던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남부의 하늘에서 어쩐지 예측 이상의 공군력 우세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던 것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송··· 송구합니다!"
"아니, 그럴 것 없네."
맞교환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문제였다. 독일은 남부집단군의 공세 가능성을 포기하는 대신, 중부와 북부에서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교두보인 스몰렌스크와 프스코프를 차지한 것이다. 2대 1. 북/중/남 세곳 중 독일이 이득을 본 것이니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뭐, 정확한 피해상황은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 나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저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제한적이었다.
"저들은 전과를 확대시킬 곳이 없지. 곧 들이닥칠 겨울에 그 이상 전진하겠다는 것은 자살행위 아닌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서기장 동지."
"대신 우리는··· 갈 곳이 많지 않은가? 안 그런가, 보로실로프?"
"예? 아!! 예, 그렇습니다!!"
교두보의 가치는 전진할 곳이 있을때나 존재한다. 교두보를 얻어 봐야 앞으로 한 발짝 떼기 어렵다고 하면 그곳은 그저 돌출부가 될 뿐이다. 적이 잘라먹기 좋으라고 내밀어준 맛있는 먹잇감.
반대로 우리 군대가 확보한 교두보에서는 단 한 걸음만 나가면 거대한 먹잇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없는 몰로토프는 그 먹잇감을 잘 꼬드겨 오게 사전 포석을 깔아두었고, 보로실로프는 계획을 실천할 실전부대들을 훈련시켜 투입했다.
"부됸늬와 주코프가 잘 해주기를 기다려야겠군. 하하하하하하!"
"에.. 하하하하하하하!"
내가 웃자, 모두가 함께 웃었다. 독일은 당장의 자잘한 목표에 눈이 팔려 대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이 소련 야전군 한두개를 박살내거나, 도시 몇 개를 먹는 것에 눈이 뒤집혀 달려들 동안 우리는 차근차근 밑작업을 끝마쳐 두었다.
지금을 즐기라! 곧 뼈저리게 후과를 실감할 테니. 하하하하!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