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화(1941.11월)
늑대굴의 총통은 진짜로 모델 사령관을 총애하는 듯 했다.
1기갑집단에 지원된 신형 전차, 5호 전차 '판터' 150여대는 명목상은 클라이스트의 휘하에 배속되었지만 모델 사령관의 직할 예비대로 차출되었다.
사령관은 이 신형 전차대를 전선의 소방수라고 부르며 40년 이후 독일군이 깨달은 전차의 집중운영 교리와는 정 반대로, 중대, 혹은 소대 단위로까지 쪼개어 전선을 구원하기 위해 투입했다. 물론 훨씬 더 대규모의 공세에서 선봉, 혹은 예비대로 쓰이기도 하였지만.
또, 야전군과 군단 직할, 그리고 사단급 중곡사포 포병대의 일부까지 차출해 손에 넣은 모델 사령관은 이들을 '집중 운영 포병대' 라는 이름 하에 집단군 직할 포병 전투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슈투카의 지상지원 요청 역시 사령관의 허가에 달려 있었다.
각급 장성들은 이런 조치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손에 있던 강력한 화력이 사령관에게 싸그리 차출되어 버리고, 자기 휘하의 부대들도 갈갈이 쪼개 가지각색 크기의 전투단(Kampfsgruppe)으로 재편당해 버렸다.
장군들은 재량권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고, 그 재량권은 영관급이나 혹은 모델 사령관 본인의 손에 모조리 쥐어졌다. 국방군은 ‘임무형 지휘체계’ 라는 이름으로 현장 전술제대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했다.
그리고 장군들은 이 원칙을 굉장히 좋아했다. 자존심 강하고 유능한 장교들이 상급제대 지휘관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을 선호하겠는가?
하지만 모델은 임무형 지휘가 아니라 본인이 전권을 쥐는 명령형 지휘체계를 훨씬 선호했다.
모델 사령관은 수시로 전선을 시찰하며 전투단들을 예비로 차출하거나 다른 곳에서 가져와 전선에 투입했으며, 장성들은 자기 부대들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오래 갈 수 없었다. 단 며칠 만에, 모델은 갖가지 별명을 획득했다.
<전장의 마술사> , <마법사의 제자> , <방어의 사자>와 같은.
물론 소련인들은 그를 조금 더 상스러운 단어로 불렀다. 주로 도축이나 정육과 관련한 단어로.
"무선 감청에 따르면 적 9군의 예하 제대들은 개별적으로 후퇴 중입니다. 아군의 선두 제대는 9군 휘하 37군단과 28군단, 6군단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후베 전투단에서 지원폭격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37,108 위치에 적군의 중곡사포 대대에 대한 공격 요청입니다."
"도브비시 방면에서 기갑병력 증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적의 대대급, 아니 연대급 기갑부대의 공세가 30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주력은 T-60과 T-34!"
사령부로 쏟아지는 보고들 속에서 모델 사령관은 속사포같이 보고에 대한 해답을 날려댔다. 그에게 보고하는 장교들이 명령을 다시 내리는 와중에 몇 개의 명령이 더 내리꽂힐 정도로.
"9군 휘하 군단들에 대한 공세는 정지하고, 포위망의 마개가 누구지? 마켄젠? 마켄젠 전투단 제외 나머지 부대들을 골라 퇴각시키고, 슬로바키아 기동여단을 투입한다. 포위망 내의 소련 놈들에 대한 곡사포격 지원은 허용하지 않는다. 당장은 필요없어."
"후베 전투단의 지원폭격? 폭격이 아니라 포격이라면 허용한다. 지금 예비로 차출된 15cm 야전포 2개 포대로 대포병사격 시키도록. 슈투카는 저기 도브비시 방면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투입한다.
여력이 있는 공군 비행대 전부를 투입하고, 503 대대의 재편된 2개 중대를 1차적으로 증원한다. 502 대대는 언제 돌아오는 건가!"
정황상 소련군은 소모전 속으로 독일군을 끌고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모델은 그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공군의 정찰비행편대는 사령부의 명령으로 기체들을 혹사시켜 가며 정찰비행을 계속했고, 소련군의 공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를 가늠해 보았다.
저들은 모든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 맞서 소모전을 치를 경우 독일이 먼저 백기를 들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병사도, 전차도, 화포도 모두...'
하지만 독일군의 목표는 소련군을 모두 갈아버리고 우크라이나의 대지에 피와 뼈로 된 거름 한 무더기를 더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었거니와, 시도하다간 독일군 37만 명이 모조리 싸늘한 전장의 고혼이 될 터.
"대독일의 아들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면, 그 값은 최대한 비싸게 치르게 해야 한다! 알겠나?"
"예! 각하!"
필요한 것은 아주 미세한 틈이다. 문자 그대로 진창에 빠진 1기갑집단을 빼내올 수 있는 틈. 적 사령관은 현명하게도 대대적인 반격 및 역포위를 걱정하여 얼마간의 예비대를 자기 손에 쥐고 치밀한 작전을 펼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계획은 세운 순간부터 엇나가게 마련. 적장 키르포노스는 아마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올 인 베팅을 해서 적군을 모두 잡아낼 것인가? 아니면 더 큰 피해를 피하기 위해 지금까지 얻어낸 것에 만족할 것인가.
‘어차피 우리가 승리하기란 불가능한 전장이다.’
땅덩이도, 중장비도, 모두 잃는 판이었다. 거기에 더해 병사들까지 싸그리 잡아먹고 싶어하는 소련을 상대로 너무 큰 피해를 입지 않으며 안전한 선까지 퇴각하는 것. 그것이 모델의 목표였다.
밤이 되자 교전은 잦아들었다. 여전히 전선 곳곳에서 보고가 날아들고 있었지만, 훨씬 더 여유있게 소련군의 공세에 대응할 수 있었다.
적군을 섬멸하고 돌아온 부대들은 다시 쪼개져 다른 부대의 일부와 함께 혼성 편성되어 공세를 뒷받침하러 나섰고, 또 일부는 휴식을 취하며 내일의 교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자네들... 여기, 여기, 여기. 이 사람들은 예비대일세. 하하!"
몇몇이 졸기 시작하자 모델 사령관은 그들 중 몇을 집어내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전투를 지원하는 것 역시 전투나 다름없네. 그리고 내가 필요할 때 투입시킬 수 있는 병력이 없다면 나의 패배가 되는거야. 예비대들, 침대로 퇴각하라!"
모델 원수는 그렇게 농담을 하며 환타 한 병의 뚜껑을 땄다. 그가 손짓하자 사령부 당번병이 달려와 남아있는 장교들과 병사들에게 음료수 병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페르비틴도 한두 알씩 함께.
뜻밖의 간식에 장교들이 사령관을 바라보자, 모델은 씨익 웃었다.
"승리를 위하여!"
축배를 들듯 병을 높이 들어올린 그는 꿀꺽꿀꺽 환타를 마시기 시작했다.
"승리 만세!"
모두들 환호했다. 각자 전선의 극히 일부만을 알 수 있기는 하였어도 지금까지 처해 있었던 열세와 질적으로 다른 상황이라는 것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엄격하고 완고한 프로이센 시대의 노원수의 지휘 아래서는 패배와 퇴각의 연속이었지만, 젊고 정력적인 사령관 하에서 승리의 맛을 본 이들은 그 맛에 중독되어 가는 듯 했다.
"승리 만세! 모델 원수 만세!"
모델 원수는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페르비틴 한 알을 입에 털어넣고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갔다.
막사를 나온 그의 얼굴은 아까의 흐뭇한 미소는 찾아볼 수 없이 굳어 있었다. 그를 따라온 젊은 차석부관이 종종거리며 걸어와 그의 옆에 붙자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헌병들을 데려오게. 1개 중대면 충분하네."
"예? 옙, 사령관 각하!"
부관은 어디론가 달려갔고, 모델은 얼음장 같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룬트슈테트 원수, 조텐슈테른 중장같은 남부집단군 사령부 요인들부터 라이헤나우나 클라이스트 상급대장같은 야전군 사령관들까지.
"대체 모두들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차라리 자기네들이 총통의 친위대이자 인민의 군대라고 뻐기는 SS들이라면 모를까, 늘 그렇게 군인의 명예를 외쳐대던 이들이!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신임 집단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이후 만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조반니 메세 중장이 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독일군이 운영하는 윤락 여성들을 아예 좀 이탈리아군들로부터 분리하던가, 아니면 저희 병사들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령관 각하?"
메세 중장은 병사들의 성욕을 해소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절감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군기가 문란해져 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왕왕 있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모델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우리 군이 운영하는 윤락 여성이 있었습니까?"
이후 참모부에 알아본 바, 룬트슈테트 원수와 남부집단군 사령부에서 비밀리에 군 소속으로 ‘윤락 여성’을 운용했다고 했다.
총통과 나치당의 고위층들은 유태-볼셰비키와 운터멘셴(Under-man, 하등인종) 인 슬라브족의 절멸을 원했다. 이러한 의중은 여러 경로를 통해 각 집단군과 야전군에 전달되었다. 민간인들을 다 죽여 버리고, 특히 볼셰비키들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
그러나 세 집단군의 사령관들 중 레프 원수와 보크 원수는 이것을 거부하고 휘하 병력에게 전파시키지 않은 반면,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룬트슈테트 원수의 남부집단군 휘하 야전군 사령관 중 라이헤나우 상급대장 같은 사람은 이를 수용하는 선을 넘어 강조하며 반드시, 반드시 저들을 죽여 없앨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나, 누군가는 이런 악마적인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저들을 독일군의 '정신적 위안'을 위해 활용하자.
강제노동형에 처해졌던 유태인들이 일단 전선으로 차출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유태인의 더러운 피를 더 이상 확산시킬 수 없도록 강제로 단종수술을 당한 상태였다.
"왜 슬라브인들이 아니라 유태인이지?"
모델의 질문에 대해 참모장교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 지역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도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렸다. 전쟁을 통해 독일인들이 영광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레벤스라움을 얻겠다는 총통의 목표에 모델은 그다지 공감할 수 없었다. 총통의 재무장 계획은 독일의 자기방어를 위해 지지했지만 다른 인종들, '열등'한 이들을 몰아내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독일 땅에서 수백 년을 잘 살아왔는데. 모델은 나치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곤 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절멸, 절멸이 이런 의미였던가? 비무장 민간인들을 모조리 쏴 죽이고 여자는 납치해서 창녀로 만들어 버리는?
동쪽 소련의 위협을 괴벨스와 같은 이들은 몽골의 침략에 흔히 비유하곤 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남자는 학살하고 여자는 강간하여 저들의 아이를 배게 할 것이다! 괴벨스는 늘 금속성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높여 외쳤다. 그러니 저들을 쳐부숴야 한다고.
‘우리가 무엇이 다른가?’
헌병대의 지휘관인 대위는 이 야밤에 무슨 일인지 궁금한 듯 했다. 그러나 모델은 입을 콱 다문 채로 '그들' 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부대 내의 편의시설들은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야전 빵집이나 병원, 이발소나 우체국 같은. 그리고 그 한 구석에 아무 팻말을 붙이지 않은 몇 개의 컨테이너들이 보였다.
‘내가 왜 이전에 이것을 보지 못했지?’
스스로에게 자문했어도 모델은 알 수 없었다. 몇몇 병사들이 음습한 웃음을 지으며 컨테이너 앞에 서 있던 뚱보에게 구깃구깃한 지폐 뭉치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또 누군가는 컨테이너에서 바지춤을 추스리며 나오고 있었다.
"거기 차렷! 주목!"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올라 모델은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치고 말았다. 헌병대는 이것이 명령인가 하여 다들 총을 뽑아들고 사령관의 명령에 따를 준비를 했다.
"너, 너는 누구지?"
포주인 것 같은 뚱보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두리번거리다 모델의 어깨와 칼라에 달린 계급장을 보고 히익 하고 놀라며 굽신대기 시작했다. 얼굴에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그는 헤헤 웃으며 손바닥을 연신 비벼댔다.
"아니, 이거 신임 사령관님 아니십니까.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떤 일이신··· 흐윽!"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뚜벅뚜벅 걸어간 모델은 포주의 정강이를 콱 걷어찬 후 권총을 꺼내어 그를 겨누었다.
그가 권총을 꺼내는 것을 본 부관과 헌병대장, 그리고 헌병들이 와르르 몰려가 뚱보를 포위했다.
"입 닥치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 네놈은 누구냐?"
"예! 예! 저는 그... 국방군의 위탁 사업자인 한스 토마셴입니다. 이게 무슨 일··· 컥!"
정강이를 부여잡은 채로 와들와들 떨며 대답하는 그가 반문하려 하자 모델은 한번 더 그를 걷어찼다. 딱딱한 군홧발에 두 번이나 걷어채인 뚱보는 이제 아예 바닥에 엎드러져 꿈틀댔다.
"나는 분명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 병사들의 위안을 위해.. 본토에서 이송해온 유태인 여인들을 제공... "
"당장 모두 끌고 가!"
모델은 이를 꽉 악물었다.
"총통 각하,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그는 진실로 믿고싶지 않았다. 어디까지 이 일에 개입된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 이런 미친 짓에 동참하고 있는 것인가? 국방군 총사령부? 육군 고위층?
아니면 SS나 집단군 사령관? 아직도 포주를 포위한 채 총을 겨누고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 헌병대원들은 줄을 서 있던 병사들과 컨테이너 안의 사람들을 끌고 나오기 시작했다. 씹어 내뱉듯 그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즉시 사령부로 가서 집단군 예하 부대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부대를 모두 파악하도록 하게. 그 부대의 지휘관과 참모장은 사령부로 소환하고... 아니, 집단군의 고위 지휘관들을 불러모으도록. 나는 전쟁 범죄를 묵과하고 넘어갈 생각이 없네. 당장!"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