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34화 (34/300)

# 34

34화

클라이스트는 또 한번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꼰대였지만 국방군의 최고참이자 그의 상관이었던 룬트슈테트가 총통 암살모의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로 인해 공석이 된 남부집단군 사령관에는 웬 어린 대장따위가 2계급 특진을 해 원수 계급장을 달고 부임했다.

"발터 모델? 그게 누군··· 누구신가?"

"저... 발터 모델이, 얼마 전까지 중부집단군에서 사단장 하던 그 사람이 맞습니까?"

"그래, 그런 것 같더군."

휘하 사단장 중 하나가 우물쭈물하며 손을 들었다. 저 친구 이름이 뭐였지? 기억이 날락말락 할 때쯤 그 장군은 진심으로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 친구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제 오랜 친구인데..."

"...뭐?"

지금 내 밑에서 사단장 하고 있어야 할 놈이 내 상관이라고? 라인을 잘못타서 할더같은 샌님한테 밀려난 만슈타인이야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하는게 어찌 보면 납득 가능했다.

클라이스트, 그 자신보다 일곱살이나 어린 구데리안은 그래도 가장 멀리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니 승진이 타당하다고 치자.

충격적인 말에 휘하 장성들이 술렁거리는 가운데 클라이스트는 진심으로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 잘난 모델이 누구고 뭘 그렇게 잘해서 무려 집단군 사령관씩이나 하는건데?

지금 남부집단군의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군의 저항이 남부에서 가장 완강했으며, 허접한 루마니아와 헝가리 병사들을 끼고 소련 내의 최정예를 상대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총통은 혹시 이게 클라이스트, 그 자신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단순히 장군들의 지휘 역량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 사령관 룬트슈테트가 늙어 치매가 왔는데 폴란드와 프랑스에서는 잘만 승승장구 했을까?

그 순간 회의장 문이 확 열리고 누군가가 휙 들어왔다. 비어있던 최상석 의자를 탁 잡은 장군은 아차 하는 듯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가볍고, 말씨는 명랑하고 명쾌했다.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궁지에 몰린 패잔병 부대의 지휘관이기에는 부적절해 보였다.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한 모델입니다. 긴말은 하지 않겠으니, 빨리 상황을 브리핑하도록 하지요."

차라리 진격의 최선봉에서 승전을 거듭하는 상승장군이 이러할까? 그보다 훨씬 오랜 군력(軍歷)을 가진 이들 앞에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개전 극초반의 대승 이후 독일군은 승리다운 승리를 맛보지 못해 왔다. 그런데도 이런 자신감이라니?

클라이스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심지어 모델은 오랜 친구라던 사단장을 보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다른 장군들도 그다지 납득하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누가 보던지 객관적으로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암담했다. 소련 1충격군과 2충격군의 기습적인 공세 앞에 6군의 방어선에는 병력보다 구멍이 더 많게 되었다.

뻥뻥 구멍이 뚫린 수비선 사이로 소련군의 기동제대들은 파고들었고, 이들을 간신히 격퇴하기는 했으나 피해가 적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6군의 예하 제대들은 각자 고립되고 피폐해진 소부대들로 쪼개지게 되었다. 압도적인 물량을 투입한 결과 간만에 제공권을 장악한 소련군 공격기들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독일군의 효과적 기동을 차단하고 보급로를 타격하고 있었다.

단순히 후퇴해서 재편성을 거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후퇴하다가 발목이 붙들린 채 섬멸당하느냐, 혹은 전선을 붕괴시키고 아군을 버린 채 도주하느냐. 그 선택만이 남아있을 뿐이지.

여기에 소련 포병대의 막강한 곡사화력에 보병들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참호 속에서 철모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다가, 진격하는 소련군의 파도 속에 삼켜져 섬멸당하는 처지.

"저희 34보병사단은 지금 정원의 절반도 남지 않았습니다!"

"82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각하!"

각 군단과 사단은 자기네들의 처지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호소하며 증원과 지원을 요청했다. 어느 장군은 흰 붕대로 감싼 팔을 들어보이며 소련군 병사에게 당한 총상이라며 부디 자기네 부대를 구원해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

모델 사령관은 눈을 가볍게 감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전과와 전선의 배치현황에 대해서 듣고 있었다. 젊은 영관급 참모 몇이 25000:1 짜리 전술지도에 아군과 적군의 병력과 배치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소련군은 징그럽게도 많았다. 도저히 가지고 있는 나무 표식들로는 그들을 다 표현할 수 없어 종이쪽지에 식별기호와 숫자를 써둔 것으로 대체해야 할 정도로.

먼저, 전장의 화력을 담당하는 화포의 문 수에 이르면 독일군은 이미 몇 배로 압도당하고 있었다.

소련 포병의 훈련도나 숙련도부터 포탄의 질까지, 소련 포병대는 분명히 독일의 그것에 비해 열등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 낮은 신뢰도를 압도적인 물량으로 극복했다.

"소련군의 중포 전력은··· 포의 문 수만으로 계산하였을 때에는 아군의 5배 이상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포탄의 보급 역시 아군보다 상대적으로 원활한 바 저들의 포격에 장해가 될 요인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포병의 관측단장 역시 마찬가지로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스탈린이 말하길 ‘포병은 전장의 신’ 이라던가? 152mm, 203mm, 심지어 전장을 통틀어 몇 문 없을 280mm 중포까지 남부집단군의 불운한 병사들을 향해 펑펑 포격을 쏘아댔다.

통신감청을 통해 확보한 자료만 하여도 중곡사포 대대의 단대호가 100 단위까지 올라갔다.

"그렇다면 중곡사포가 그렇게 많다는 말인가?"

"아마도 그러할 것이라고 추측됩니다만···"

독일군은 사단에 1개 대대씩 붙여주고, 군단직할 포병여단에나 세네개 쯤 있는 편제가 중곡사포대대다.

너무나 부족해서 군단 직할대로 차출된 후 군단포병대, 혹은 상급포병사령부(Higher Artillery Command) 지휘를 받아 사단이 긴급 지원요청을 해야 할당될 정도로 귀중한 전력으로 굴려지는 것이 중곡사포인데...

그런 것이 백 단위라고? 몇몇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76mm 경야포나 82mm 박격포에 이르면 대체 소련군에 몇 문이 편제되어 있을 지도 파악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1만 문? 2만 문?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찰기들은 수없이 많은 소련군 보병대와 전차부대가 진군하고 있다고 하였다. 대부분 탱켓, 경전차 수준의 형편없는 물건들이었지만 그 사이에 섞여 있는 T-34나 KV 전차는 3호나 4호 전차로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보고들이 종합되면 될수록 장군들의 얼굴은 일그러져만 갔다. 6군의 병력은 겨우 27만 명. 1기갑집단은 본질적으로 기갑부대였기에 그것보다 적어 겨우 11만.

소련군은... 50만? 100만? 아무도 그들의 숫자를 추측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웬만한 통신은 다 감청할 수 있었지만 이제 소련군은 통신보안이라는 분야에 눈을 뜬 것 같았다.

"저희는··· 아무리 적어도 100만 이상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쩌면 200만 명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어···"

루프트바페에서 파견온 정찰비행단장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200만을 이야기했다. 숫자를 들은 장군들은 다같이 긴 탄식성을 내놓았다. 그러나 모델 사령관은 오히려 작게 미소를 띌 뿐, 좌절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먼저."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하던 중 모델 사령관이 지극히 명랑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저 자는 제정신인가? 아니면... 구원자인가? 클라이스트는 그렇게 고민했다. 아마 다른 장군들도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델은 남들의 생각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자리의 대장은 나다! 이런 생각인가? 아무튼 다른 대안이 없는 바 이들은 사령관의 전술을 들여다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이 곳의 간극을 닫고 6군과 1기갑집단 간의 연결을 확보하도록 하지."

1기갑집단의 장비들은 대부분 진창에 빠져 제대로 기동할 수도 없었다. 배후의 철도망은 파르티잔 공격과 부됸늬 원수가 이끄는 기병군에 의해 절단된 지 오래.

6군과 1기갑집단을 합쳐 38만 병사들이라고 하여도 인적 손실을 보충받지 못하여 지치고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제 전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델 사령관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전술지도 위의 요충지들을 모델 사령관은 손으로 훓어 내려갔다.

노보고로드-볼린스키, 도브비시, 셰페토프카, 즈돌브노프. 생소한 러시아식 지명의 도시들을 향하는 소련군의 물결을 그는 톡 톡 건드려 치워버렸다.

"이곳, 이곳, 그리고 이곳."

1기갑집단을 지원할 수 있는 철로망이 지나가든 지역들. 남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한 로브노부터 그의 손가락이 긴 선을 그렸다. 그의 '역습'은 두 개의 창끝을 가지고 있었다. 로브노와 체르노비치에서 출발해 소련의 선봉 ‘야전군’을 격멸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는 반격공세를 가하도록 한다. 소련군... 9군과 26군인가? 그놈들, 너무 설쳤어. 하하하"

클라이스트를 비롯한 모든 장군들은 그 터무니없는 낙관론에 기가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아무리 독일의 야전군 편제가 소련군의 그것보다 거대하다지만, 적은 독일의 2개 야전군에 대항하여 몇 개가 넘을지 모를 군을 투입했다.

단순히 2개 야전군을 격멸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뒤에 밀려올 병력의 파도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선 뭔가가 더 필요했다.

모델의 오랜 친구라던 한스-발렌틴 후베 소장은 또 머뭇머뭇 손을 들었다. 모델 사령관은 맑고 낭랑한 웃음을 터트리며 오랜 친구의 물음에 응답했다.

"아! 한스. 그래, 뭐가 궁금하지?"

"저... 이 작전을 위한 증원이 있습니까? 아군의 전력이 이 작전을 위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모델은 장난기어린 눈으로 좌중을 바라보았다. 증원? 증원이 있는 것인가? 모두의 눈이 기대감을 담고 신임 사령관에게 쏠렸다. 그래, 총통이 지극히 총애해서 저 자리에 올렸을 정도라면... 증원이 있지 않을까?

아하하하, 쾌청한 웃음과 함께 그는 크게 대답했다.

"나! 여기 자네들의 신임 사령관이 있지 않나?"

"예에? 허허허···"

후베 소장은 기가 막혔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 사람들이 그의 웃음에 동참했고 순식간에 회의실은 웃음으로 뒤덮였다.

클라이스트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이런 미친 놈을 보았나?’

그러나 지금만큼은 속이 쓰리지 않았다. 그의 사십년 군력에서 미친놈을 본 적은 많았다.

미친놈들은 무모한 짓을 하다가 대패를 하고 책임을 모두 뒤집어쓴 채 모가지당하던가, 혹은... 승리했다. 그리고 이번 미친놈은 어쩐지 후자인 것 같았다.

으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하는 젊은 사령관이 클라이스트는 어쩐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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