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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32화 (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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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하루 걸러 며칠 동안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습한 날씨로 물러져 있던 땅은 점점 한 발짝 떼기도 어려운 진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부대에는 정지 명령이 내려졌다. 어떻게든 높은 곳의 조금이라도 마른 땅을 찾아 숙영지를 구축하고 부대는 잠시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비가... 언제쯤 끝나려나?"

볼로쟈 병장은 학살당한 시신들을 목격한 이후 급속히 말수가 없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짜증을 내며 갈궜을 상황에도 그는 그저 한번 쏘아보고 지나갈 뿐이었다.

볼로쟈 병장이 더 이상 소문을 한두마디씩 전해주지 않게 되자, 이등병 미챠가 이제는 어느새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그런 미챠가 어디선가 물어다 주는 소식들을 전해들으며 배급나온 미제 초콜릿을 우물우물 씹었다. 진하고 달큰한 맛이 입에서 가득히 퍼지는 감각을 니콜라이는 음미했다. 이걸 아버지랑 어머니가 꼭 드셔봐야 하는데.

솔직히 나무딸기 파이보다 미제 초콜릿이 훨씬 맛있었다. 미국인들은 역시 우리의 친구가 맞다.

"지난 공세로 파쇼 침략자놈들은 거의 벼랑 끝까지 몰렸다는데요? 보급로가 없다나 봐요. 프리퍄티에서는 부됸늬 원수님이 신출귀몰하게 파쇼놈들을 때려 잡고 다니시고··· 민스크를 완전히 해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네, 그리고 라스푸티차때문에 지금은 후퇴하셨다는데···"

넌 그런걸 대체 어디서 들었냐? 니콜라이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도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옆 중대 아저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녔던 것 같은데··· 아무튼 군것질을 하는 동안에 듣기론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래, 고맙다. 너 이거 좀 먹어 봐라."

"감사합니다!"

니콜라이는 자기 몫의 배급 초콜릿에서 크게 뚝 잘라 미챠에게 내밀었다. 미챠는 헤헤 웃으며 초콜릿을 크게 우적우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큼직한 초콜릿이었던지라 니콜라이 역시 한입 크게 베어물어도 충분히 많이 남아 있었다.

"아, 그리고 파쇼놈들 장군들이 싹 갈렸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요 동네 관할하던 두목급 파쇼 하나는 아예 반역자로 끌려갔다는데요?"

미제 무전기는 많이 보급이 됐어도 무전기를 니콜라이 같은 병사들이 손댈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소식은 주로 크렘린,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라디오를 통해 전해졌다. NKVD는 파쇼들이 얼마나 곤란을 겪고 있는지를 선전 방송을 통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서 비는 언제쯤 그칠 것 같아?"

니콜라이는 요새 그게 제일 궁금했다. 이 주룩주룩 내리는 찬 장대비가 언제쯤 그치려나? 어쩐지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병에 걸려 온통 옮기고 다니는 병사가 나올까봐 장교들은 이 철에는 병사들의 건강에 무진장 신경을 썼다.

격렬한 전투 중에야 죽고 사는게 문제니 '아픈' 정도를 신경쓸 수 없지만, 지금은 전투는 아예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에서 가끔 슈투카가 나타났다가 슈투르모빅이나 투폴레프기에 쫓겨나는 정도?

사실 니콜라이가 속한 부대는 거의 교전을 할 일이 없었지만 아무튼 비는 싫었다.

"글쎄요? 그거야 저는 모르죠. 그런데 한 1주일 정도면 이게 다 눈으로 바뀔거라나봐요. 이번 겨울은 엄청 추울거라니까 니콜라이 일병님도 따뜻한 옷은 잘 챙겨두세요. 위에서는 벌써 동계 피복을 몇백만 벌쯤 준비했다는데··· 올해는 기상 예보상 엄청 추울 거래요."

"음, 그래. 그래야겠다."

아직 체구도 작고 어린 티가 확 나는 미챠는 고향의 어머니가 보내 주셨다는 두툼한 벙어리 장갑을 자랑했다. 니콜라이는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어려서 죽은 카챠가 아마 살아있었으면 미챠하고 동갑이 아닐까? 짙은 밤색 머리에 파아란 눈을 하고 복숭앗빛 통통한 뺨의 어린 카챠는 이렇게 부슬부슬 비가 오는 늦가을에 죽었다.

집단농장에서는 공출 때문에 식량은 늘 부족했고 약품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배를 곯으며 추위에 벌벌 떨던 어느 날 카챠는 앓아눕고 말았다.

성홍열이라고 했던가? 오빠에게 화관을 만들어 씌워 주며 발그레하게 웃던 그 꼬마아이는 펄펄 끓는 열과 붉게 달아오른 몸뚱이를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다 어느 새벽 자신을 보내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 버렸다.

마을의 의사는 무능력하지만 착한 사람이었다. 마을 소비에트의 부위원장을 두 번 지냈던 오십대의 중늙은이 의사는 약이 없다는 말 밖에 하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구해 온 흑설탕 한 봉지를 몰래 할머니의 앞치마 속으로 밀어넣어 주었다.

목이 부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점점 약해져 가는 아이에게 녹여서 한 술씩 떠 먹이라며. 그러나 카챠는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남은 설탕은 겨울에 폐렴에 걸렸던 할머니와 니콜라이의 약 비슷한 무언가가 되었다.

그때 맛보았던 단맛. 그 단맛을 미제 초콜릿이 기억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카챠같은 짙은 밤색 머리를 한 이등병 미챠 역시, 그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나저나 너 볼로쟈 병장이 왜 저런지 알고 있어?"

"예? 볼로쟈 병장님 출신이 저쪽 동네 아닙니까?"

니콜라이는 문득 궁금해져 미챠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벌써 자는 것인지 저쪽에 드러누워 있는 볼로쟈에게 들리지 않도록. 맨날 같이 다녔으면서 그것도 몰랐냐는 듯한 미챠의 대답이 돌아오자 니콜라이는 아차 싶었다.

어쩐지 그랬던 것 같았다. 한두번 정도 자기 고향은 저기 폴란드 근처의 어딘가라고 그랬었는데.

볼로쟈 병장은 재작년인가부터 군복무를 시작했다고 했었다. 고향 근처의 국경수비군에 배치받았고 그의 고향 마을도 잔인한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저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 최소한 볼로쟈 병장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아, 맞다. 이것도 들은건데... 학살당한 시신들 신원 말이죠?"

"잉? 신원?"

"네, 그 시신들... 들어보니까 마을 호적이랑 비교했을 때 젊은 여자들 시신은 거의 없었다는데요? 파쇼놈들이 죽일 때 노인네들이나 어린애들은 일단 거의 다 죽여서 수가 맞게 나왔는데 군대 끌려간 젊은 남자들은 그렇다 치고... 젊은 여자들은 안 죽였다나봐요. 임산부만 빼고."

등골에 한기가 오싹했다. 니콜라이는 그런 것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배가 불룩한 임산부 시신을 볼 때 구역질이 나왔었던 것은 있었지만, 시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유심히 볼 만한 신경은 그에겐 없었다.

이 잔혹한 전쟁통에 죽이지도 않고 끌려간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거야말로 니콜라이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볼로쟈 병장님 약혼녀도 있잖아요."

"아..."

이것도 들어본 것 같았다. 볼로쟈 병장은 저속한 농담과 행동을 즐기기는 했어도 가끔 군번줄과 같이 건 목걸이에 들어있는 그림인지 사진인지를 조용히 들여다보곤 했다. 그렇게 한참 들여다본 날에는 지랄이 덜 심했고.

또 언젠가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 고참 전역병들에게 주어지는 배급 우선권을 혼수 삼아 결혼을 할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들었다. 지금의 전쟁이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뜬금없이 터진 전쟁에 말려든 병사들은 무사히 전역한 이후의 계획을 떠들어대며 애써 당장 닥칠수도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 했다.

아무튼 그 계획이 아예 뿌리채 뽑혀버린 이상에야... 누가 담담할 수 있을까. 니콜라이는 지랄같던 병장이 어쩐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고향에 편지를 쓰기 위해 병사들은 정치위원에게 가곤 했지만, 요 얼마간은 볼로쟈 병장이 한번도 가지 않더라니.

"그래도 모든 마을들이 저렇게 당한 건 아니래요. 어디는 미리 다 피난해서 괜찮았다는데... 그리고 파쇼 부대들 중 일부는 꼭꼭 다 학살을 했어도 어디는 민간인은 다 쫓아보내기만 했다는데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니콜라이 자신의 고향은 전선과는 거리가 멀어 전쟁의 참화와는 그닥 관련이 없었지만 소대의 몇몇 서우크라이나 출신 병사들은 쑥대밭이 되었을 수도 있는 고향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듯 했다.

부모님은 괜찮으실까? 장성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며 어머니는 기차역에서 그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지켜보던 엔카베데 요원이 패배주의를 선동한다며 굴라그에 처박아 버릴수도 있었겠지만 그 요원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은 아니었는지 못 본척 해주었다.

아버지는 담담한 척 하려 하셨지만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알 수 있었다. 두분 다 농장에서 젊은이들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계실텐데···

"언제쯤 끝날까?"

"네?"

"이 전쟁 말이야. 언제쯤 끝나려나..?"

내년? 내후년? 아니면 3년이나 4년쯤 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앳된 얼굴의 미챠는 볼로쟈 병장 같은 심술궃은 고참 병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옥같은 전장을 몇 번이나 가로질렀을까?

혹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중대와 대대의 전우들, 같이 훈련받았던 입대 동기들, 같은 농장 출신의 청년들, 이미 니콜라이가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알던 이들 중에서도 몇 명이나 죽어나갔다.

그가 살던 집단농장에서 농민의 삶 역시 죽음과 먼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장에는 죽음이 너무나도 흔했다. 지금 이렇게 잡담을 나누면서도 죽음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어린 미챠는 그저 갸웃거렸다.

"글쎄요··· 정치위원님 말로는 이번 겨울이면 파쇼 놈들한테 한 방 제대로 먹일 수 있을 거라는데요?"

"그래? 그거 잘 됐네."

내년 봄의 파종기에는 농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다지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 허물어져가는 언덕 위의 오두막에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장작을 패는 아버지는 그렇게 무뚝뚝하시다가도 아들이 돌아왔다고 하면 장화도 제대로 신지 않고 달려오시겠지.

승리의 날이 오면! 승리의 날이 온다면···

"...남부전구의 동계공세 계획은 결국 이렇게 구성되었습니다. 19개 야전군이 움직이는 실로 거대한 공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계 작전에서 약간의 손실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주코프는 자랑스럽게 작전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는 그 ‘약간의 손실’ 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약간’ 이 어느 정도인가?"

"아, 서기장 동지."

주코프는 내 질문을 받자 자기도 정확한 숫자가 기억이 안 나는지 보고서를 잠시 뒤적거리다가 숫자를 발견하고서는 기분좋게 선언했다.

"사망자 1만 7천여 명, 부상자는 3만여 명입니다. 서기장 동지."

"그런가, 음··· 그 정도면 자네 말대로 정말 얼마 안 되는군?"

백만 단위의 병력이 부딫히고, 하루에도 몇만 명씩 죽어나간 동부전선에서 1만 얼마 수준의 사상자라면 진짜 한 줌이나 다름없다. 죽음은 하나일때는 비극이지만 많으면 숫자가 되어버린다던가.

수십만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이곳에서는 그런 작은 숫자에는 개의치 않았다. 곧 동계공세가 오면 그 몇 배나 되는 인원이 죽고 다치기도 할 테니···

전쟁은 4년 가까이 남아 있었다. 벌써부터 겁먹기에는 너무 일렀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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