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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9화 (29/300)

# 29

29화

니콜라이의 중대는 숙영과 행군을 반복했다. 트럭에 실린 차량화부대나 경전차에 와글와글 몰려 탄 탱크 데산트들이 수시로 그들을 지나쳐 약진했고, 그때마다 니콜라이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거 정말로, 우리가 할 일이 없는게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부정탈지도 모르니 입 다물고 있.."

소대장이 갑자기 무전기로 뭔가를 전해듣는 듯 하더니 소대원들에게 공표했다. 인근에 있는 이름없는 마을들에 혹시 파쇼 패잔병 놈들이 숨어있지는 않는 지 수색하도록 한다. 중대 본대는 그 근처에 흩어진 마을에 각 소대를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볼로쟈 병장은 니콜라이의 뒤통수를 확 후려쳤다. 니가 입을 놀리니까 우리가 할 일이 생기잖냐? 니콜라이는 그냥 걷느니 차라리 마을에 가서 수색하는 척이나 하면서 동네 처녀들과 농담따먹기나 하는게 낫지 않냐, 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제 슬슬 날씨가 쌀쌀해져 가는데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걷는것 보다는 텐트가 나았다. 물집이 세 개나 생긴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난로피워진 오두막 안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비가 오고 겨울이 올 철이 되었으니 각 마을은 집단농장에서 거둬들인 식량이 충분히 있을 것이다. 군용으로 배급된 달달한 초콜릿이나 사탕, 아니면 의무병이 가진 약품 같은 것과 바꿔서 꽤 괜찮은 식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이는 아버지 생신때 어머니가 만들곤 했던 나무딸기 파이가 문득 먹고싶어졌다. 마을에는 나무딸기가 있으려나?

추수를 미처 못 했는지 주변의 들판에는 황금빛 밀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군홧발에 꺾였는지 탱크의 궤도 밑에 으스러졌는지 꺾여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마을에는 그 누구의 인기척도 없었다. 마을을 본 소대장은 즉시 중대본부로 무전을 쳤다. 아무도 없음. 사람의 손길이 꽤 오랫동안 닿지 않은 듯, 오두막들의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이들이 키웠을 가축들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축사는 텅 비어 있었다. 니콜라이는 나무딸기 파이에 대한 기대를 아예 포기했다.

"이런 꼴이면 최소한 두어 달은 방치된 것 같은데..?"

볼로쟈 병장은 수류탄을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니콜라이 역시 기관총의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슬며시 빼냈다.

대체 다 어디로 간 걸까? 기묘하게 퀘퀘한 냄새만이 마을에 유령처럼 부유했다. 니콜라이와 볼로쟈는 짝을 이뤄 다른 부대원들처럼 민가의 문을 열어젖히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유추할 만한 물건들을 찾아다녔다.

사실 니콜라이는 뭔가 먹을 만한 게 없을까가 더 중요했지만. 원래 군인은 항상 배가 고픈 법이다.

"다들 집결! 집결!"

저기 어디선가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두막의 구석구석을 뒤지던 둘은 황급히 다시 무기를 부여잡으며 뛰어나갔다.

마을의 회관쯤 되는 곳에서 소대장이 모두를 불러모으고 있었다. 정치위원 세묜은 넋나간 표정으로 회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많은 소대원들처럼.

니콜라이는 그제서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회관의 벽에는 다른 집들에는 없는 총탄 자국이 무수히 많이 있었다. 회관의 열린 문으로는 코를 찌르는 부패한 냄새가 풍겨나왔다.

"더러운 파쇼 돼지놈들..!"

제각기 알고 있는 가장 심한 욕설들을 지껄이는 가운데, 부패해 가는 시신들이 회관 밖으로 운반되었다. 구더기에 파먹히고 형체를 알 수 없이 훼손된 시신을 보며, 소대에서 가장 어린 이등병 미챠가 구역질을 이기지 못하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몇몇은 성호를 그었다. 평시라면 기함했을 소대장이나 정치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소대장이 남들이 보지 못하게 휙휙 성호를 긋는 것을 보았다. 정치위원 세묜은 눈을 질끈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는 과연 누구에게 기도를 할까? 그도 성모 마리아와 하나님을 믿었을까? 아니면 그가 그토록 경애하는 서기장에게 기도를 했을까.

대략 칠팔십여 구 되는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회관 마룻바닥을 뜯어낸 살해자들은 시신이 된 사람들에게 기관총으로 총격을 가하고 마루 아래의 구덩이 속으로 던져넣었던 것 같았다.

시신들은 손이 등 뒤로 향하게 묶여 있었다. 잘 알아볼 수 없지만 구부정한 노인도, 배가 불룩한 만삭의 임산부도, 그리고 그 임산부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던 자그마한 어린아이도.

워낙 부패가 심해 인적사항은 모두 추정일 뿐이지만 다들 회관 밑바닥에 처박힌 시신이 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부대원들은 눈치챌 수 있었다. 회관 벽에 거대하게 그려진 하켄크로이츠를. 그 아래에 마을사람들은 모두 고깃덩어리처럼 학살당해 있었다.

소대장은 대검으로 시신들의 손목을 묶고 있던 질긴 밧줄들을 잘라 양 손목을 풀어주었다. 역겨운 냄새가 올라오고, 부패한 육체에 밧줄이 파고들며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소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정치위원과 분대장들, 그리고 병사들이 각자 대검으로 시신들의 밧줄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미챠와 다른 어린 병사들은 회관 뒤편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썩은 물이 나오는 시신들은 그렇게 한 구 한 구, 구덩이 속에 뉘여졌다. 마지막 시신까지 안치된 이후 다들 야삽을 들고 흙을 한 삽씩 시신 위에 뿌렸다. 장례를 치르는 것처럼.

지랄맞던 볼로쟈 병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입을 꾹 다물고 흙더미에서 흙을 퍼 구덩이에 던졌다.

아무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 몇몇은 입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소대장의 눈은 시뻘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차렷, 경례!"

매장을 마친 후 봉긋하게 생겨난 무덤 앞에서 부소대장이 경례 구호를 붙였다. 지금까지 해본 것 중 가장 절도있는 경례가 아닐까. 지쳐 있었던 것 같았던 병사들은 마치 장군을 대하는 의장대처럼 각 잡힌 경례를 했다.

소대장은 별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병사들은 마을 중앙의 공터에 모여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누군가 텐트들 사이에 모닥불을 피웠다. 퍽, 퍽, 불티가 튀어오르는 것을 니콜라이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정치위원 세묜이 자기 텐트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니콜라이는 흠칫 하고 그를 따라가 그의 텐트 앞에 섰다.

"저.. 계십니까?"

텐트 입구를 열고 세묜이 밖을 흘깃 보았다. 니콜라이는 왠지 미안해, 뒷머리를 벅벅 긁었으나 세묜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러들였다.

"그래, 니콜라이 이병. 오늘 고생 많이 했네."

"예? 아유, 제가 고생은요... 고생은 마을 사람들이 다..."

세묜은 쓰게 웃었다. 바닥에 놓여 있던 가스등이 흔들리는 듯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서 흔들렸다. 두텁게 담요를 깐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털썩 앉은 세묜은 애써 밝은 척 하는듯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해서... 아무 일 없이 오지는 않았을테고, 무슨 일인가?"

"에... 그게... 크흠."

말하기 어려운지 뜸을 들이는 그를 세묜은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아직 스물 몇 살 밖에 안 된, 피끓는 젊은 공산당원치고는 그는 굉장히 차분했다. 니콜라이는 어쩐지 큰형님에게 혼이 나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속에 있는 내용을 털어놓았다.

"파쇼 놈들은 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제 말은, 왜 마을 사람들을 저렇게 처참하게 죽였냐는 것인데.. 저들이 대체 저.."

세묜이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들겨 주었다. 뭔가 속에서 북받쳐 올라 그는 도저히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흐느끼는 그에게 세묜은 달짝지근한 홍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홍차는 진하고 달콤했다.

마시면서 듣게. 세묜이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 이익을 위해 그럴 수도 있고, 대의를 위해 그럴 수도 있어. 자네는 파시스트 병사들이 왜 사람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나?"

"이익 때문인가요?"

니콜라이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묜은 거의 비어가는 니콜라이의 찻잔을 보고 한 잔을 더 권했지만 니콜라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일반적인 정치위원에게, 병사가 이래서는 안 되었겠지만 세묜은 그런 것 정도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대의 때문이네. 물론 그 대의는 옳은 대의가 아니라 독일의 저 파시스트 정권이 국민들에게 가르쳐 넣은 대의일 뿐이지만."

파시스트 정권 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세묜의 목소리에는 음절마다 짙은 분노와 혐오가 섞여 있었다. 니콜라이는 그가 그렇게 분노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파쇼들의 장군들과 군수 자본가들은 자기네들이 출세할 기회, 그리고 자기네들이 만들어낸 무기를 팔아먹을 기회를 원하지. 그래서 이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네.

"우리 나라의 영광, 우리 민족의 영광, 그리고 그 속에서 번영하는 국민들의 삶 같은. 그래서 그걸 진심으로 믿게 된 어리석고 불쌍한 노동자 계급의 청년들은 전장에 끌려나와... 적국의 인민들을 이렇게 도살하게 되지."

오늘 낮에 본 처참한 광경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동물을 도살하는 것도 그렇게 잔인하지는 못했다. 농장에 살면서 몇 번이나 먹기 위해 동물을 죽여 봤음에도, 사람이 사람에게 저럴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상상하지 못했다.

"저들의 두목 히틀러라는 자는 이 광활한 어머니 조국의 대지가 오직 자기네 민족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며 국민들에게 헛된 망상을 불어넣었어. 그리고 이 땅에 수백 년간 살아온 이 사람들은 없어져야 한다고.

"좌절한 사람들의 귀에 불어넣는 말들은 이렇게 힘이 있지. 아마 이 학살을 저지른 저들도 집에 가면 니콜라이 자네처럼 감수성 많고, 남을 동정할 줄 아는 청년일지도 모르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죽어가는 자들은 누구인가 하면, 바로 노동자 계급의 아들들이야. 저놈들이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낸 이 더러운 전쟁에서 자네와 나와, 그리고 저기 병사들같은 사람들이 얻은 건 뭔가?"

세묜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다.

"소련의 넓은 땅과 자원을 독일인들이 빼앗아간다면 독일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뭔가가 나아질까? 여전히 고된 노동을 해야 하고,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겠지. 그들에게 노동자들은 부품일 뿐이고.

"우리는 그래서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나라 소련을 세우고 싸우는 것이네. 알 것 같나?"

마지막에 이르면 세묜은 거의 연설을 하는 것 같았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만세! 스탈린 동지 만세! 농장의 아저씨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그렇게 외치곤 했다.

니콜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묜은 마지막으로 홍차를 한 잔 더 권했지만 니콜라이는 그 역시 거절했다. 자신의 텐트로 돌아오자 볼로쟈 병장은 어딜 다녀왔냐는 눈치로 흘긋 그를 봤지만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니콜라이가 조용히 자리에 누우며 본 볼로쟈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굳어 있는 상태였다.

"저··· 병장님?"

"..."

볼로쟈는 그저 니콜라이를 흘긋 볼 뿐이었다. 둔한 그의 눈에도 볼로쟈는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뒤통수라도 퍽 때렸으면 좋겠는데. 볼로쟈 병장이 힘없이 돌아눕는 것을 본 니콜라이는 담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은 사람들이 불쌍했다.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하지만 또 한켠으론 독일 병사들도 불쌍했다. 몇몇은 히틀러 추종자들이 얼마나 악마적이고 잔혹한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러나 과연 저들은 날 때부터 악마였던 걸까? 독일 병사들도 총에 맞아 죽어갈 때면 어머니를 찾았다. 옆구리에 묵직한 총의 감촉이 새삼 느껴졌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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