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28화(1941.9.28)
"이제 때가 왔군. 각 부대에 명령을 내려도 되겠는가?"
"예! 서기장 동지!"
1941 9월 28일.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전 전선에 걸쳐 소련군에게는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수백, 수천 문에 달하는 포병대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아아,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각 부대에 전한다. 각 부대에 전한다. 여기는 농장. 여기는 농장."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았다. 반복한다.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았다."
추계공세다! 빌어먹을 파시스트 새끼들아! 인민의 야포 맛 좀 봐라!
주코프와의 상의 하에, 그동안 남부전구에서는 일요일에는 공격을 최소화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독일인들의 신앙이나 정교회가 주는 효과 그런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협정이라도 맺은 것처럼, 일요일에는 빨갱이 놈들이 공격을 좀 덜 하더라-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당연히 방심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지금처럼 일제히 공격이 시작될 때 모두 허둥지둥할 수 밖에 없었다.
비겁하다고? 이건 전쟁인데?
소련군의 IL-2 공격기는 키예프와 빈니차, 체르카시와 키로보그라드에서 이륙해 독일군의 비행장을 공습했다.
독일군 파일럿들은 주말 밤의 달콤한 잠자리에서 깨어 공습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비행기에 올라타려 했지만 이미 전선에 근접한 비행장들에는 소련군 포병대의 집중 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41년 하반기 공세의 목표는 독일군 남부집단군의 주력인 1기갑집단과 최정예라는 6군을 섬멸하는 것.
독일 남부집단군은 6군, 17군, 11군과 루마니아 4군 및 3군단, 그리고 1기갑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기갑집단을 창끝으로 하여 나치 독일군은 키예프 근처까지 길게 진군해 있었다. 이 뒤를 후속하는 보병부대인 나머지 야전군들은 북에서부터 남까지 6군, 11군, 17군과 루마니아 4군 순서대로 쭉 전선을 형성했다.
"추계공세의 단기 작전 목표는 키예프까지 진군해온 선봉군인 1기갑집단의 말랑말랑한 옆구리를 지켜주고 있는 6군을 구축된 방어진지에서 몰아내고, 보급루트에 타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번 작전의 총 설계역을 맡은 바실렙스키는 침착하게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조율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6군이 밀려난다면 1기갑집단은 진흙탕 속에서 잘 기동되지도 않는 중장비를 버려가며 후퇴할 것인가, 혹은 현재 위치를 사수하려다 장렬히 전몰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퇴 루트는 점점 좁아질 것이었다. 일단 내 기억상 열흘이면 라스푸티차가 도래해 온 땅을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기상 예보들도 곧 가을비가 시작될 것이라 예측했다. 멀쩡한 차도 돌아다니기 어려운 상황에 묵직한 전차들이라면 어떨까?
남쪽에서는 소련군이 올라온다. 동쪽에는 그동안 밀지 못한 방어선이 여전히 견고한 위용을 자랑한다. 북쪽으로 펼쳐진 프리퍄티의 늪지대는 라스푸티차 계절에는 더욱 질척질척해지며 천연의 장벽이 되었고, 이 방면으로 후퇴하는 것은 그냥 자살이나 다름 없다.
남은 것은 서쪽. 1기갑집단에게는 서쪽만이 기동루트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뒤를 지켜주어야 할 6군이 후퇴하면 후퇴할수록 기동축선은 점점 좁아지고...
포위섬멸, 혹은 대탈주. 1기갑집단은 과연 뭘 선택할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까? 아니면 싸우다 죽을까? 1기갑집단 사령관 클라이스트는 명장이라 하던데··· 과연? 어떤 신묘한 수를 쓸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보병의 공세에 시동을 건 것은 1충격군과 2충격군이었다.
공세 제파의 선두를 맡은 두 충격군은 서기장의 특별한 배려로 소련군 전군에서 가장 잘 무장된 집단으로 거듭나 있었다.
대부분의 소련군 보병 중대는 일개 소대 정도가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거나, 혹은 분대 단위에서 2인 이상이 기관단총으로 무장하는 수준이었지만, 이 두 충격군만은 근접전에서 유용한 자동화기의 비율을 껑충 높여 5할 가량이 자동화기를 보급받을 수 있었다.
또, 상급 사령부는 보급 과정에서 툴툴대며 반드시 사망자로부터 수류탄을 회수할 것을 명령하기는 했어도 매 병사가 2개 이상의 수류탄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수십만 발의 수류탄 역시 보급해주었다.
그리고 이 충실한 무장은 독일군과의 보병 접전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지난 2주 간 신형 기관단총을 보급받은 후 분해조립과 총기수입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소련군 이병, 니콜라이 이바노비치는 포스터에서 본 서기장 이콘을 생각하며 신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이 총 진짜 쓸만합니다. 제발 저 총을 좀 계속 쏠 수 있게 해주소서.
‘사실 그냥 집에 가고 싶지만 그건 전우들에게 미안하지 말입니다.’
꽝! 콰쾅! 새벽 2시부터 포격이 시작되어, 동쪽 지평선에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점까지 포격이 계속된 이후 니콜라이가 소속된 부대가 공세에 투입되었다.
오늘의 공세를 준비한다며 정치위원 동지는 고맙게도 어저께부터 이틀간은 사역을 중지시켰고 어제는 특식과 특별 휴식까지 주어 부대의 체력 상태는 새벽부터 깨어있었던 것 치고는 꽤나 괜찮았다.
반면, 파쇼 놈들은 새벽에 한창 자야 할 시간에 포격때문에 혼비백산한채로 깨어나 내내 두들겨 맞았기에 영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오, 파쇼 돼지새끼들이 무기도 버리고 갔잖아?"
독일 놈들이 도망친 참호에는 종종 그들의 무기들이 버려져 있었다. 보급된 기관단총이 충분히 우수했기에 대부분 총기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수류탄만은 병사들이 기를 쓰고 하나씩 차지하려고 했다.
니콜라이의 선임인 블라디미르-통칭 볼로쟈-병장은 수류탄을 네 개나 얻었지만 곧 막대형 수류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행군하는 게 불편하고 무거웠는지 주변 병사들에게 담배 두 갑이나 미제 초콜릿 몇 개를 받고 수류탄을 하나씩 나눠주고 왔다.
"이봐 니콜라이, 여기 수류탄 하나 받으라고. 너한테는 특별히 그냥 주는거니까 고마워해."
"예? 아, 감사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수류탄은 교환할 이를 못 찾았는지, 볼로쟈는 그걸 니콜라이에게 넘겨주었다. 무슨 크게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니콜라이는 속셈을 알 것 같았지만 하늘같은 선임병 앞에서 그걸 차마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총성이 들렸다. 니콜라이는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생각했다. 볼로쟈 병장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나중에 끝나는 총성이 승리한 것이었다.
연발로 끝나는 총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 기관단총이 제몫을 해주는 게 아닌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대장 동지에 따르면, 1.6km 앞의 토치카를 제압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지금 행군 속도로는 대략 10분 가량 더 걸으면 토치카의 기관총 유효사거리 안에 들어가게 되니 조심하기를 바란다. 우리 소대는 1소대를 따라 돌입하는 2파 역할을 맡았으니 아군오사를 내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라."
볼로쟈 병장은 투덜거렸다. 이런 데에 있을 토치카라고 해 봐야 다 무개호 아닌가? 박격포 한 대만 있어도 다 제거가 가능할텐데 우리같은 알보병을 막...
"병장, 너무 걱정하지 말게. 현재 우리 부대의 무장상태를 생각하면 충분히 지원이 있을 것이니, 이후 있을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지."
"예, 예 아무렴요. 정치위원 동지."
하급병사들에게는 어릴적 할머니가 난롯불가에서 들려주던 이야기 속의 마귀처럼 굴던 볼로쟈 병장도 소대 정치위원에게는 전혀 꼼짝 못 했다.
정치위원은 전쟁 발발 전에는 대학생이었다고 했다. 니콜라이는 징집되기 전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야학에서 자기 이름 쓸 정도로만 글을 배웠다. 사실 글자 모양의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그래서 집에 편지를 보낼 때나, 아니면 편지를 다시 받을 때나 정치위원 동지가 읽어주는 내용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정치위원 동지-늘 자신을 세묜이라고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는 좋은 사람이었다. 니콜라이가 더듬거리며 무슨 말을 편지로 써야 할 지 고민할때 그는 항상 미소띈 얼굴로 변변한 단어를 생각해내지 못하는 그에게 좋은 문구를 하나씩 제시해 주었다.
물론 정치위원 세묜이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중대의 둘뿐인 여군 중 하나인 간호병 마리아 이바노바는 세묜을 좋아하는 듯 했다. 아니, 솔직히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니콜라이는 중대의 다른 병사들처럼 간호병 마리아 이바노바를 사모했지만 그녀의 눈길은 늘 세묜을 향하고 있었고, 일찍 결혼해서 벌써 애가 둘인 중대장 동지마저도 그를 질투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볼로쟈 병장은 낄낄대며 세묜과 마리아의 관계를 저속한 손짓으로 묘사하곤 했다. 아직 신병이나 다름없는 니콜라이는 차마 겉으로 뭘 꺼내어 말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사람이 완벽하기만 하겠어?’
그는 분명히, 샌님 대학생인 세묜보다 잘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샌님이라고 폄하하기엔 세묜이 용감하다는 것은 그 짧은 시간동안에도 알 수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기에는 질투심이 너무 강력했다.
집단농장에서 해왔던 일들을 니콜라이는 따올렸다. 예컨대 밀을 베는 것이라던가, 꼴을 쒀서 쇠죽을 만든다던가, 아니면 젖소의 젖을 짠다던가... 문득 마리아 이바노바의 풍성한 가슴이 생각났다. 희고 검은 얼룩의 젖소가 아니라 금발을 늘어트린 마리아 그녀가... 크흠.
아무튼 트랙터도 아마 니콜라이 자신이 더 잘 몰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여자에게 잘 보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세묜, 그가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는 푸시킨이라는 시인의 시집에서 멋들어지게 시를 읽어주는게 더 좋지 않을까?
끼이이이익!! 비명같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괴수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슈투카다! 슈투카!"
소대원들은 제각기 흩어져 엄폐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군 전투기들이 슈투카에게 달려들더니, 슈투카는 금방 격추되어 저 멀리에 추락했다.
"이 보게나, 우리는 지금 포병과 항공기 지원을 넘치도록 받고 있어! 지금 우리는 파시스트 침략자 놈들보다 최소한 두 배는 많은 비행기를 이 지역에 가지고 있다지? 아마 우리가 제압해야 하는 토치카도 슈투르모빅이 공격해줄 지도 모르지."
정치위원 세묜은 서기장을 진실로 경애했다. 집단농장에서 무리한 공출량때문에 꽤 많이 굶어 본 니콜라이는 그 의견에 항상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요새 와서는 서기장이 진짜 엄청난 사람이 아닐까, 고민하게 되었다.
세묜이나 볼로쟈, 혹은 다른 상급 병사들이 그런 견해를 열심히 피력한 것을 듣는 것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기장 동지는 이런 무기 하나부터 본인이 모두 설계하시고 생산을 지도 감독하신다고 하네. 항공기에 몇 명을 태울 지, 이 총에 어떤 탄환을 쓸 지, 이런 문제들까지 본인이 다 관리한다고 하니... 거대한 나라의 수많은 일들을 일개 인간이 다 그렇게 관리할 수 있겠나? 진실로 놀라우신 분이야."
세묜의 말을 들으니 그럴 듯 했다. 높으신 장교들 역시 서기장이 주는 무기와 병력과 지원에 항상 감탄하며 그를 찬양하는 말을 했다.
정치위원 동지는 꽤 좋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지 않으려나? 니콜라이는 그렇게 고민했다.
동생 나타샤는 어릴 적 먹을 것이 부족해 허약해지고, 결국 집단농장에 한창 돌던 티푸스에 걸려 죽었지만 그런 문제는... 정치위원은 그것이 아주 불행한 비극이라고 했다. 서기장 동지는 그런 비극을 항상 슬퍼하실거라고도.
우크라이나의 부농 반역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사보타주를 경계해야 한다는 일장 연설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잘 이해는 안 갔지만, 니콜라이는 그러려니 했다.
"역시 정치위원 동지 말대로군요! 저들의 참호를 이미 슈투르모빅이 공격해서 작살냈다고 합니다! 이미 그 구덩이 속에는 더러운 파쇼 돼지들의 시신으로... 아주!"
"그것 잘 됐군 그래, 볼로쟈 병장. 내가 뭐라고 했는가? 안 그래? 하하."
포격이 쓸고 간 무인지대를 중대는 행군했다.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저만치 멀리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엔진음이 가까워졌고, 뒤에서 T-60 경전차 1개 중대가 털털거리며 진군해왔다. 탱크 데산트들이 적지를 두 발로 행군하는 알보병들에게 친근함이 섞인 웃음을 보내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전우님들!"
니콜라이도 별 생각 없이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마 우리 부대에는 저런 기갑차량들이 없을텐데, 후속 부대가 벌써 여기까지 진군해온 건가? 우리가 할 일이 줄어들겠는데?"
볼로쟈 병장은 이상하게 아는 것들이 많았다. 우리 부대에 뭐가 있고, 그런걸 어떻게 다 아는지.
니콜라이는 볼로쟈 병장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볼로쟈의 기분이 좋아져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도 사실 기분은 좋았다. 싸울 일이 줄어든다는 것은, 병사에게는 항상 좋은 일이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